청도 가는 길, 두 번째 여행 (1)
모처럼 여름휴가를 낼 수 있었다. 껌딱지 유치원 졸업반 꼬맹이가 엄마 아빠와 함께 비행기 타고 베트남 나트랑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동행을 사양했다.
나의 여행 코스는 남서울터미널-대구 현풍-선산참배-경북 청도-삼랑진-전남 순천(2025.08.21.~25), 두 번째 청도 탐방 길이다. 금년 5월 전 생애 처음으로 청도 가는 길을 탐색 한 바 있었다. 이번에는 좀 더 자세하게 돌아보기로 했다. 그중에서 특히 현풍 한훤당 고택과 청도읍성과 청도박물관을 꼭 가 보기로 했다. 또 삼랑진역 앞의 추모비 사연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옆지기와 선암사의 선암매 추억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계획을 세웠다.
<탐방순서>
현풍공영 버스정류장 > 현풍 백 년 도깨비 시장> 현풍곽씨 십이 정려 각> 용흥저수지> 한울안중학교> 지동지> 한훤당 고택 > 은행나무> 고봉 언덕> 용연저수지> 선산> 달창저수지> 청도 버티재 고개 > 청도읍성 입구
남서울터미널에서 출발(2025.08.21, 08:00 목, 야외활동 자제 경보 발령, 35도 염천지하), 현풍공영버스정류장에 도착(11:20, 약 3시간 20분 소요)하였다.
현풍공영 버스 정류장 내부를 잠시 들렀다. 새롭게 이전하였다. 자가용 승용차를 이용하는 시대이니, 규모가 옛날 같지 못하다. 각 지방별 운행 횟수도 옛날 기억을 더듬어 보면 거의 비슷한 것 같다. 바로 옆 산에 충혼탑이 있다.
현풍천 돌다리를 건너 현풍 백 년 도깨비 시장으로 올라갔다.
현풍천에 백로 모자가 반겨 주었다. 아기가 엄마로부터 생존 훈련을 받고 있는 듯 보였다. 송사리 떼가 몰려다녔다. 비슬산과 주변산에서 내려오는 영양 풍부한 물과 깨끗한 공기가 생물들을 보듬어 주고 키워 주고 있다.
현풍 백 년 도깨비 시장
현풍 백 년 도깨비시장은 1918년 3월에 개장하여 100년이 넘는 전통시장이다. 매월 5일과 10일에 열리는 전통시장이다.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청년몰이 2층에 있다.
도깨비라는 이름 유래는 모든 손님과 상인의 근심과 걱정을 먹는 도깨비가 현풍 시장에 살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았더니, 근심과 걱정이 거짓말 같이 깨끗이 삭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시장 마스코트는 도깨비 현이와 도깨비 풍이다. 옛날 엄마 생각이 나서 보리밥 정식을 먹었다. 싸고(6천 냥) 맛있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청년 상인들에게 전통시장 내 공간을 제공해 창업을 지원하는 청년몰 사업을 진행 중이다.
현풍곽씨 십이 정려각
현풍 곽 씨(현지에서는 소례 혹은 솔례 곽 씨라고 부름) 집안에서 유교 도덕의 기본인 삼강(三綱,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 지켜야 할 도리)을 지킨 28인의 정려비다.
1598년(선조 31)부터 1608년(영조)까지 포상된 분들을 모시고 있다. 정려각 안에는 2개의 비석과 10개의 여각이 있다.
임진왜란 때 안음 현감 곽준이 황석산성에서 두 아들과 같이 전사하였다. 며느리와 출가한 딸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다.
곽재기의 부인 광릉 이 씨는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었다.
곽홍원의 부인 밀성 박 씨는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죽음으로써 남편을 보호하였다.
곽수형의 부인 안동권 씨는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기원했으나, 남편이 죽게 되자 먹지 않고 따라 죽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의 4 촌 동생인 곽재훈의 아들 4형제가 임진왜란 때 병환 중에 있는 아버지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아래 사 효자굴 글 참조, 비슬산 등산(1) 2022.06.28 탐방 https://brunch.co.kr/@jylee2020/49/write )
사 효자굴(사효굴)
지극한 효심이 느껴지는 슬픈 이야기다. 비슬산 유가사에서 내려와 사 효자교를 지나면, 사 효자상과 안내 간판이 나온다. 길에서 150m 정도 걸어서 들어간다.
약 30m 더 가면 상성 폭포가 나온다. 오랜 가뭄 탓에 물줄기가 힘이 없었다. 아버지의 기침소리에 왜병에게 발각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굴의 위치가 계곡 중턱에 있어, 메아리 효과로 기침소리가 계곡물 건너편 이동 중인 왜병들에게 쉽게 들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 효자 굴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의 4 촌 동생인 곽재훈(郭再勳)의 네 아들 결, 청, 형, 호는 왜병을 피해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비슬산 중턱(양리)에 있는 동굴에 숨었다. 왜병들이 굴 앞을 지날 때 아버지의 기침소리(천망병, 기침병)로 굴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포위망을 좁히며 애워쌓다. 왜군들이 아버지를 해치려 하자 효성이 지극한 아들들이 차례로 나아가 죽음을 당하였다.
마침내 왜병들도 그들의 효행에 감동하여 아버지를 풀어주면서 ‘4 효자의 아버지(四孝子之父)’라고 아버지의 등에 종이를 부착하였다. 그 왜병들은 물론 다른 왜병들도 그 아버지는 죽이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이 굴 앞에 ‘사 효자굴’이라고 쓴 비석을 세워 이들의 효성을 추모하였다.
용흥저수지
용이 승천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하여진다. 입구에 현풍곽씨 십이 정려각이 있다. 옛날에는 낚시할 수 있었는데, 확인 중이다. 저수지 물이 벌판의 곡식들을 키우고, 나머지는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한울안중학교
기억으로는 옛날에 그 자리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2020년에 중학교가 새로 세워졌다고 한다. 그때 그 초등학교 선수들이 우리 학교로 와서 씨름 시합을 하였다. 키가 자그마한 선수가 있었다. 배지기 전문이라 상대방을 머리 너머로 집어던지던 당찬 아이였다. 그 초등학교가 폐교가 되었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지동지
한훤당 고택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정조 2년 한훤당의 11 세손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태보 김정제가 이주할 때 어느 지관이 마을의 형국이 나비처럼 생겨서 마을 앞에 못을 파면 후손이 번창한다고 하여 못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연못 이름을 동네 지동에서 따왔다.
한훤당 고택(寒暄堂 古宅)
대구 달성군 현풍읍 지리의 동족부락이다.
한훤당 김굉필의 11 세손 김정제가 1779년 달성군 구지면 도동에서 현풍읍 지리로 이주하면서 서흥 김 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1454~1504)의 도동 서원(2022.12.24 탐방 https://brunch.co.kr/@jylee2020/90)과 선생을 배향하는 옥천서원(전남 순천, 탐방 후 2022.09.17 글 https://brunch.co.kr/@jylee2020/63 )에 대하여는 이미 탐방 후 글을 남겼다.
백일홍과 기와를 얹은 담이 잘 어울린다. 고택 안의 건물들을 카페와 숙소로 활용 운영하는 것이 다소 이색적이었다. 국가 예산으로 경내의 문화재를 보존 관리하고, 마을 입구나 지동지 부근에 카페와 숙소등을 별도 운영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못골마을
나비모양을 닮은 마을이다. 못골 혹은 지리, 지동이라 불리고 있다. 지금도 20여 가구의 서흥김 씨들이 살고 있다.
은행나무
한훤당고택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달성군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된 은행나무 고목이다.
고봉 언덕 (카페)
용연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는 카페다. 애견 동반이 가능하다. 앞에 멋진 벚꽃 길과 용연 저수지가 있어 봄에 꼭 다시 한번 오고 싶다. 낚시꾼들도 더러 보였다.
용연저수지
비슬산 기슭에서 내려오는 물을 달창저수지에서 1차로 저장한다. 그다음 약 3km 밖 달창저수지의 물을 냇가와 수로 터널을 통하여 흘러 보내 용연저수지에 마지막으로 저장한다. 개구쟁이 용감한 친구들과 초등학교 하교 길에 약 200m 길이의 수로 터널(5m*3m) 속을 통과하여 집에 온 기억이 있다. 발목 높이의 물속에서 헤엄치던 매기와 붕어들을 잊을 수가 없다.
봄에는 연못 주변 논에서 뿌리를 캐어 먹고, 여름에는 멱감던 곳이다. 장마철에는 모를 심어 놓은 논으로 잉어들이 들어와 손으로 잡으러 쫓아다녔던 추억의 저수지다. 워낙 힘이 세서 부등 커 안아도 뛰쳐 빠져 나가 한 마리도 못 잡았다.
가을에는 저수지 주변 야산에서 마을 어르신들이 야유회를 하였다. 저수지 언저리의 포도밭과 사과밭을 호시탐탐 기웃거렸다. 겨울철 철새 도래지며, 천둥오리들의 놀이터였다. 어릴 적 썰매를 즐겨 타던 곳, 물에 빠지면 양말을 불에 말리다 태워먹었던, 개구쟁이들의 아지트였다.
불보사 앞의 선산에 참배를 하고, 달창 저수지를 우회하여 청도로 향했다. 부모님과 고향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준, 6.25 눈물의 청도 버티재 고개를 넘어갔다.
밀성 박 씨 문중의 낙계제와 흑석동 마을을 일부러 둘러보았다. 검은 돌 흑석, 즉 고인돌을 찾아보았으나 실패했다. 기온이 너무 올라가 인적이 없었다.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낙계제(樂溪齋)
청도 흑석동에 있다. 박환생(朴還生) 선생을 모신다. 호는 낙계이며 1574년(선조7년)생으로 훈련원 첨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 선생과 더불어 왜적을 크게 무찔러 선무원종 이등공신에 올랐다.
마침내 청도읍성입구 관광문화해설사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해설사분이 땡볕에 등 가방을 짊어지고 나타난 여행객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찬물을 권했다. 벌컥벌컥 마셨다. 읍성 성곽 이동 중에도, 마을 회관 스피커에서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방송이 계속 나왔다.
제일 궁금한, 6.25 때 청도로 피란온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창 더울 여름철에 청도 고개를 넘어 집단으로 몰려온 피난민을 정성을 다해 보듬어 주고 먹여주고 재워준 고마움과 은혜에 대하여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드렸다. 고맙다고 하셨다. 청도를 다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이어서 팸플릿을 받고, 간단한 읍성 이야기를 듣고, 석빙고를 둘러보았다. 추천하여 주신 대로 시계 방향으로 청도읍성을 순회하였다.
<참고 자료>
-. 다음 전자 사전
글이 길어져, 청도읍성과 청도박물관 이야기는 다음 회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