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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유호연지(柳湖蓮池), 군자정, 추석 반보기 이야기

청도 가는 길(3), 유등연지, 삼랑진역

by 애바다
청도 (소싸움과 화랑정신, 새마을 운동의 본고장) 지도
청도 관광 9경(제7경 유등연지)

청도읍성과 청도박물관 탐방 후 청도역으로 이동 중에 유등연지(혹은 유호연지)에서 잠시 쉬어 갔다. 청도읍성의 카페 읍성에서 탄 택시의 기사님은 유등연지 유래와 고성 이 씨 며느리의 명당 이야기, 반(半) 보기의 유래, 의마총 전설, 대원군의 책사이자 관상의 대가인 박유붕의 예언 등등을 끊임없이 재미나게 설명해 주셨다.

입청도 고성 이 씨 세거지 표지석
유호연지와 군자정(1)
유호연지와 군자정(2)

유호연지(柳湖蓮池)

청도 화양읍 유등리에 있다. 연꽃이 유명하다. 사유지이며 잎이나 꽃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고성 이 씨 청도 입향조 모헌(慕軒) 이육(李育) 선생이 연산군의 무오사화로 이곳에서 은거하며, 신라지라 불리던 그 못을 더욱 넓히고 연을 심었다. 유호연지라 이름 지었다. 연꽃은 군자의 꽃이다. 고결함과 선(仙)을 상징한다.

유호연지와 군자정 유래(1)
유호연지와 군자정 유래(2)
유호연지의 버드나무와 연꽃과 군자정

약 21,000평, 둘레 약 700m, 깊이가 2m 규모다. 유호연지 입구 군자정(君子亭)은 인공 섬 위에 세워져 있다. 돌다리를 건너 일감문(一鑑門)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또 군자정 양편에 작은 두 개의 섬을 만들어 놓았는데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고, 호수에는 연꽃이 피어 있다. 그래서 유호연지(柳湖蓮池)다.

일감문과 군자정

군자정(君子亭)

모헌 이육(李育)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낙향하여 유호연지의 군자정에서 시를 읊고 글을 지으며 생을 마감했다. 1531년 지었다. 4간 겹집으로 방 2간 마루10간이다. 입구 일감문의 일감(一鑑)은 송나라 주자의 시구에서 따 왔다.

유호연지의 연꽃

모헌(慕軒) 이육(慕軒 李育)

전남 담양의 소쇄원 양산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시대적 배경과 설립 취지가 매우 흡사하다.

(선비 양산보의 담양 소쇄원을 찾아서, 2023.10.08, https://brunch.co.kr/@jylee2020/126 참조)


이육은 안동에서, 이평(李泙)의 5형제 중 넷째 아들이다. 맏형 윤(胤)과 둘째 형 주(冑)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하였다. 이육은 두 형과 달리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문음(門蔭)으로 1493년(성종 24)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로 대사간이던 맏형 이윤이 거제도로, 정언 벼슬이든 둘째 형 이주가 진도로 유배되었다. 뒤이어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 19)에 둘째 형 이주가 장살을, 아버지 평(泙)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두 숙부마저 각기 영해와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이육이 둘째 형 이주가 전남 진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를 문안하기 위하여 안동을 출발하여 이곳 청도를 거쳐 진도를 왕래하였다. 청도의 산천과 평야의 매력에 빠져 정착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형제 숙부들까지 처참한 수난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였다. 중국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는 연꽃을 화지군자(花之君子)라고 하였다. 이육은 연못 신라지를 더욱 넓히고 깊게 파서 연을 심었다. 유호연지에 군자정(君子亭)을 짓고 선비들을 만나고 후학을 가르쳤다.

유호연지의 연꽃 / 입향조 모헌 이육의 묘(출처, 다음)

청도 입향조 모헌 이육의 묘 터

연지 건너편 이육의 묘 터는 자손이 번창할 명당이라고 한다. 원래는 며느리(崔 氏)의 친정아버지의 묘를 쓸 곳이었다. 그러나, 사화(士禍)로 피폐해진 시댁(媤宅)을 일으켜 세우려는 며느리의 야망과 계략으로 묘의 주인이 바뀌었다.


최 씨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녀는 밤새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그 명당에 물을 퍼부었다. 당연 친정에서는 그 묫자리를 포기하였다. 며느리의 집념대로 시아버지가 그 명당에 묻히도록 했다는 전설이다. 어쨌거나 그 지극정성 덕분이었는지 모헌 이육의 후손들이 각 분야에 다양한 활약을 했다고 한다. 유호연지에는 연꽃과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위기에서 고성 이 씨 가문을 구한 며느리의 집념의 전설 이야기가 있다. 출가외인이란 말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반(半) 보기

1960년대까지 유호연지는 반보기의 명소였다고 한다. 그날은 며느리의 특별한 휴일이었다. 추석 무렵에 고성 이 씨 며느리와 친정 엄마가 유호연지에서 만났던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이곳에서 만났다. 청도군은 매년 4월 초파일 유등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반보기의 어원은 하루해의 절반만 양가 집의 중간 장소에서 만나본다는 뜻이다. 중부이남 지방의 농촌풍속으로 중로 보기, 중로 상봉 등으로 부른다. 출가외인이라는 유교 전통 사회에서 부녀자들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하여 세시명절에 양가 집의 중간지점에서 해후를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사돈끼리 만날 때, 반 보기를 하였다고 한다.

미리 통문을 보내서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정성을 들여서 준비한 음식과 토산물을 함께 먹으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보통 새벽길에 나선 어머니가 먼저 반보기 장소에 도착해서 딸을 기다렸다. 반보기 장소는 중간쯤이지만 시집 쪽에 가까운 곳을 택한다. 딸이 오기가 쉽기 때문이다. 좀 더 딸을 오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해 내려오는 민요가 있다. 찡한 느낌이 온다. 나에게도 그런 부모님이 아직도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을고!

"하도하도 보고 지워 / 반보기를 허락 받아 / 이내 몸이 절반 길을 가고 / 친정 어메 절반을 오시어 / 새중간의 복바위에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며 / 엄마 엄마 울 엄마야 / 날 보내고 어이 살았노.."('半보기' 중)

의마총 표지판

의마총(義馬塚)

유호연지 근처 대로변에서 의마총이란 안내 간판을 보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표석과 함께 무덤도 있다고 한다. 이 의마는 임진왜란(1592년) 때 의병장 이해(李海) 의사(義士)의 애마였다. 임진왜란 때 이웃 창녕에서 곽재우 장군 휘하로 왜병을 격파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 뒤 정유재란(1597년)이 일어났을 때 1만여 명의 관군과 의병이 남원성을 지키다가 중과부적으로 5만 6천의 왜병 앞에 이해 장군은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그때 이해 의병장은 절명사(絶命詞)를 써서 말의 안장밑에 넣어주며 고향 청도집에 알리라고 채찍질해서 내보냈다.

의마총 유래(출처, 다음)

영험한 의마는 주인의 뜻을 알아채고 전북 남원에서 고향 청도까지 달려왔다. 가족들은 의병장의 죽음을 알고 시신 없이 초혼장을 치렀다. 의마도 역시 먹이를 거부하고 울기만 하다가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주인을 뒤이어 따라 죽었다.

의마총(출처, 다음)

이에 같은 산 동쪽 끝자락에 묻고 '의마총'이라 새겼다. 그 이후 이해 장군의 후손들이 400년 동안 벌초를 하고 있다고 한다.

대원군 책사 박유붕 이야기

대원군 책사 박유붕

유호연지에서 청도역으로 이동 중에 택시기사님이 흥선 대원군의 책사 박유붕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코팅한 기사 스크립을 보여 주셨다. 박유붕은 1806년(순조 6) 경상도 청도 용산면 원당동(현 원정리 광대정마을)에서 아버지 박희태(朴熙泰)와 어머니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관상학에 입문하게 된 것은 처갓집 두(杜)씨 내력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명의 이여송 장군의 참모며 관상학의 대가였던 두사충(杜思忠)이 조선에 종군 왔다가 종전 후 귀화하였다. 처가 두 씨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던 비법의 풍수서와 관상서를 박유붕이 공부하여 완벽히 터득하여 소화하였다.


한양으로 올라온 그가 운현궁의 대원군 눈에 들었다. 우연히 운현궁 마당에서 제기차기를 하고 있었던 명복 도련(후에 고종)이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적중하였기 때문이다. 경운궁 근처의 수운회관 인근에 대원군이 하사한 45칸 집이 있었다고 한다. 대원군의 인사 참모역할을 하다가 며느리감으로 어린 여성(훗날 명성황후)을 보여 주자 3번이나 반대하였다고 한다. "내 며느리를 보는 것이지, 당신 며느리를 보나?" 하며 화를 냈다. 이 일로 대원군과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운현궁의 대원군과 민비황후의 첨예한 대립 갈등 이야기는 이미 말씀드렸다.(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운현궁 탐방, 2025.04.20, https://brunch.co.kr/@jylee2020/232 참조)

청도역

청도역

1905년 1월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초대 역사는 지금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목조단층 건물이었다.

청도역 신축공사 ( 2025년 11월 완공 예정)

1987년 12월 지금의 역사가 준공, 1997년 3월에는 역사 내에 민속문화관이 개관하였다. 2024년 현재는 역사 남쪽으로 신축 공사가 진행 중이다. 역사 내에는 전통생활문화관 문화관이 있다.

청도 추어탕

청도 추어탕

청도 추어탕 거리가 있다. 할머니가 식당 입구에서 정성스럽게 양파를 손질하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들어갔다. 맛있어 추천한다. 반드시 다진 고추와 산초 가루를 적당히 잘 넣고 먹어야 한다. 각 지방의 고유의 추어탕 맛이 있다. 식재료와 만드는 방법이 있어 퍼 왔다.


식재료

미꾸라지 160g, 배추 400g, 토란대 150g, 대파 35g(1 뿌리), 풋고추 30g(2개), 붉은 고추 30g(2개), 물 2L(10컵), 된장 1큰술, 마늘 10g(2쪽), 국간장, 소금, 산초가루 적량


조리방법

1. 미꾸라지에 소금을 넣고 잠시 두었다가 깨끗하게 주물러 씻고 끓는 물에 푹 삶아 체에 내린다.
2. 배추, 토란대는 7~8cm 길이로 썰고, 대파는 어슷썰기 끓는 물에 살짝 데쳐 헹군다.
3. 풋고추와 붉은 고추는 다진다.
4. 1에 된장을 체에 걸러 풀고 배추, 토란대, 대파, 다진 마늘을 넣고 국간장, 소금으로 간을 하여 한소끔 더 끓인다.
5. 추어탕을 대접에 담아 다진 고추와 산초가루를 곁들인다.

밀양시 삼랑진읍 지도

삼랑진역

삼랑진 역
삼랑진 역
삼랑진역 추모비

삼랑진역 추모비

“시설인으로서 책임을 중시하며 죽음이 다하는 순간마저 철로를 지키며 이곳에서 순직하셨다. 가정에 가장으로서 아내에게 믿음을 주고 자녀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그리운 님“


역밖의 추모비를 다시 찾았다. 마침 휘체어를 타신 마을 어르신이 있어 사연을 여쭈어 보았다.

삼랑진역의 급수탑

살아생전에 고인이 역 근처에 사셨다고 한다. 외지에서 사고를 당하셨는데, 성실하고 인사성이 많은 따뜻한 젊은이였다고 한다. 경건한 마음이 든다. 인생의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삼랑진역 이야기는 청도 처음 탐방 때 이미 올려 드렸다. (밀양 8 경과 여수 밤바다, 2025.07.09, https://brunch.co.kr/@jylee2020/243 참조)

삼랑진 역 구내 철로와 급수탑
삼랑진 역 앞 풍경(삼랑진 고등학교 가는 길)
삼랑진역 급수탑 유래
한국 철도 100년
삼랑진역 이야기

밤의 완행열차

밤 기차 여행을 좋아한다. 특히 완행열차를 더 좋아한다. 아득한 옛날, 친구가 완행열차를 타고 내게로 왔다. 오늘은 내가 그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순천역으로 출발한다.


다행히 평일이어서 좌석에 편안히 앉아 창밖을 보며 갔다. 석양에 물든 다리와 강을 건너자, 촛불을 켜 놓은 마을들이 지나갔다.

삼랑진역 구내의 야경
밤기차 창밖 풍경(1)
밤 기차 창밖 풍경(2)

<참고 자료>

-. 청도군 관광안내 지도 : 청도군청


이 글로 청도 가는 길 편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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