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락산 임영대군 묘소와 사당을 찾아서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그동안 밀린 잔여생의 마지막 숙제를 하기로 하였다. 인생 낙엽줄의 DNA 탐방 활동이었다. 동구릉(태조)은 이미 금년 8월에 다녀왔다. 의왕시(2025.10.10., 금, 비, 임영대군)와 그다음 날 여주(10.11., 토, 흐림, 세종대왕)를 탐방하였다.
의왕(義王) 유래는 과거 광주목에 속했던 의곡면(義谷面)과 왕륜면(王倫面)에서 각각 '의(義)'와 '왕(王)'자를 따서 '의왕면'이라 했다. 지금은 의왕시로 인구 158,229명 (2025년 10월 의왕 인구)의 도시로 변모했다. 과천 성남 용인 수원 화성 군포 안양시와 접해 있다.
모락산(慕落山)
모락산 북쪽으로 청계산과 관악산이, 동쪽으로 백운산과 백운호수가, 서쪽으로 시가지 너머 수리산이 보인다.
세종의 넷째 왕자인 임영대군(1420년 1월 6일, 세종 2년~1469년 1월 21일, 예종 원년)이 단종을 사사한 둘째 형 수양대군(세조)을 피해 낙향하여 매일 이 산 높은 봉우리 넓은 바위에 올라 망궐례를 올리며 한양을 그리워했다 하여 모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단종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망배(望拜)하던 바위는 사인암(斯人巖), 주변 마을은 의곡동(義谷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는 조선의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사실에 절망한 임영대군이 이 산기슭에 숨어 살며 옛 중국의 수도인 낙양을 그리워하던 산이라 하여 그리워할 모(慕)와 낙양의 낙(洛) 자를 써서 모락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전설의 주인공 임영대군의 묘소가 모락산 산자락에 있고 모락산의 상당 부분이 임영대군의 후손인 전주 이 씨의 사유지이다.
임영대군(臨瀛大君) 묘역 및 사당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비롯해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 왕자 18명, 왕녀 7명을 낳았다. 그 자식들도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했고, 세종을 도와 많은 방면에서 활약했다.
임영대군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 씨(沈氏)의 넷째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세종이 임금의 신분으로서 경복궁에서 얻은 첫 왕자로 조선 왕실사 최초로 왕자 출생에 따른 만조백관의 하례를 받았다고 한다. 조용하고 인자한 성품으로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사물을 제작하는 데 뛰어난 재능으로 총통과 화차제작에 참여하였다. 천성이 활달하고 무예와 의론(義論)에 뛰어났으며, 씀씀이가 근검하고 사람을 대하는 데 겸손하였다. (출처 : 세종대왕 신문)
1428년(세종 10) 임영대군에 봉해졌으며, 1430년 성균관에 입학했다. 세조가 정권을 잡자 세조를 보좌하면서 조정의 득실, 민간의 이해를 잘 가려 신임을 얻었다.
모락산 중턱 능안 아랫마을 뒤쪽에 세종대왕의 넷째 왕자인 임영대군 묘와 사당이 있다. 묘역은 3단으로 상단에는 봉분과 비석이 있는데 봉분은 둘레가 1,650cm, 높이가 210cm으로 대형이다. 한때 능안 마을은 효종능의 후보지였다. 임영대군 묘역이 있기에 능안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영대군 봉분
묘역 표지판에서 걸어서 언덕을 오르다 보면 2번의 긴 돌계단을 만난다. 아이들과 두 번 절을 올리고 참배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봉분 주변의 호석은 1981년에 새로 축조한 것으로 동서남북의 모서리에 대나무, 꽃, 새 등의 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분의 동쪽에는 높이 200cm, 너비 50cm의 비석이 있다.
앞면에 「조선국왕자임영대군정간공지묘(朝鮮國王子臨瀛大君貞簡公之墓)」 뒷면에는 「개국오백 삼십삼 년 알봉곤돈병월일 중건신좌(開國五百三十三年閼逢困敦病月日重建辛坐)」가 새겨져 있다. 중단에는 상석, 망주석 2개, 장명등이 있다.
원래의 상석은 없어지고 1981년 새로 만든 이 상석은 140 ×90 ×45cm의 크기이고, 비석은 너비 43cm, 높이 36cm로 중간에 문고리 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숙종 때 세웠다고 하는 장명등은 사방으로 4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하단에는 동서 양쪽에 높이 250cm의 문신 석인이 있다. 얼굴이 새겨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두 손을 모아 쥐고 있는 홀도 선명하다.
임영대군 사당
임영대군의 신주를 모신 사당은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언덕에 있다. 원래 사당의 위치는 마을에 있었으나, 지금부터 약 180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제향은 음력으로 정월 21일 낮 12시에 행하며 전국에서 많은 후손들이 참여한다고 한다. 사당은 크지는 않지만 건물의 짜임새나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춰져 있다. 2000년 4월 17일에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남도리집인데 전면에는 개방된 퇴칸이 있고 그 안쪽은 벽체로 각 칸을 막아 3실로 구분하였다. 어칸에는 주독(主櫝)을 설치하여 임영대군과 제안부부인 최 씨의 신주를 모셨으며 그 앞에 제탁과 향탁을 갖추었다. 좌우 협칸에는 제기와 제복을 보관하고 있다.
기단은 전면과 측면에 장대석을 일렬로 놓아 마감하였고 초석은 방향으로 잘 다듬은 것인데 춤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기둥은 전면만 원주이고 나머지는 모두 방주인데 흘림이 거의 없다. 어칸과 협칸 창호는 모두 군판(裙板)이 있는 띠살 4 분합인데 어칸 창호가 협칸의 것보다 약간 높이가 높다. 측면과 후면의 벽체는 모두 심벽이며 중방 아래에는 화방벽(火防壁)을 시설하였다. 가구(架構)는 1 고주 5량 형식인데 물매가 비교적 완만하다.
전퇴 고주와 후면 평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쳤는데 위로 휘어진 만곡재(彎曲材)를 써서 중대공 없이 종량 위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흩처마 형식이다. 지붕은 맞배 형식인데 측면에는 방풍판으로 막았고 용마루 위에는 회를 발라 만든 양성(兩城)을 두어 이 건물의 품격을 높이고자 하였다. 현재의 사당은 19세기 후반에 중건된 것이나 묘(墓)와 함께 건립한 신당(神堂)이 많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건축사적 중요성을 가진다고 한다.
1430년 (세종 12년)에 형 수양대군(晉平大君) 이유(李瑈, 뒷날의 세조),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무예에 능하여 1433년 3월에는 형 수양대군과 함께 경회루에서 승마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부왕 세종의 총애가 깊어 세종은 여러 번 그의 집에 거동하였다.
신기전기와 총통기, 화차 제작
문종 때 화차는 신기전기와 총통기(銃筒機) 중 하나를 화차의 수레 위에 올려놓고 사용하였다. 즉, 다연장 로켓포, 초 소형 미사일의 일종으로 대량 발사장치다.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 의하면, 신기전기의 구조는 길이 7촌 5분(229.9㎜), 너비와 두께가 각각 1촌 8분(55.2㎜)인 사각나무기둥에 지름 1촌 5분(46.0㎜)의 둥근 구멍이 뚫린 나무통[圓孔木桶] 100개를 나무상자 속에 7층으로 쌓은 것이다.
제일 아래층에는 10개를, 둘째 층부터 일곱째 층까지는 각 층마다 15개씩 쌓았는데 이 나무통의 구멍 속에 중·소신기전 100개를 꽂아 사용하였다. 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신기전기는 대략 길이 3척 7촌 5분(1,149. 4㎜)이며, 높이 1척 3촌(398. 5㎜)이다.
발사 때에는 신기전기가 실려 있는 화차수레의 발사 각도를 조절한 뒤 각 줄의 신기전 약통에 부착된 점화선을 한데 모아 불을 붙이면 동시에 15개씩 위층에서 아래층까지 차례로 100발이 발사되었다. 세계에서 제작설계도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다음 백과)
세종의 명을 받아 동생인 금성대군과 함께 총통, 화차를 제작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맏형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개량 제작하였다. 1452년 문종이 죽고 조카인 단종이 즉위하면서 황보인, 김종서 등이 황표정사를 빌미로 국정을 장악하려 할 때 크게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후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질 때 그는 둘째 형인 수양대군의 편을 들었다. 세조 반정을 지지한 사유로 임영대군은 양녕대군, 효령대군과 함께 왕실의 수장 격이 되었고 형제들인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과 달리 큰 시련을 겪지 않았다. 예종 원년인 1469년 1월 21일에 50세로 영면하였다.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유훈
임종에 즈음하여 자손들을 불러 모은 뒤 평생의 한이 된 속마음을 밝혔다.
“나는 본래 안평 형님과 금성 아우와 더불어 절의에 죽고자 하였다. 이어 힘겹게 붓을 들어 종이에 ‘조가의 예장을 받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고 쓴 뒤 이승과 이별했다. 예종도 그 뜻을 받아들였다. 가족 장례를 치르고,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묘는 원형이고. 장대석 없이 둘레석으로 둘러쌓았다. 묘역이 지금도 소탈하게 느껴진다. 유훈은 네 가지다.(출처 : 세종대왕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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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왕자, 왕손은 서로 다투지 말라.
둘, 왕손은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셋, 나의 사후에 나라의 예장과 관료의 부의를 받지 말라.
넷, 나의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
임영대군은 무예에 뛰어나고 호탕하고 여성 관련 스캔들이 있었지만, 종실(宗室)의 화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등 나라사랑과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슬하에 9남 2녀를 두었다. 그중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 구성군(龜城郡)은 훗날 영의정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나, 왕위 찬탈의 싹을 미리 예방하는 차원에서 대처한 세조의 비, 정희왕후에게 숙청당하여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임영대군 묘역 입구 전통 찻집(동양 찻집)
일대에 후손들이 살았다고 한다. 임영대군의 실재 생활했던 가옥을 재현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임영대군이 이러한 분위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차와 다과맛이 좋다. 주문하면, 죽이 나오고 다음에 차와 음료가 나온다. 빗소리와 조용한 음악과 안쪽의 기와를 얹은 울타리가 운치를 더했다.
임영대군의 후손들
임영대군 아들 구성군 이준의 등장과 몰락
조선시대 과거 등과자(문과)는 총 15,151명이었다. 그중에 전주 이 씨 등과자 870명 중, 임영대군 후손 등과자가 128명이었다고 한다. (근거,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구성군 이준(龜城君 李浚, 1441~1479)은 세종대왕의 4남인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이다. 할아버지가 세종대왕, 큰아버지는 세조, 아버지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이자 대군인 임영대군이다. 세조 찬탈 이후 원로 공신이나 외척 세력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를 두려워한 세조는 종친 세력을 의도적으로 키웠다. 그 핵심 인물이 이준과 남이 장군이었다. 구성군 이준은 1441년 1월 20일 세종의 손자이자 임영대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조의 후광과 출중한 능력으로 승승장구했다. 1466년 세조 때 등준시 무과 급제로 경재(卿宰, 임금을 돕고 관원을 지휘 감독하는 2품)의 직에 선발됐다. 이어 도총관(정 2품 무관직)이 되었고, 바로 1467년 총사령관이 되어 이시애의 난을 진압했다. 27세에 병조판서가 됐고 1468년 9월 예종이 즉위하자 28세에 조선을 통 털어 최연소 영의정이 됐다.
예종과 이준은 태종의 손자이자 한백륜의 사위였다. 1469년 1월 아버지 임영대군이 죽고,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470(성종 1)년 성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노린다고 하여 정인지 등의 모함과 탄핵으로 경상도 영해로 귀양을 갔다. 구성군 이준이 왕위를 노린다는 말의 출처와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최세호와 권맹희는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성종은 구성군과 가족을 살폈으며 구성군은 1479년 1월 39세에 유배지에서 졸했다.
1470년(성종 1) 정월 나이 어린 성종(13세)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鄭麟趾) 등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하고 경상도 영해(寧海)로 귀양 갔다. 정희왕후와 권신들이 이미 경험한 왕위 찬탈을 근원을 제거하기 위하여 미리 계책을 마련 시행했다. 왕족이므로 배려를 받아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았으며 곡식을 지급받았다. 귀양 간 지 10년 만에 배소에서 죽었다.
성종은 미두(米豆) 10석, 종이 40권을 하사하고 장례를 영해 현지에서 정중히 치르도록 하였다. 1687년(숙종 13) 6월 김수항(金壽恒)이 구성군이 죄를 입은 것은 권맹희(權孟禧) 등의 난언(亂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신원되고 다시 복관 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왕족에 의한 왕위 찬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후 종친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하였다. 한동안 지켜졌다.
남이 장군
또한 동시대의 출중한 인물이었던 남이 장군은 태종의 4녀 정선공주의 아들이다. 훈신 권람의 사위인 그는 27세에 구성군 이준이 맡고 있던 병조 판서 직에 구성군 이준을 뒤를 이어 올랐다. 구성군과 함께 활약이 컸으나 남이는 호탕한 기질을 숨기지 못했다. 한 번은 세조에게 “구성군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신은 그르게 여깁니다”라고 하자 세조가 못마땅 해 하며 “지친이고 큰 공이 있으니 어찌 사랑하지 않겠느냐”라고 답했다고 한다.
구공신들도 남이를 경계했다. 예종은 즉위 당일 남이를 병조판서(정 2품)에서 겸사복장(종 2품의 궁궐수비)으로 좌천시켰다. 그런 찰나에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남이는 잡혀갔고 가혹한 고문에 못 견디어 혐의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그의 시중 한 글자를 유자광이 왜곡한 결과다. 즉, 평(平, 평평할 평)를 득(得, 얻을 득)으로 바꾸어 간언하여 왕 세조를 진노하게 하였다. (男兒二十 未平國 ; 남아로 태어나 이십 대에 나라를 평화롭게 하지 못하면)
그리고 공모자인 강순 등과 함께 거열형(사지를 당겨서 찢어 죽임)에 처해졌다. 힘없는 예종이었고 세조의 종친세력들은 그렇게 하나씩 제거되었다. 예종의 종친세력은 힘을 잃고 점점 무력해졌다. (출처 : 천지일보,
https://www.newscj.com)
이암李巖(1499~?)
본관은 전주. 자는 정중(靜仲). 세종의 셋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증손이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영모화가(翎毛畵家)인 그는 기록에 의하면 매그림에도 능했다. 현존하는 유작들은 개와 고양이를 소재로 한 것이다. 먹의 음영(陰影) 처리를 통해 표현했으며, 강아지·고양이들과의 배경이 조화를 이루면서 자아내는 평화스럽고 순진무구한 분위기는 독특한 화풍이다.
이정(李霆, 1554~1626)
조선 중기에 묵죽화로 가장 뛰어났던 인물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이다.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후손이다. 명나라의 묵죽화풍을 소화한 뒤 조선의 미감을 반영, 조선 묵죽화의 전형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 중 오만 원권 지폐 뒷면에 그의 ‘풍죽도(風竹圖)’가 인쇄되어 있다. 바람에 활처럼 휘면서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의 탄성과 절개가 돋보인다.
의왕 주변 이모저모
삼남길
의왕에는 삼남길(전체 구간 약 392km)의 일부(약 13.6km)가 있다. 조선시대 6대 옛길(삼남길, 영남길, 평해길, 경흥길, 의주길, 강화길) 중 1길이다.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한양과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도)을 이어 걸어 다녔던 1,000리 달하는 옛길이다. 조선시대 육로 교통의 중심축으로 삼남지방의 풍부한 물산과 문화와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오갔다. 또한 이순신 장군께서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던 길이다. 정도전, 정약용 등의 개혁관료들이 유배길이었으며,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격전지 길이었다.
오매기 마을을 지나 의왕 시가지 쪽으로 길을 잡으면 정조임금 능행차길의 중요한 지점인 사근행궁터(現 고천동 주민센터)를 지나 골사그내로 갈 수 있다. 골사그내에서 지지대비가 있는 지지대고개를 넘으면 삼남길은 수원에 접어들게 된다.
삼남길 전체구간(약 392㎞) : 한양∼숭례문∼과천∼의왕∼수원∼화성∼평택∼천안∼공주∼정읍∼장성∼광주∼나주∼해남(약 392㎞)
삼남길 “의왕” 구간(약 13.6㎞) : 백운호수∼임영대군묘역 및 사당∼오매기마을~사근행궁터(고천동 주민센터)∼골사그내∼지지대비
청계사
청계산 중턱에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가 1284년(고려 충렬왕 10) 시중 조인규에 의해 중건되었다. 사찰 내에는 1689년(숙종 15)에 세운 청계사 사적기비(경기도 유형문화유산)가 있다.
조선 후기의 건물인 극락보전이 있다. 극락보전 중앙에는 주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이 있다. 그리고 삼성각, 영산전, 지장전, 동종 보호각, 감로수각 등이 있다.
청계사 우담바라
청계사에서는 최근 2000년 10월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 가운데 관음보살상의 상호 왼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 꽃이 피어 세간에 큰 화제가 되었다. 우담바라는 경전에 따르면 여래나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 나타나며 3,000년 만에 한번 핀다는 전설 속의 꽃이며, 영서화(榮瑞花)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계사의 이 우담바라는 높이 1cm의 작은 크기로 모두 21송이가 피었다.
오매기마을
오매기마을은 용머리, 목배미, 사나골, 가운데말, 뒷골, 백운동 등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오막동' 또는 '오마동'이라 했다고 한다. '오매기'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유래가 내려온다. 먼저, 문화 류 씨를 비롯하여 진 씨, 노 씨, 마 씨, 문 씨 등 5개 성씨가 각각 막을 지어 전부 5막(五幕)이어서 오매기라는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마을의 산세가 5마리의 말이 각기 기수를 태우고 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오매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근행궁(肆覲行宮)터
정조가 현륭원으로 능행차를 떠날 때 과천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다음날 점심 나절에 이곳 사근행궁에 도착하여 쉬어 갔다. 일제강점기에 면사무소로 활용되었고, 의왕 지역의 3·1 운동의 중심지였다.
1760년(영조 34)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이곳에서 쉬어간 일이 있었다.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에서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였다. 1789년(정조 13) 10월 6일 상여가 이곳에 이르자 마중한 이곳 노인들에게 경기감사로 하여금 쌀을 나누어 주게 하고 행궁을 지었다.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이곳에 들렀는데 특히 1795년(정조 19) 2월 10일과 15일에는 어머니 혜경궁홍 씨와 함께 수라(식사)를 들었다. 효행을 몸소 실천한 정조의 거룩한 효행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백운회에서 기념비를 세웠으며 시에서는 이 날을 시민의 날로 제정하였다.
모락산성(한성백제기, 의왕시 내손동)
모락산성은 해발 385m 모락산(慕洛山) 정상에 축조된 한성백제 시대의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평면은 오각형에 가까운 부정형을 띠고 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878m이며, 북동 남벽은 비교적 직선을 이루지만, 서벽은 능선과 계곡부를 연결하면서 자연적 지형이다. 북측성벽에서 오각형 회색연질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채집된 토기는 대다수가 경질토기로 단지나 큰독이 다수를 차지하며, 식용 식수를 보관하는 저장용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역할은 한성백제 시기 남쪽에서의 마한의 침입에 대비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했다. 수도방위 역할을 담당했던 풍납토성의 배후 거점성이었다. 모락산성은 2007년 9월 17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백운호수
1953년 준공된 11만 평 넓이의 인공 호수다.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조성되었지만 주변의 경관이 수려하고 각종 주차시설과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라이브 카페와 전문식당가에서 다양한 음식과 음악을 즐길 수 있다. 호수 순환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 있다. 특히, 롯데 프리미엄 아웃렛이 호수옆에 있어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았다.
의왕 프리미엄 아웃렛
원형 돔의 지붕 구조가 독특하다. 매장 내 공간비치가 시원하게 설계되어 있다. 활기차다. 제일 위층에는 애완견 동반가능한 카페에서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돔 밖의 넓은 공간에는 북유럽풍의 세모지붕의 매장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수원 가보정 식당
당초 수원 화성 성곽을 둘러볼 예정이었지만, 비가 계속 와서 가보정이란 식당에서 마무리했다. 인터넷 혹은 현장 예약을 하고, 줄을 서서 1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동일 상호로 4거리의 3 모퉁이에 건물이 성업 중이다. 맛도 일품, 서비스도 일품이다.
<참고 자료>
-. 의왕시 홈페이지 : 의왕시
-. 의왕시 문화 관광 홈페이지 : 역사문화탐방로(삼남길) | 의왕시 문화관광사이트
-. 세종대왕 신문 :
https://www.sejongki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3
-. 지역 N문화
-. 다음 사전
-. 세종이 고통스러울 때 찾았던 왕자, 임영대군 : https://youtu.be/VoPoZqfXhQ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