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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세종대왕릉, 영릉(英陵)을 찾아서

여주 세종대왕릉 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 영릉(寧陵) 탐방

by 애바다
여주시 여행 지도

여주 여행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그동안 밀린 숙제를 하기로 하였다. DNA 탐방 활동이었다. 동구릉(태조, 2025, 08. 15) , 의왕시(임영대군, 2025.10.10.)를 탐방하였다. 금회는 여주시(10.11., 토, 흐림, 세종대왕 영릉) 차례다.

여강길 문화생태 탐방로
세종대왕 상

여주(이중환 택리지)

이중환 선생택리지에 여주를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어(野平山遠),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합해서, 일찍부터 낙토(樂土)라 칭송되어 왔던 곳이다. 여강(驪江, 남한강)의 경치가 빼어나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문화의 고장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여주시 (驪州市)

여주는 예로부터 깨끗한 물과 비옥한 땅에서 나오는 쌀과 고구마 땅콩이 유명하다. 특히 세종대왕표 쌀이 일품이다. 경기도 동남부에 이천시 광주시 양평군, 원주시, 충주시, 음성군과 접해 있다. (면적 608.6㎢, 인구 114,134명, 2025.9). 2013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남한강 연안에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다. 흔암리의 선사주거지를 비롯해 역사 유물이 많다. 신륵사 주변으로 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탐방 순서

(파사성과 주어사지 성지 순례도 계획했었지만, 시간 거리 관계상 다음 기회에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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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역
경강선 노선도 (판교~세종대왕릉역, 여주역)

판교역

성남 판교역에서 경강선 여주행 전철을 타고 이동하였다. 판교는 상전벽해다. 과거 농촌 지역에서 대한민국의 최첨단 기지로 초 스피드 변신하였다. 갈 때마다 전철역 입구 찾는 일이 큰 일이다. 매번 헷갈린다.

세종대왕릉 역
세종대왕릉 역 이야기

세종대왕릉 역

경강선 전철을 타고 농촌 풍경을 즐기며 세종대왕릉 역에 도착하자, 한글 창제 관련 자료가 벽면 계단을 장식하고 있었다.

세종대왕 어진
훈민정음 (세종대왕릉 역)
훈민정음 서문(세종대왕릉 역)
훈민정음 초성해(세종대왕릉 역)

여주 슬로우 시티의 속도와 규칙에 잘 적응해야 한다. 시차 적응에 준하는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 한다. 특히 가끔씩 오는 시내버스의 시간표를 매의 눈으로 유심히 잘 봐야 한다.

세종대왕릉 역 앞 버스 정류장

세종대왕릉 역 밖으로 나오자, 어떤 노령의 친목단체 회원들의 오래간만에 만나는 안부 인사로 시끌 버끌 하다. 누구는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둥, 화장실 사용이 불편하다는 둥, 건강이 주요 화제였다.

버스 운행 시간표 모음집
세종대왕릉 역 경유 버스 노선안내도

운 좋게도 세종대왕릉 가는 버스를 바로 탔는데,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서 ‘세종대왕~“라는 안내가 있어 급히 내렸다. 정류장의 안내 표지판에 ’ 세종대왕면’이라고 적혀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그 버스를 즉시 필사적으로 바로 다시 탔다. '세종대왕릉'으로 잘못 알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다음 버스는 기약이 없을 거란 생각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릉(英陵, 세종대왕 릉)과 영릉(寧陵, 효종대왕릉) 내부 안내도
영릉 방향 위치 표시 안내

영릉(英陵, 세종과 소헌왕후) 주차장

세종대왕릉 표지석
세종대왕 영릉 주차장


몇 년 전에 방문하였었는데, 그때는 영릉 주변 공사를 대대적으로 하는 관계로 출입이 허용되지 않아, 구경을 못하고 주차장에서 바로 발길을 돌렸던 일이 있었다.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연결된, 바로 옆의 세종대왕역사문화관으로 입장했다. 지도와 팸플릿등 자료를 수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차장옆에 사적 제195호인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대왕의 영릉(寧陵) 올라가는 출입구에 있다. 3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 영상실, 카페, 수장고 등이 있다.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제1실 (세종대왕 관련 자료실)

세종대왕과 효종대왕 그리고 조선왕릉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훌륭한 업적들과 애민정신을 느껴볼 수 있다.

세종대왕 가계도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

세종(1397~1450, 54세 졸, 조선 4대 왕/ 재위 기간 1418~1450, 32년)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4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재위 32년간 정치 사회 경제 등에 눈부신 업적으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세종 어제 훈민정음
훈민정음

특히 한글 창제는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혼천의
앙부일구 (해시계)
휴대용 해시계

앙부일구, 혼천의, 자격루

백성을 위하여 천문 관측기구인 혼천의, 시간 측정하는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측우기를 만들었다.

측우기

휴대용 해시계가 압권이다.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한글

1443년 10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당시에 간행했던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등 서책을 전시하고 있다.

편경

편경

아악을 정리하고, 선왕들의 업적을 기리는 정대업 보태평 등 신악을 작곡하였다. 편경등을 볼 수 있다.

조선 왕릉 세계 유산 인증 기념석

세계 유산 조선 왕릉

총 42기의 왕릉 중, 남한에 있는 40기가 2009년 6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왕릉 조성과정을 영상을 통하여 설명들을 수 있다. 특히 왕의 서거 이후 전 과정을 자세히 시청할 수 있다.

효종의 묘호 능호
효종의 일대기
효종의 가계도
효종의 효제와 자애

북벌의 기상 효종대왕

효종(1619~1659년, 41세 승하, 조선 17대 왕 재위 1649~1659)

인조와 인열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1645년 형인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봉림대군 봉해져 왕세자가 되었다. 호란의 피폐 복구에 힘을 쏟고 군제 개편으로 군사력 강화에 주력했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널리 쓰이게 하였다. 북벌과 나선정벌등 영상을 볼 수 있다.

효종의 북벌

북벌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볼모로 끌려가 8년 생활을 하였다. 송시열의 기해독대에서, 정예화된 포병 10만으로 북벌을 계획하였다. 안타깝게도 41세에 급서 하여 미완으로 남았다.


하멜 표류기

1653년 8월 네덜란드인 하멜이 폭풍우로 제주도에 표류했다. 조선 체제(1653.08.15.~1666.09.04., 13년, 28일) 후 본국으로 되돌아가 조선에서의 생활 기록(지리, 풍토, 산물, 군사, 교육, 무역등)을 남겼다. 조선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국장도감의궤

국장도감의궤

후세를 위하여 큰일을 치르고 나서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기록으로 남겼다. 입체적 영상을 볼 수 있다.

효종이 딸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

특히, 딸인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는 마음을 울린다.


세종대왕과 효종대왕의 민본주의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세종대왕과 효종대왕의 민본주의
세종대왕 영릉(英陵)

세종대왕 영릉(英陵)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의 능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의 합장릉이다.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세종, 오른쪽에 소헌왕후를 모셨다. 능침 배치는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랐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병풍석이 생략되자 병풍석에 새기는 십이지신상은 난간석에 문자로 새겼다.

내부 방은 석실(돌방) 대신 회격(灰隔, 석회와 가는 모래, 황토를 섞은 혼합 물질)으로 만들었고, 석상(혼유석)은 2개를 배치하였다.

도래솔길 안내판 (세종대왕 영릉을 최대한 근접하여 참배 가능, 붉은색 선 따라 이동)
세종대왕릉 지근거리에서 촬영
세종대왕릉에서 정자각 방향 촬영

세종의 백성 마음을 헤아리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즉, ’ 세종대왕릉 가는 길(도래솔길)’따라 올라 가면 영능을 직접보고 참배를 할 수 있다. 마침 고맙게도 어떤 가족의 청년(아들로 추정)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당연, 답례로 가족사진을 찍어드렸다.


원래 영릉은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헌릉과 인릉 경내 인릉 자리에 조성되었고, 4년 뒤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영릉에 합장하였다. 그러나 영릉이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세조 대부터 영릉을 옮기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1469년(예종 1)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기면서 옛 영릉에 있던 능침 석물과 신도비는 땅에 묻었고, 여주로 옮기면서 능침의 석물은 다시 만들었다. (출처, 세종대왕 유적 관리소)


금천교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다음 모든 건물의 순서는 대동소이하다. 모든 조선 왕릉의 부속물의 배치는 표준화 규범화 되어 있다.

세종대왕 릉의 홍살문 / 향로. 어로 / 판위

홍살문 / 판위

세종대왕릉의 향로(좌측, 통행 삼가) / 어로(참배객 통행 가능)

향로 / 어로

세종대왕릉의 수라간(좌) / 정자각(중)/ 수복방(우측)

수라간 / 수복방

세종대왕릉의 정자각

세종대왕릉의 정자각

세종대왕릉 비각
세종대왕릉 비

비각


세종(世宗) 이야기

세종(재세 : 1397년 음력 4월 10일 ~ 1450년 음력 2월 17일, 재위 : 1418년 음력 8월 11일 ~ 1450년 음력 2월 17일)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 씨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6) 준수방 본궁에서 태어났다.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졌고, 1412년(태종 12)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 큰형 양녕대군이 왕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두 달 뒤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즉위 후 이듬해 집현전을 설치하여 많은 학자들을 등용하였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각별한 관계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어느 날 세종이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내시로 하여금 누가 밤늦도록 집현전에서 책을 읽고 있는지 보고 오라 명하였다. 이에 내시는 신숙주가 홀로 독서하고 있다 아뢰었다. 세종은 그 말을 듣고 친히 집현전에 나가 그 광경을 살폈으나, 신숙주는 세종이 온 것을 모르고 계속 독서에 열중하였다. 세종은 새벽이 되도록 밖에서 글 읽는 소리를 경청하다 신숙주가 고단하여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추운 날씨에 독서에 열중한 신하에게 자신의 어의를 벗어 덮어주고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깨어난 신숙주가 자신의 등에 씌워진 어의를 보고서야 전날 밤 왕이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감복하여 왕의 침전을 향해 절을 하였으며 더욱더 학문연구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재위기간 동안 혼천의(渾天儀)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출처 : 홈페이지)

4군 6진 개척
최윤덕 장군 활약도
두만강 회령 야인 굴복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으며 4군 6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국경을 확장하였다.

금속활자 제작

또 여러 활자를 제조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고, 국가의례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에는 우리나라 고유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창제하는 등 정치·경제·문화·과학·군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후 1450년 영응대군 사저인 동별궁에서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헌왕후(昭憲王后) 이야기

소헌왕후 심 씨(재세 : 1395년 음력 9월 28일 ~ 1446년 음력 3월 24일)는 본관이 청송인 청천부원군 심온과 삼한국대부인 안 씨의 딸로 1395년(태조 4)에 태어났다. 1408년(태종 8) 당시 충녕군이었던 세종과 혼인하여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고, 1417년(태종 17) 삼한국대부인이 되었다가 1년 뒤에 세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경빈)에 되었다. 같은 해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공비(恭妃)가 되었고, 1432년(세종 14)에 왕비가 되었다.

세종대왕 생애

소헌왕후는 세종 즉위 초 태종의 외척세력 견제로 인해 친정이 화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 심온과 작은아버지 심정이 죽었다. 이때 소헌왕후 본인도 폐위될 뻔하였으나 세종의 보호로 무사하였다.

세종과의 사이에서 8남(문종·세조·안평·임영·광평·금성·평원·영응대군) 2녀(정소·정의공주)를 낳았으며, 1446년(세종 28)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의 사저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매우 슬퍼하며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부처님과 그 가족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보』, 『법화경』 등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한글로 옮겨 『석보상절』을 편찬하였다. 이를 받아본 세종은 직접 『석보상절』의 내용을 한글 노랫말로 옮겨 악장체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다.

세종대왕 영릉 재실
세종대왕 영릉 재실
세종대왕 영릉 재실 상설도해설
세종대왕 영릉 재실
세종대왕 영릉 재실 내부
세종대왕 영릉 재실 내부 (복식)
제수진설도 / 제기류 / 기신제

세종대왕릉 재실

세종대왕 (구) 재실 (작은 책방)
세종대왕릉 (구) 재실 (작은 책방)

세종대왕릉 (구) 재실

작은 책방을 꾸며 세종대왕 관련 책을 방 안에서 앉아서 읽을 수 있다.

세종대왕릉 위토답

세종대왕릉 위토답

위토답이라는 토지에서 생산되는 곡식으로 제사와 릉 관리를 위하여 발생하는 비용 등을 충당한다.

세종대왕릉 연지

세종대왕릉 연지

능 입구에 조성된 연못이다. 붕어등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왕의 숲길

세종대왕릉 홍살문 밖 우측 언덕에서 효종릉으로 넘어가는 약간 오르막길이 있다. 왕의 숲길이다. 끝에 효종릉의 홍살문이 나온다.

효종의 영릉(寧陵) 홍살문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

효종의 영릉(寧陵)

효종 영릉(寧陵) 이야기

조선 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 씨의 능이다.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최초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다.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위에 위치한 봉분이 효종의 능이고, 아래 봉분이 인선왕후의 능이다. 조성 이유는 쌍릉의 형태처럼 봉분을 나란히 조성할 경우, 풍수지리상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이 벗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 구리 동구릉 내 원릉(영조와 정순왕후) 자리에 조성되었다. 조성 직후부터 능침 석물에 문제가 생겨 보수가 계속되자 능 안에 빗물의 피해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1673년(현종 14)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능을 옮길 때 방을 열어보니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두 능의 봉분은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에 십이지신을 문자로 새겼다. 효종의 능침과 인선왕후 능침 석물은 각각 조성되었으나 곡장은 효종의 능침에만 둘렀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표석이 있는데, 조선왕릉 중 최초로 세운 표석이다. 조선 전기 세종의 옛 영릉까지는 신도비를 세웠으나 문종의 현릉을 조성할 때 신도비를 없애었다.


이후 효종의 영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표석을 세울 필요성이 논의되어 1682년(숙종 8)에 세웠다. 영릉 입구에 있는 재실은 제향을 준비하는 건물로 현재 조선왕릉의 재실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다.


효종(孝宗) 이야기

효종(재세 : 1619년 음력 5월 22일 ~ 1659년 음력 5월 4일, 재위 : 1649년 음력 5월 13일 ~ 1659년 음력 5월 4일)은 인조와 인열왕후 한 씨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경행방 어의궁에서 태어났다. 1623년 아버지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1626년(인조 4)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형 소현세자와 부인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형 소현세자와 다르게 효종은 볼모생활을 하면서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효종은 1645년(인조 23) 형 소현세자가 먼저 귀국 후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자 바로 귀국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아버지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두 차례의 호란(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청나라를 향한 북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세력이 강해져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1654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청나라와 러시아의 전쟁(나선정벌)에 출정하였다. 이후 1659년(효종 10) 창덕궁 대조전에서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선왕후(仁宣王后) 이야기

인선왕후 장 씨(재세 : 1618년 음력 12월 25일 ~ 1674년 음력 2월 24일)는 본관이 덕수인 신풍부원군 장유와 영가부부인 김 씨의 딸로 1618년(광해군 10)에 경기도 안산군(현 시흥시)에서 태어났다. 1631년(인조 9) 당시 봉림대군이었던 효종과 혼인하여 풍안부부인(豐安府夫人)이 되었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의 결과로 남편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1645년(인조 23) 남편 효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효종과의 사이에서 1남(현종) 6녀(숙신·숙안·숙명·숙휘·숙정·숙경공주)를 낳았으며, 1659년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가 되었다. 이후 1674년(현종 15) 경덕궁(현 경희궁) 회상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홈페이지)


효종릉 홍살문 / 판위

효종 영릉(寧陵)의 금천교

효종릉 금천교

효종 영릉의 금천교는 특이하게도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있다.

효종의 영릉 향로 / 어로

효종 영릉의 향로 / 어로

효종 영릉의 수라간
효종 영릉의 수복방

효종릉 수라간 / 수복방

효종 영릉의 정자각

효종 영릉의 정자각

효종 영릉 비각
효종 영릉 비

효종 영릉 비각

효종 영릉 제실
효종 영릉 재실

여주 효종 영릉재실(驪州 孝宗 寧陵齋室)

재실은 왕릉을 관리하는 관리자(종 9품 참봉이나 종 5품 영)들이 지내며 업무를 보는 곳이자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영릉 재실은 효종 영릉이 현 동구릉 경내 영조의 원릉 자리에 조성될 당시에 지었던 건물로, 1673년(현종 14) 영릉을 여주로 옮길 때 같이 옮겨온 것이다. 조선왕릉의 재실 중 안향청, 제기고, 행랑 등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재실의 기본형태가 잘 남아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孝宗大王陵(寧陵) 淮陽木)

회양목은 회양목과의 나무로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효종 영릉 회양목은 키가 크고, 다른 회양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나무이다. 이 회양목은 1673년(현종 14) 현 구리 동구릉 내에 있던 효종의 영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함께 옮겨져 재실에서 300여 년 동안 자란 나무로, 2005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제수진설도 / 제기 / 기신제
제실 제기

효종릉의 연지


세종대왕릉 주차장

세종대왕릉 주차장

세종대왕릉과 효종릉 참배를 마치고 세종대왕릉 주차장으로 약 20분 정도 걸었다. 주차장 밖 대로변 버스 정류장에서 시청 가는 버스를 탔다. 여주 한글시장 앞에서 내렸다.

여주 한글시장

<참고 자료>

-. 여주 영릉과 영릉 팸플릿 및 홈페이지 : 세종대왕 유적관리소

-.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팸플릿 및 홈페이지 : 세종대왕 유적관리소

-. 다음 사전


글이 길어져, 한글시장&세종시장, 여주 박물관, 여주 신륵사, 여주 명성황후 생가 이야기는 다음 회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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