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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한글시장, 세종시장과 여주 박물관 탐방

여주 한글 시장 &세종 시장,평화의소녀,여주 박물관, 출렁다리와 황포돛배

by 애바다


여주 여행 지도

여주 예찬

이중환 선생택리지에서 "여주는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어(野平山遠),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합해서, 일찍부터 낙토(樂土)라 칭송되어 왔던 곳이다. 여강(驪江, 남한강)의 경치가 빼어나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문화의 고장이다."라고 극찬하였다.


흔암리 선사유적지, 신륵사, 고달사지,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명성황후 생가 등 수많은 문화유적은 여주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여강길 문화 생태 탐방로 (11 코스)
여주목 지도 (1872년)

탐방 순서

(2025. 10.11., 토, 흐림, 금회 글 굵은 글씨)

경기 성남 판교역> 여주 세종대왕릉 역> 세종대왕릉 및 효종대왕릉> 한글시장&세종시장> 여주 박물관> 여주 신륵사& 여주 명성황후 생가

여주 한글 시장

여주 한글 & 세종 시장

세종대왕릉 앞에서 버스를 타고 여주 시청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여주 평화의 소녀상이 한글시장 입구에 세워져 있다. 한글시장과 세종시장은 동서로 약 200m 정도 길게 연결되어 있다. 아마추어 버스킹팀들이 중간중간 공터에서 공연을 하면 멋있을 것 같다. 역사적인 사건, 관련 인물이 있으면, 거리든 어디든 안내간판 혹은 표지석을 많이 설치하여 안내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예를 들면, OO 발상지, OO 전투지, OO 회의장, OO 전설 등등이다.

여주 한글시장(1 구역)
여주 한글시장 (3 구역)

젊은이들 몇몇은 시장 길바닥 위에 주저앉아서 의자에 앉은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자연스럽다. 특히 외국 젊은이들이 많이 보여 국제화 시대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곳곳에 한글 초성이 세워져 있고, 세종대왕의 위상을 체험할 수 있다. 한글 시장 & 세종 시장은 500년 역사를 잇고 있다. 조포나루와 가깝다.

여주 한글 시장(4 구역)

조선시대 4대 나루는 마포나루, 광나루, 이포 나루 그리고 조포나루였다. 이 가운데 이포나루(양평 가는 여주 북쪽 금사면에 위치)와 조포 나루(신륵사 앞 위치)가 여주에 있었다. 이포와 조포 나루를 통해 여주 자채쌀과 남한강의 민물고기등 특산품이 한양으로 들어갔다. 조선 초기부터 개설되었다. 개장일은 매월 5,0 들어간 날이다.

세종시장 입구

여행지에서 반드시 가 보아야 하는 곳이 그 지방의 특화된 시장이다. 생생하고 활기찬 모습에서 좋은 기운을 얻는다. 아쉽게도 정규 개장일이 아니어서 손님들이 뜸했다. 그래도 가게 문을 열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젊은이 부부가 운영하는 분식점에서 일부러 제일 비싼 메뉴(볶음밥)를 주문했다. 손님이 별로 없어 매출액이 걱정이 되었다.

여주 평화의 소녀상

여주 평화의 소녀상

한글 시장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16살 어린 소녀상이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녀 할머니(1926년 2월 10일~ 2013년 8월 13일, 87세 영면)는 여주에서 태어나셨다. 열여섯 살인 1941년 강제 연행돼 싱가포르와 미얀마 등지에서 고초를 겪으시다가 해방 후 랑군수용소를 거쳐 1946년 부산항으로 귀국하셨다.

2000년 12월 일본 도쿄 구단회관에서 열렸던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법 국제법정’과 2000년 9월 워싱턴 D.C 연방지방법원에 위안부 관련 소송 원고로 참석하는 등 일본의 전쟁 범죄 고발과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투쟁을 줄기차게 벌이셨다. 가로 200cm, 세로 130cm, 높이 220cm의 청동 소녀상과 화강암 받침대와 배경석으로 세웠다. 소녀상 오른손에 놓인 작은 새는 평화와 희망을 상징한다. (출처 : 경도 신문)

여주 박물관(여마관)

여주박물관

여주 한글시장과 세종시장을 둘러보고, 버스를 타고 신륵사 4거리에서 내렸다. 여주박물관과 여주 신륵사 탐방에 나섰다. 박물관 카페에서 여강물을 가르며 달리는 황포돛배를 감상할 수 있다. 중간에 영월루로 출렁다리를 통해 넘어갈 수 있다. 추석맞이 노래자랑등 신나는 행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여주 박물관(황마관)

여주 박물관은 구관(황마관)과 신관(여마관)으로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월루
영월루 / 여주 마암

영월루 앞 마암(馬巖)에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여주 여흥 민 씨 시조 탄생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 여주 지명을 황마와 여마의 첫 글자를 따서 황려라고 불렀다. 즉 여주의 지명은 골내근면-황효-황려-여흥-여주로 변천되었다. 영월루와 여주 박물관/신륵사 사이로 여강(驪江)이 흐른다.

여주박물관 여마관 입구(1층)

1977년 '여주군향토사료관'으로 문을 열었다. 2010년 '여주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16년 7월 14일 여마관(신관)을 건립하였다.


여주의 맥, 여강

선사 고대 고려 조선 시대와 유물, 인물, 사건들을 결합한 그래프에서 여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여주의 맥, 여강 (선사 시대~고려)
여주의 선사유적 분포
여주의 선사시대와 구석기 유적 (흔암리, 연양리)

삼국 시대 여주

삼국의 치열전이 있었다. 백제 영역에서 고구려 영토로 바뀌고, 6세기 중반 이후부터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삼국 시대의 여주

군사적 요충지 파사성

파사산 정상부에 석축 산성을 쌓았다. 교통의 요지며 멀리까지 주변을 관찰할 수 있다. 전설에는 신라 파사왕이 축성했다고 한다. 조선 영의정 유성룡의 발의로 성을 보강하였다고 한다.

파사성(군사 요충지)과 매룡리 고분군
파사성과 남한강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매룡리 고분군 / 파사성)

중암리 고려백자 가마터

여주 천년 도자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좌선을 중시하는 선종의 차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중암리 가마터(고려 백자의 시작)
고려 시대의 여주

신륵사

여주는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답워 낙토라고 하였는데, 그 중심에 신륵사가 있다. 사찰명은 인당대사 혹은 왕사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여강을 수호한 신륵사

원향사와 고달사

원향사라는 명문이 출토되어 사찰명을 확인했다. 고달사는 고려 3대 선종 사찰의 하나였다. 박물관 1층 입구에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가 누워 있다.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보관해 오던 것을 여주 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고려 초의 원향사
고달사 발굴 유물
고달사지 터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실물, 여주박물관 1층 입구 보관)

여주역사실

여주는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어(野平山遠) 낙토(樂土)다. 여강(驪江, 남한강)의 경치와 시인묵객의 고장이다.

조선 근대 현대의 여주 (조선, 근대, 현대)



여주 역사실

여강미회(驪江迷懷)

목은 이색(1328~1396), 여강에서 마음이 심란하여


天地無涯生有涯 浩然歸志欲何之

천지무애생유애 호연귀지욕하지

천지는 무궁하나 인생은 끝이 있으니 초연히 돌아갈 뜻 그 어디로 가야 하나


驪江一曲山如畵 半似丹靑半似詩

여강일곡산여화 반사단청반사시

여강 한 구비에 산은 그림 같은데 절반은 단청 같고 절반은 시와 같다네

목은 이색의 여강미회

원향사지 청동 소종

27.5cm의 작은 청동 종이다.

원향사지 청동소종

은병, 은잔

고종이 안동 김 씨 세력가 김좌근에게 하사한 물품이다.

은병, 은잔

13도 의병 총대장 이인영

전국 연합 의병진의 서울 공격을 지휘하였다.

13도 의병 총대장 이인영

흔암리 선사유적지, 신륵사, 고달사지,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명성황후 생가 등 수많은 문화유적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들에서 보관하던 주요 유적 출토 국가귀속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여주의 인물 ( 원호장군, 이인영, 길수익, 이민용)
여주의 명문 가문 복장
여주의 명문 가문(금사면의 남양 홍 씨, 모래실 해평 윤 씨, 여흥 민 씨)
묵향의 여주

남한강 수석전시실

김정식 선생이 57년간 모은 수석을 기증받아 전시한 곳이다. 산수경석 · 물형석 · 추상석 · 12 지석 등 수석의 멋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갖가지 수석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류주현 문학전시실

류주현 문학전시실

한국의 대하 역사소설을 개척하신 여주 출신의 묵사 류주현 선생의 삶과 작품 설명 공간이다. 작품으로는 조선총독부, 대원군 등이 있다.


명당 선정과 왕릉 조성 과정 (세종대왕, 효종대왕)

세종 영릉(英陵)과 효종 영릉(寧陵) 두 기의 조선 왕릉이 여주로 천릉하였다.

신의 정원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명당 선정
왕릉 조성
비 탁본
후대 왕들(숙종, 정조)의 왕릉 제사 장면

왕비의 고장 여주

여주는 역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고려와 조선을 통 털어 총 11명의 왕비와 빈을 배출하였다.

여주, 왕비(인현왕후, 순원왕후, 명성 황후 등)의 고장
조선 왕비의 삶

여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여주

목은 이색 시조비

목은 이색 시조비

고려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의 시조비이다. 시조비는 황포돛배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돛의 앞면에는 이색이 지은 시조를 쓰고, 뒷면에는 청자(靑磁) 자판(磁板)에다 이색의 생애를 약술(略述)하였다.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였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하노라

백운 이규보 문학비

고려 백운(白雲) 이규보(1168~1241)를 기념하기 위하여 귀부이수(龜趺螭首) 양식으로 건립한 문학비이다.

묵사 류주현 문학비

묵사 류주현 문학비

여주 출신 현대 소설가인 묵사(默史) 류주현(1921~1982) 선생의 문학비이다. 비의 뒷면에는 구상(具常)이 짓고 원중식(元仲植) 선생이 생애를 기록하였다. 1996년 야외전시장에 건립하였다.


주어사지 추암당대사 정여 승탑 (走魚寺地 㠇岩堂大師 靜如 僧塔)

여주시 산북면 주어리에 위치한 ‘주어사지’에서 1997년 발견된 유물로 추암당대사(㠇岩堂大師) 정여(靜如)의 승탑이다. 주어사는 1779년(정조 3) 권철신이 정약전 등의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천주교 강학을 했던 장소로, 한국 천주교 발상의 요람지로서 교회사와 민족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요 소장품

청사 조성환선생 사회장 행사요항

1948년 10월 13일에 거행된 조성환 선생의 장례 행사의 절차를 기록하고 있다.

조성환 가방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 사용한 가방이다. 가방 속에는 사용하였던 수많은 인장과 도구들이 담겨 있었다.


태극기 인장

조성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출근용으로 사용한 인장으로 태극기 문양에 출근(出勤)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김구 제문

조성환을 추모하기 위해 김구가 쓴 제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은 조성환에 대해 만세의 사표인 진정한 애국자라고 평하였다.

일편단충(一片丹忠)

명성황후 필 일편단충(一片丹忠)

명성황후의 친필 유묵으로 각 폭에 한 자씩 대자로 ‘一片丹忠’을 적었다. 명성황후가 1885년 12월 21일 ‘일편단충’ 세 본을 써서 김규복(金圭復), 김규석(金圭錫), 황윤명(黃允明) 등 3명의 내시에게 각각 1본씩을 주었다. 발문의 내용에 따르면 임오군란의 과정에서 3명의 내시들이 왕과 왕비를 호위했고, 이 공을 치하하기 위해 참된 충성이라는 의미의 ‘단충’을 담아 각자에게 하사했다. 범상치 않은 필치로 힘차고 굳센 필력이 돋보인다.


명성황후 간찰첩(明成皇后簡札帖)

명성황후의 친필 한글 편지를 모은 간찰첩이다. 총 16면의 간찰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조선말 병조판서를 지낸 조카 민영소(閔泳韶, 1852~1917)에게 보낸 것들이다. 간찰에는 가족과 인척에게 전하는 안부부터 정치적인 현안과 관련한 내용 등이 담겨있다. 유려한 궁체(宮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기 시작하여 발전해 온 한글 서체)가 돋보인다. 개인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조선말 왕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윤승길 초상

윤승길 초상(尹承吉 肖像)

1613년(광해군 5) 임해군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익사공신(翼社功臣)에 책록 된 윤승길(尹承吉, 1540~1616)의 초상화이다. 양손은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두 발은 발받침인 족좌대(足座臺)에 올려놓았으며 그 아래에는 화려한 문양과 색깔로 정교하게 꾸민 오색 채전(彩氈)을 깔아 놓았다. 가슴에는 모란꽃과 운문(雲紋) 사이로 노니는 모습의 공작 1쌍을 수놓은 흉배(胸背)를 착용하고 허리에는 서대(犀帶)를 차고 있다. 얼굴의 표현이 극히 섬세한데 특히 눈동자와 수염이 아주 사실적이다.

여강 예찬
나라의 길, 여강
여주 왕비 열전 (명성 황후)
조선 왕자 교육

이포 나루

조선시대 4대 나루터였다. 주민들은 농사일보다 배로 짐을 나르면 이익이 더 컸다고 한다.

이포나루
여주의 인물

여주의 3.1 운동

여주 이포 출신 홍병기 선생은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이다. 당시 인구 6만 명 중 최소 7,000명(12%) 이상이 참여하였다. 강렬한 투쟁 정신을 가졌다.

여주의 3.1 운동 / 이인영 의병대장 생가
독립운동
독립운동
여주의 독립운동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협궤열차 이야기
여주시 즐기기
출렁다리 일원 안내도
출렁다리와 엘리베이터 주변 행사
출렁다리

출렁다리

2025.5.1. 개통되었다. 무료다. 박물관과 신륵사 관광 후 여강(驪江) 위 출렁다리를 통해 영월루 영월루 앞 황마(黃馬)와 여마(驪馬)의 전설이 깃든 마암(馬巖) 쪽으로 넘어갈 수 있다. 연장 515m, 폭 2.5m, 높이 35m인 현수교다.

출렁다리 주변 행사장

출렁다리 주변 행사장에서는 추석맞이 노래자랑이 진행 중이었다.

황포 돛배
황포돛배 선착장

황포 돛배

조선시대의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황포돛배를 재현한 유람선이다. 조선시대 4대 나루 중 이포나루와 조포나루 2곳이 여주에 있었다. 여주시에서 운영하는 세종대왕호와 민간사업자가 운영하는 신륵황포돛단배가 있다.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하고, 승선신고서를 작성해야 탑승할 수 있다.

원호장군 전승비

원호장군 전승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1592년 관민병 300여 명을 규합하여 신륵사 팔대숲 일대에서 도강하는 왜병을 섬멸하였다. 육전에서 최초의 승리였다. 여주목사 겸 경기 강원 방어사로 강원 금화에서 산화하였다.


<참고자료>

-. 여주 박물관 팸플릿 및 홈페이지 : 여주시경도 신문)

-. 경도 신문

-. 다음 사전


글이 길어져 여주 신륵사, 여주 명성황후 생가 이야기는 다음 회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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