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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탐방

여주 신륵사(세종대왕 영릉의 원찰), 왕사 나옹, 무학대사, 이색을 찾아

by 애바다
여강길 종합 안내

세종대왕릉을 둘러보고, 한글&세종시장에서 버스를 타고 신륵사 4거리에서 하차하였다. 여주박물관과 신륵사는 바로 인접해 있다. 신륵사는 세종대왕릉 영릉의 원찰이어서 더욱 가 보고 싶었다.


여주 예찬(驪州 禮讚)

이중환 선생은 택리지에서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어(野平山遠),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합해서 낙토(樂土)다. 여강(驪江, 남한강)의 경치에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라고 극찬하였다.

여주 신륵사 (출처 : 여주 알뜰 관광)

탐방 순서

(2025. 10.11., 토, 흐림, 금회 글 굵은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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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8경은 옛날 시인 선비 묵객들이 선정한 여러 가지 기준이 있었다. 하나하나가 눈앞에 그려지는 한 편의 시다. 현대판 여주 8 경도 있다.

신륵사와 여주 8경
여주 8경(시인 선비 묵객들에 따라 보는 관점에 다소 차이 있었다)

여주 8경 (시인 선비 묵객 선정)

1경, 神勒暮鍾 (신륵모종)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범종 타종소리다. 수해가 잦았던 여강(남한강) 변을 신의 힘으로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사찰이다. 울러 퍼지는 저녁 타종소리는 모두에게 평온함을 안겨준다.

2경, 馬巖漁燈 (마암어등)

마암 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 밝히는 풍경이다. 영월루에 오르면 고기잡이 배들의 등불이 잘 보였다.

3경, 鶴洞暮煙 (학동모연)

강 건너 학동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오 올랐다. 오늘날은 새벽녘 남한강 변에 안개가 대신한다.

4경, 燕灘歸帆 (연탄귀범)

강 여울에 돛단배가 무사히 귀가하는 모습이다.

5경, 洋島落雁 (양도낙안)

양 섬에 기러기떼가 여강 수면 위로 내리는 모습이다. 다른 철새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6경, 八藪長林 (팔수장림)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여강에 비치는 전경이다. 여강물이 맑아서 물 위에 무성한 숲이 거울처럼 비친다. 7경, 二陵杜鵑 (이릉두견)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영릉(寧陵)에서 들리는 두견새 우는 소리다. 밤이 되면 두견새가 찾아와서 서럽게 운다.

8경, 婆娑過雨 (파사과우)

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가 스치는 광경이다. 파사산성은 삼국 시대에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 여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여주 8경(현대판)

여주 8경(현대판)

영릉, 한글시장, 여주박물관, 신륵사, 명성황후 생가,

목아 박물관, 황학산 수목원, 프리미엄아웃렛


여주 신륵사

여주는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고 하였는데, 그 중심에 신륵사가 있다. 즉 여강을 수호하고 안녕을 위하여 빌었다.

여강을 수호한 신륵사

신륵사는 여주시 봉미산(鳳尾山) 자락, 여강 바로 옆에 있다. 삼국시대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 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극락보전, 조사당, 명부전, 심검당, 적묵당, 봉향각, 칠성각, 종각, 구룡루 등이 있다.

신륵사 유래

‘신륵(神勒)’이라고 한 데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神氣)한 굴레(勒)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다. 또 다른 설은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를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다.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굴레(勒)를 사용하여 제압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 즉 벽 돌(塼)로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왕사 나옹이 이곳에서 여러 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다. 수많은 사리가 나왔다.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이 있다.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절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즉, 세종대왕의 명복을 빌고, 조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사찰이다.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신륵사 강변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선호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폐허가 되었다.

성보문화제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
일주문과 불이문 사이 전경
신륵사 불이문

신륵사 불이문

신륵사 일주문을 지나 첫 관문이다.

범종루
범종루 (범종루의 저녁 종소리와 풍경, 여주의 제 1경) / 범종
신륵사 은행나무(수령 660년)
신륵사 9룡루

범종루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극락보전과 다층 석탑

신륵사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신 사찰의 중심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으로 죽은 자의 극락왕생과 중생들의 장수와 안락을 도와주는 분이다. 내부 대들보에 나옹화상의 필적이라는 천추만세(千秋萬歲) 현판이 걸려 있다. 세종대왕릉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어 왕실의 안녕과 세종대왕의 명복을 비는 전각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건물로 팔작지붕 형태다.

신륵사 향나무 (수령 600년)
명부전

명부전

명부는 사람이 죽은 후 가게 되는 사후의 세계다.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 (선원 역할)
관음전

적묵당은 선원(禪院) 구실을 한 건물이다. 심검당은 강원(講院)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다.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 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삼성각
봉송각
조사당 / 무학(좌) 지공(중앙), 나옹(좌) 3 화상

신륵사 조사당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정면과 측면이 비슷하여 정방형이다. 고려말 스승과 제자관계의 스님들 영정을 모셨다. 중앙에 무학(좌), 지공(중), 나옹(우) 3 화상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다층석탑(높이 약 3m)

다층석탑(높이 3m)

극락보전 앞에 흰 대리석을 재료로 한 다층석탑이 있다. 파고다 공원 내의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양수리 수종사 팔각 오 층 석탑의 재질과 양식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었던 성종 3년(1472) 중창 시 조성되었다.

신륵사 다층전탑(높이 9.4m)

신륵사 다층전탑(높이 9.4m)

현존하는 고려 시대 유일한 벽돌을 구워 만든 전탑이다. 벽돌로 된 탑이 있는 절이라는 의미에서 벽절(甓寺)로 불리었다. 7층 형식으로 보인다. 사찰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별개의 장소에 건립한 것은 신라말기부터 성행한 풍수지리설 영향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보제존자(나옹 화상) 석종 (출처 : 다음 사전)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조사당 지나 양지바른 구릉에 남한강이 보이는 위치에 나옹스님 부도가 있다. 1379년에 건립된 종 모양의 부도다.


보제존자 석종비

석종 뒤편에 나옹화상이 밀양 영원사로 가는 도중에 신륵사에서 입적한 후 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조성하였다는 기록을 묘비에 새겼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보제존자 석종 앞에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의미로 석등을 세웠다.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
팔각원당형 석조승탑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과 팔각원당형 석조승탑

다층전탑 / 대장각기비

대장각기비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신륵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상

신륵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상

주존인 불상을 좌상으로 하고 협시상을 입상으로 구성하였다.

강월헌
강월헌(江月軒)과 3층 석탑(출처: 경북일보)
강월헌(江月軒)과 3층 석탑(출처 : 경북일보)

강월헌(江月軒)과 3층 석탑

왕사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6각의 정자가 있다. 나옹을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웠다.

무학대사(좌), 지공대사(중), 왕사 나옹(우, 출처 : BBS 뉴스, 전남 순천 송광사 삼성각)

신륵사 관련 주요 인물

지공화상

인도 승려다. 원나라로 건너가 원의 황제의 후대를 받았으며, 고려의 유학승들과 교류가 있었다. 특히 나옹화상의 스승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왕사 나옹 혜근(1320~1376)

고려말 한국불교의 초석을 세웠다. 경북 영덕군 영일면 출생으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출가하였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에서 정진하였으며, 1358년(공민왕 7) 귀국하였다. 회암사 주지, 공민왕의 왕사로 추대되었다. 신륵사에서 57세 법랍 38세에 입적하였다. 여강 옆(강월헌 옆 3층 석탑자리)에서 다비식을 올렸고,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에 사리를 모셨다. 2,000여 명의 제자를 두었다.


무학 자초(1327~1405) 대사

고려말 조선초의 고승이다. 경남 합천(삼기) 출생으로, 1344년(충혜왕 5) 18세에 출가하였다.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도에서 인도승 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다. 나옹의 제자가 되었다. 조선 태조의 왕사가 되어 건국사업에 영향을 끼쳤다. 1405년 금장암에서 79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신륵사 옆 고달사에서 은신하여 신륵사의 불교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목은 이색(1328~1396)

영덕군 영해에서 태어났다. 1341년 성균관시에 합격한 후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77년 우왕의 사부가 되었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배되었다. 조선의 부름을 거절하고, 1396년 신륵사에서 영면하였다. 왕사 나옹과 교류하였다.


여강미회(驪江迷懷)

목은 이색(1328~1396), 여강에서 기울어져 가는 고려 조정을 바라보며 심란한 마음을 읊었다. 인생도 그렇다.


天地無涯生有涯 浩然歸志欲何之

천지무애생유애 호연귀지욕하지

천지는 무궁하나 인생은 끝이 있으니, 초연히 돌아갈 뜻 그 어디로 가야 하나


驪江一曲山如畵 半似丹靑半似詩

여강일곡산여화 반사단청반사시

여강 한 구비에 산은 그림 같은데, 절반은 단청 같고 절반은 시와 같다네

목은 이색의 여강미회 (여강과 강월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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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가는 길(중앙에 토 선생 있음)
신륵사 토끼(강아지같이 행동하여, 관광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신륵사 마스코트 애완 토끼

신륵사 탐방 후 명성황후 생가를 방문하기 위해 급히 이동 중, 토끼를 만났다. 관광객들이 모두 휴대폰으로 "어머 어머 제 좀 봐!" 하며 촬영했다. 나도 도망가기 전에 얼른 찍었다.


인터넷에 찾아 봤더니, 이 녀석들은 이미 유명한 "신륵사 마스코트"였다. 손등에 뽀뽀도 해준다고 한다. 인간들과 교감을 하는 해탈, 득도한 토 선생이시다.

여주 전통가마
신륵사 주차장(좌)/ 관광정보안내소(우측)

<참조 자료>

-. 여주 시청 홈페이지

-. 여주 알뜰 관광

-. 신륵사 홈페이지

-. 경북일보

-. 다음 사전


글이 길어져 명성황후 생가 이야기는 다음 편에 올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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