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기념관, 감고당, 문예관, 민가 마을 탐방
신륵사 탐방 후, 다음 목적지 명성황후 생가는 오후 6시 입장 마감이어서 시간이 촉박하여, 급히 여주여행자센터 사무실을 들러, 직원분께 택시호출을 부탁드렸다. 바로 왔다.
여주여행자센터에서 탄 택시가 명성황후 생가 관람 매표소 문을 마감 1시간 전에 무사히 통과하였다. 왠지 설레며 긴장이 되었다. 명성황후 기념관에서 일대기 기록과 각종 자료를 보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경복궁 옥호루에서 돌아 가심을 애통해했다. 힘을 길러 다시는 외국에 의한 국권이 유린되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방 완료 후 해가 기울어지고 어두워졌다. 버스를 타기 위하여 인적이 끊긴 거리를 1km 15분 정도 걸어 나왔다. 은행알들이 길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해는 서산으로 이미 넘어갔다. 큰길에서 명성황후 좌상을 뵙고 잠시 대화를 나누고, 기도와 묵상을 하였다.
여주 예찬(驪州 禮讚)
이중환 선생은 택리지에서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어(野平山遠), 낙토(樂土)라 칭송되어 왔던 곳이다. 여강(驪江, 남한강)의 경치가 빼어나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문화의 고장이다."라고 극찬하였다.
탐방 순서
(2025. 10.11., 토, 흐림, 금회 글 굵은 글씨,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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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부모
명성황후 아버지 민치록(1799~1858)과 어머니 한창부부인 한산 이 씨(1818~1874)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종의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손이다. 민치록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형제들이 모두 일찍 죽어 명성황후는 무남독녀로 자랐다. 영천군수 벼슬을 끝으로 서울 감고당에서 영면했다.
명성황후의 어린 시절
8세까지 이곳 여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부모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 한양 감고당에서 성장했다.
여주 명성황후(1851~1895) 생가
명성황후생가유적지
명성황후의 생가, 인현왕후와 명성황후의 손길이 머문 감고당, 명성황후기념관, 문예관, 각종 비(추모비, 숭모비, 명성황후 탄강구리비, 하마비) 민유중 묘, 민유중 신도비, 민가마을 등이 있다.
조선 제19대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墓幕)으로 1687년(숙종 13)에 건립되었고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이다. 안채, 행랑과 사랑, 별당 등을 함께 복원하였다. 그리 크지 않은 재목을 사용한 아담한 규모다. 구조물 형태와 짜임새 등에서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명성황후
1851년 9월 25일(음) 여주 근동면 섬락리(현 능현동)에서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아명은 자영이었다.
왕비가 되다
1866(고종 3년 2월 25일, 16세) 창덕궁 중회당에서 초간택 심사를 받고, 3월 6일 삼간택에서 왕비로 선택되었다. 별궁 운현궁 노락당에서 50일간 가례준비와 궁중법도를 익혔다.
조선 개화의 선봉
고종이 명성황후에 대하여 회고하기를, "미래에 대한 일을 잘 요량하고, 통달한 지식이 뛰어났다"라고 하였다. 아들 순종은 명성황후로부터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라고 배웠다고 한다. 외국 의사도 명성황후는 "명석하고 총명하다"라고 하였다.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일제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살해사건이다. 청일 전에서 승리한 일제는, 러시아와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 와중에 조선의 조정이 러시아 힘을 빌리려고 하자, 명성황후의 친로책에 자극을 받은 일제는 조선의 대러시아 관계의 핵심에 고종의 왕후가 있다고 판단하고 제거를 계획했다.
갓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 아래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무력으로 삼고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를 행동대로 삼았다. 20~30명의 자객이 경복궁내 건청궁 곤령합 옥호루를 기습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사전)
*당시 상황
-. 임오군란 : 1882년 6월 9일(음) 발생, 명성황후는 충주목 민은식의 집으로 피신.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고 명성황후가 죽은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장례식까지 치름. 반란군 진압됨. 흥선대원군은 청으로 납치되어 3년간 유폐됨, 일본과 제물포조약
-. 동학농민군 전주 함락 : 1894년 6월 2일, 청국 군 2,800명 아산 도착, 6월 9일 일본군 8,000명 서울 진군
-. 청일전쟁 : 1894년 8월 1일, 일본 대청 선전포고, 일 승리
-. 시모노세키조약 : 1895년 4월 17일 (청일 강화조약)
-. 삼국간섭 :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후 6일(1895.4.23), 러시아 압력으로 요동반도 일본이 청에 반환
-. 삼국 간섭 후 일본 영향력 감소, 러시아 힘 증대, 명성황후 러시아에 희망 의지와 적극 접촉, 위기를 느낀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 결심
-. 명성황후 시해 :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 동학군 우금치 전투 패배 : 1895년 11월 7일
-. 아관파천 : 1896년 2월 11일
-. 갑오개혁 : 1894. 7월~1896. 2월
-. 을사늑약 : 1904년 8월 22일
-. 러일전쟁 : 1904년 2월 6일 ~ 1905년 9월 5일, 일 승리
명성황후 시해도
칼(1m 20cm, 칼날 길이 90cm)을 3인 중 두 번째로 휘두른 일본 낭인(토오 가츠아키, 藤勝顯)이 반성하며 깊이 뉘우치며, 1908년 일본 후쿠오카의 쿠시다 신사(櫛田神社)에 칼을 맡겼다고 한다. 관련 범인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현재 신사 금고 속에 보관 중이다. (기념관내 물건은 일본에서 사진 촬영해 온 것을 토대로 다시 복제한 것임)
맡길 당시 시해도 봉납대장이 있으며, 명성황후 관음상을 만들어 사죄하고 있다고 한다. 봉납 당시 칼집에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한순간 전광처럼 늙은 여우를 찔렀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봉납한 진의가 의심된다. 범행에 사용된 증거물 도구로서, 반드시 압수 환수하여, 한국에서 보관하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국회와 여러 지방의회에서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압수와 한국으로 환수되어야 한다"는 결의가 있었다.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코와 귀를 베어가 무덤을 만든 이총처럼, 범행증거물을 보관하는 처사는 이해하기 어렵다.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려운 천인공노할 짓이다.
2007년 7월 31일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제2차 방문단이 명성황후 생가를 참배 후 작성한 방명록이 있으며, "우리들 제2차 명성황후 방문단은 명성황후의 묘 전에 엎드려 사죄하러 왔습니다"라고 참회하며 뉘우쳤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떠난 그 후
백범 김구 선생이 분노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사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서 옥살이하였다. 안중근의사는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하였다. 시해 2년 후 국장이 거행되었다. 청량리에 있던 홍릉은 고종 승하 후 남양주시 금곡리로 옮겨졌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으로 모시고 있다.
명성황후기념관
여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비(妃)인 명성황후를 기념하기 위해 2017년 여주시가 설립한 공립박물관이다.
명성황후가 태어나 8살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의 바로 맞은편에 건립되었다. 명성황후와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감고당
감고당은 조선 제19대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가 친정을 위해 지은 건물로서 조선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이다. 희빈 장 씨의 모함을 받아 폐위된 인현왕후가 복위될 때까지 약 5년여 동안 머물렀다. 명성황후가 8살의 나이로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년(고종 3) 왕비로 책봉되기 전까지 살았던 건물이다.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1761년 “감고당”이란 편액을 하사한 후부터 감고당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본래 한성부 안국방 37번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고, 2004년 쌍문 중·고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2006년 명성황후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던 여주시가 명성황후의 고향인 여주로 이전 복원했다. 조선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구조 형태다.
문예관
2002년에 개관한 161석 규모의 공연장이다. 명성황후 생가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무대, 객석, 로비, 조종실, 화장실(장애인 화장실 포함), 분장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연, 회의, 교육 등에 이용되고 있다.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
민유중(1630~1687) 선생은 조선 제19대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민유중의 5대 손이다. 효종 원년(1650) 과거에 급제한 뒤 승문원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숙종 7년(1681)에 민유중의 차녀가 숙종의 계비(인현왕후)가 되며 여양부원군에 봉해졌다. 노론의 중진이었다. 명성황후생가유적지 뒤쪽 구릉에 있고, 묘소로 가는 길목에 민유중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
조선 제26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1851~1895) 태어난 마을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비석이다.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글공부를 하던 건물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비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라 새겨져 있다. 1904 년(광무 8)에 세웠다.
명성황후 추모비
명성황후를 추모하기 위해 명성황후 기념관 앞에 세운 추모비다. 2개의 직사각형은 과거와 현대를 상징하는 기둥이며 좌측 상층부에 빛나는 태양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명성황후를 상징하고 있다.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 내 옥호루에서 일제에 의해 시해당했다. 처음 1981년 건청궁 내 동쪽, 구릉지에 세워졌다. 그 후 건청궁의 복원과 개방으로 이전 대상지를 물색하던 중 명성황후 시해 112주기를 맞이하며 2007년 10월 8 일 여주의 명성황후생가유적지로 이전했다.
하마비
하마비는 이 비석 앞을 지날 때는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비석이다. 왕이나 장군, 고관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웠다. 비석의 표면은 6.25 전쟁의 탄흔으로 일부가 훼손되었다.
명성황후 좌상
당초 명성황후생가 부지 내에 설치했던 동상을 약 1km 현재의 위치(여주시 점봉동)로 이전 설치하였다.
<참조 자료>
-. 여주 시청 홈페이지
-. 여주 알뜰 관광
-.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팸플릿
-. 연합뉴스
-. 오마이뉴스
-. 다음 사전
이상으로 세종대왕릉, 한글& 세종시장, 여주 박물관, 신륵사, 명성황후 생가 탐방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