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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으로 받은 첫 강사료

by 제이피디아

퇴사 후 처음으로 번 돈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인을 통한 소개였어요. 퇴사 후 일도 수입도 없이 지내는 걸 안 박사과정 동기가 연락해 왔어요.


아버지가 ㅇㅇ시 농업인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시는데, 마케팅 강의 한 번 해보겠니?


흔쾌히 수락했죠. 가리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회사 밖에서 처음 맡는 강의, 이 시작이 다음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고, 친한 이의 가족이 연결된 일이고, 내 이름을 걸고 나가는 첫자리.

완벽하고 멋지게 해치워버리고 싶었습니다.


몇 주에 걸쳐 자료를 준비하고 강의실로 향했어요.

하지만 회사에서 하던 방식대로 만든 PPT는 딱딱하고 지루해 보이더라고요. 현장에 서니 부족함이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강의 스킬도 없었고, 진행이 매끄럽지도 않았어요. 재미도 없었고, 말을 유창하게 하지도 못했고. 2시간 자신감 있게 시간을 채우려 애쓰면서도 속으로는 연신 자책한 시간이었어요.


내가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 이게 정말 맞는 길일까?


두려움과 미안함을 극복하고 그 시간을 그나마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건 청중 분들 덕분이었습니다. 대부분 60 전후의 어르신들이었는데, 내 강의가 부족함에도 딸이나 조카 대하듯 편안한 눈빛으로 바라봐주셨거든요. 허술한 강의였지만, 따뜻한 시선에 힘입어 두 다리에 힘을 빡 줄 수 있었어요.


강의가 끝난 후, 강사료 지급에 사인을 하고 지하철로 집으로 돌아왔죠. 며칠 후 통장에 찍힌 강의료, 금액은 크지 않았지만 잊히지 않는 전환점이 되었어요. 회사에서 월급명세서로 받던 돈과는 다른 울림이더라고요. 조직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번 첫 수입이니까.


동시에, '돈 벌기 쉽지 않구나!'를 뼈저리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회사로 오는 강사들이나 TV 유명 강사들을 먼발치에서 보며, 즐겁게 청중을 이끄는 그들을 보고, 타고난 재능으로 돈 버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재능으로 보이게 될 때까지 어쩌면 피나는 노력이 있었던 건 아닐까?


스스로 첫 강의를 100점 만점에 5점으로 평가했습니다. 잘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부족함에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시간이었거든요. 20여 년 산업 현장에서의 경험이 어디로 갔나 싶을 만큼 형편없었습니다.




지인을 통한 이 강의는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았어요. 부족함이 확인된 셈이죠. 혹시 잘하지 못해 피해를 드린 건 아닐까, 아버지께 괜히 누를 끼친 건 아닐까 하는 죄송한 마음도 들었어요.


첫 강의는 부족투성이었지만, 이제 시작이구나!

맘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어요.


시작이 반이고, 기고 걷는 과정 없이 처음부터 달린 사람은 없으니까.


비록 다음으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 작은 경험이 없었다면 새로운 도전과 노력을 주저했을 거예요.

아니다, 물러설 길이 없었던 게 더 정확하겠네요.


첫 강사료는 퇴사 후 삶에 대한 작은 희망의 씨앗이었으며, 앞으로 길을 더듬어가게 만든 작은 불씨였어요.

그리고 의지를 다시금 세우는 계기가 되었어요. 원점에서 출발해야겠다는 걸 새기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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