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는 종로구 블루하우스 홍보수석 출신으로 올해 구순(九旬)이다. 강산이 9번이 변한 장면을 본 국이지만 아직도 왕성한 지능 활동을 자랑한다. 감기예방에 좋은 모과차를 달여 마시면서 새벽녘에 배달된 대한신문 조간판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이러다가 이 신문의 어느 기사 대목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뇌물기사이다. "하여간 군사정부, 민주정부 때도 뇌물 받고 모가지가 잘린 고관대작 기사가 다반사였는데 현재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혀를 찬다. "부처가 무상(無常)을 설파했는데 부처도 오류를 낳았구만.. 사람들이 돈 좋아하는 것은 고정변수이다"
국이는 어제 밤에 '구구전기밥솥'에 손수 지은 햇밥과 한국민족 피부색깔마냥 누런 된장찌개를 아침 밥상에 올린다. 또한 누런 된장찌개의 절친 삼겹살로 요리한 '제육볶음'도 곁들여 수저를 뜬다. 국이는 한평생 혀를 자극시킨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이지만 질린감은 전혀 없다. 되려 이 둘이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맛에 매료될 뿐이다. 왕왕 국가종합검진에 참여해 의사들이 고령자라서 위를 괴롭히는 매운 음식을 조심하세요라는 귀따가운 조언을 듣는 국이지만 캡사이신이 삼겹살에 착 달라붙어 양산한 황홀한 맛을 내팽켜 칠 수는 없다. 혈기왕성한 나이부터 잘 배운 '333'칫솔방법과 소금물 가글로 잘 관리된 치아덕분에 제육볶음도 잘게잘게 씹을 수가 있다.
조반을 마친 국이는 치카푸카 양치질과 목욕재계에 나섰다. 집 근처 '저작동청소년수련관'이 마련한 오전 수영에 참여해 건강 관리를 하고 대학생 시절 참여한 '대학생 노래자랑'에서 대상을 수상한 저력을 바탕으로 '저작구청 시니어 합창단' 일원이으로 연습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몸을 깨끗히 한 국이가 샤워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현관문 벨소리가 "띵똥띵똥"하면서 울린다. 감정이 없는 벨소리지만 다급함이 감지됐다. 국이는 인터폰으로 "누구세요?" 물으면서 인터폰화면을 훔척훔척 하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깨복쟁이 친구 '김무지'이다. 무지는 동네친구로서 마땅한 직업 없이 고물상, 노가다현장 등에서 하루 벌고 하루 사는 인생이였다. 그럴 것이 무지의 부모님도 까만눈(수정필요)으로 이진사 댁 노비로 한평생을살았다. 부전자전이랬던가? 국이는 이 부모님 밑에서 배움 따위는 맛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마당에서 키운 똥개나 도야지마냥 살 뿐이다. 톡 까고 말하면 무지는 버스노선도도 읽지를 못한다.
국이는 현관문을 열면서 반가운 목소리로 "무지야.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야? 허겁지겁하길래 내가 되려 아연실색했다"고 정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런 상황과 달리 무지는 여전히 화들짝 놀란 상태를 띄며 바지에서 구겨진 편지 한 통을 국이의 손에 움켜줘준다. 무지는 "이게 무슨 내용이야? 백설기마냥 허연 종이에 검은깨가 뿌려진 게 무슨 말이야? 전쟁이 났다는 거야?"라고 초조감을 유지하면서 물어본다. 국이는 이 편지를 일매지게 펼치면서 "저작동주민센터가 보낸 연말연시 안부 편지네"라며 "주민센터가 기초수급자인 너가 건강을 유지하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영위하라고 보낸 편지야"라며 조소,고소, 홍소를 연출하면서 답변했다.
얼굴에 생채기로 범벅된 무지는 나라가 자기 걱정을 해 준다는 말에 얼굴에 화색을 띠며 어깨춤을 추면서 연달아 고장을 힘차게 친 후 "국아! 내가 기분이 째지는데 아스파탐 무첨가 막걸리 한 잔을 쏠게, 인근 편의점 파라솔에서 한 잔 하자. 요놈이 설탕보다 더 달다. 목 축이는 데 안성맞춤이다"라고 국이를 가일층 부추킨다.
오늘 계획이 있는 국이는 무지의 제안을 점잖은 말과 태도로 거절한다. 솔직히 냉정하게 박절하고 싶었지만 못 배운 무지의 가슴에 커다란 파아란 멍을 새기는 것과 같아 나름대로 국이가 예절을 갖춰서 응대 후 무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침댓바람부터 요란해진 감정을 추스릴 겸 국이는 소파에 앉아 베란다 바깥 풍경을 훝어본다. 흰거위 깃털마냥 눈꽃이 내린다. 국이는 하강하는 눈을 보면서 눈을 지긋이 감는다. 이윽고 해마는 점차적으로 과거를 소환한다.
기실 어린시절 국이는 가난으로 허덕였다. 문살에 바른 창호지는 구멍이 쑹쑹 뚫어져 전광석화 같은 찬바람이 집안에 들어와 그나마 어린 국이의 체온을 지켜주던 미온한 공기를 잡아먹었다. 허기진 위는 밀가루가 상주했다. 남루해진 고무신이지만 누가 훔쳐갈까봐 노심초사도 했다. 이마저 잃어 버리면 새 고무신을 구입하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그렇지만 국이는 미래가 희망찼다. 동네 형들이 버린 각 종 동화책과 백과사전들은 호기심을 자극시켜줬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온종일 이 책들을 읽었다. 이 자세로 피가 원활히 흐르지 못 하자 동맥, 정맥, 모세혈관은 가뭄난 강처럼 메말라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배운다는 게 흥미를 자극했다. 때론 배움에 그치지 않고 국이는 직접 맨 손으로 땅바닥에 시, 짧은 글 등도 저작한 행위는 오로지 자신의 개성, 기질, 생각을 드러내기 때문에 심장은 연신 흥분 상태였다. 이러다 국이엄마가 "국아 어디있니? 밥 먹자!"라고 아우성을 펼치면 국이는 땅바닥에 쓴 글들을 얼굴이 빨개진 채로 황급히 발로 흙을 모아 지웠다. 실력이 뽀록날까 부끄러운 감정이 피어올라서다.
'성공하면 실력, 실패하면 경험이 아니던가?' 국이는 이 날 이후로 삽시간으로 튀어나온 생각, 감정을 몽땅연필로 작년 달력 빈칸에 긁적긁적 적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국이엄마가 김밥을 말을 때이다. 국이는 엄마 곁에서 군침을 흘리면 당근을 도둑고양이마냥 계속 훔쳐먹었다. 국이엄나는 '국아 왜 당근을 계속 먹니? "라고 호통을 가하면서 "맛있니?'라고 말했다. 국이는 이 호통을 잠재우고자 "당근 맛있다. 토끼가 왜 당근을 먹은지 알 것 같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기지를 발휘해 토끼가 당근을 자주는 먹는 현상을 자신에게 대입해 위기 상황을 넘겼다. 참신한 생각이라서 국이는 이를 달력에 적었다. 이럴수록 국이 심장은 희열이 가일층 됐다. 국이 자아정체성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주체성이 싹트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나날이 성장하는 쾌조도 맛 봤다.
이 경험은 국이가 초중고대학교 재학 다닐 때 백일장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자양분이 됐다. 마을 주민들은 이 때마다 추사 김정희가 이 땅에 다시 강림했다면서 마을 어귀에 '장하다 한국! 전국 백일장 대회 대상 수상' 현수막을 걸었다. 동네 마을 주민 문외한 씨는 "아따, 동네에 한석봉이 떠억 하니 등장했는데, 현수막을 더욱 높이 매달아 하지 않을까?"라고 목청껏 고래고래 야단법석을 떤다. "내가 목숨을 걸고 더 높이 현수막을 매달 것이니 다들 저 짝으로 가 보시라우"
"야! 이 놈아 한석봉이 아니고 추사 김정희이다. 한 씨보다 김 씨가 한국 땅에 더 많이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데,, 쪽수를 생각해서 김정희가 맞지? 안 그냐? 그리고 한석봉 애미는 떡을 썰었는데 국이 어미는 김밥 말았다. 비교 대상이 아니랑께! "라며 이무식 씨가 검지손가락을 문외한 얼굴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국이가 이번에 탄 상금이 얼마랬지? 대학교 입학금은 처리 됐다고 하는디, 참 다행이여"라며 언죽번죽하면서 떠들었다.
국이는 어언 눈을 떴다. 내리는 눈은 체력이 바닥이 났는지 속도가 줄어들었다. 국이는 소실적 저작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어떠한 인생을 마주했을까?라는 가상을 펼쳐본다.김무지마냥 자립이 불가능 해 저리 치이고 이리 치이는 초라한 인생이 불현듯 상상된다. 이 상상을 뒤로한 채 국이는 서재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서랍을 한 평생 글을 쓴 오른손으로 쓰윽 연다. 이 서랍 안에는 국이가 백일장 대회에서 지은 대상작품을 읽고 사유하는 능력이 배(倍)가 되었다면서 감사하다며 보낸 어느 독자들의 편지가 세월을 간직한 채 누워있었다.
저작은 국이에게 자존감, 자아정체성, 상생, 성장을 터준 열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