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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만난 '순자'씨

-슬픔의 모양 <하루거리>

by 스토

두 번째 그림책 모임이 있는 날이다. 나는 어떤 책을 읽는지도 모르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며 내가 준비한 것은 긴 운전을 대비한 목 보호대뿐이었다. 그저, 오늘은 또 어떤 자극이 내게 올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과 하기로 했으니 하루도 빠지지 않아야지 하는 마음이 다였다. (주말 내내 몸이 아파서 가는 게 나을지 쉬는 게 나을지 오락가락했어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새벽부터 비가 내린 탓인지 길이 많이 막혔고, 자유로는 공사를 했고, 트럭과 자동차 추돌 사고도 있었다. 나는 절대로 늦고 싶지 않았다. 나이 들면서 약속시간에 늦는 것이 더 싫어졌다. 여유롭게 움직여야 몸과 맘이 편했다. 조급한 맘이 이제는 몸까지 힘들게 해서 나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늦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커피가 너무 간절했다. 미리 도착해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은데 늦게 들어가서 커피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체될수록 나는 나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좀 나중에 마시지 뭐. 한 시간 정도 더 참을 수 있잖아.

방지턱을 쿵 하고 지나며 미친 듯이 달려 2분 전에 도착을 했다. 서둘러 커피를 주문하고 문가로 자리를 잡았다. 첫 번째 시간에 한두 사람 낯을 익혔는데 그들은 모두 오늘 빠진 모양이었다. 다시 낯선 사람들이 주위에 가득해졌다.


하얀 스크린에 그림책 그림이 펼쳐졌다. 오늘은 작가님이 아닌 동화 구연자가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재는 순자야. 걸을 때 왼발을 잘름거려. 다친 걸 안 고치고 그냥 뒀다나?”

첫 문장부터 나를 엄마의 어릴 적 한 동네로 데리고 가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어릴 적 자기 동네에 절름발이가 있었다고 했다. 다리를 다쳐 불편해지는 경우야 아주 드문일은 아닌데, 그 아이가 절름발이가 된 사연이 이상(?)했다. 엄마 말로는 그 아이의 엄마가 아기를 마루에 눕혀 두었다가 한쪽 다리를 쭉 잡아당겨 젖을 먹이곤 했다는 거다. 아기 떨어질까 마루 안쪽으로 뉘어두고, 밭일 집안일 하다가 울면 급하게 다리를 잡아끌어 품에 안았을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다리병신이 될 수도 있다니 하며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림책 속 순자도 그 비슷한 기막힌 연유로 잘름거리지 않았을까.


짧은 글과 그림 속에서 그 시대 순자의 고단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한마디.

“죽게 해달라고 빌었어.”

어린 순자는 책 제목처럼 ‘하루거리’를 앓고 있었다. 하루는 죽을 듯이 아프다 하루는 괜찮아지지만, 다시 쓰러져 눕고 마는. 동네 아이들은 그런 순자를 자기 방식으로 살리려 하고, 살아 있어 달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아픔에 취약한 나는 애써 눈물을 삼키다, 순자를 살리려는 그 아이들이 고마워 다시 눈물이 났다.


그림책 모임이 이렇게 슬퍼도 되나? 오늘은 아주 대놓고 슬프자고 하는 모양이었다. 작가님은 슬픔의 모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슬픔이 증명하는 것은 사랑이며, 슬픔에 잠기면 사람은 평소처럼 작동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은 슬픔이 있다는 것. 언제가 ‘슬픔학’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작가님도 그 책 이야기를 했다.


나는 늘 슬픔을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왔다. 내 슬픔을 드러내는 것은 늘 미안한 일이었다. 모두 자기만의 슬픔이 있는데 유난을 떠는 것만 같았고, 내 슬픔이 전염되어 상대를 힘들게 할 거 같았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만 슬픔을 드러냈다.

최근에 읽은 <철학자와 늑대>에서 우리 영장류들은 행복을 목표로 산다고 했다. 우리는 인사처럼 행복하자고 말한다. 그 행복에 슬픔은 방해꾼일 뿐이다. 하지만 슬픔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막는 것도 행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막무가내로 슬퍼하지 말고, 행복해하라고 할 수도 없다. 고통을 표현할 언어가 언제나 부족하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다고 한다. 슬픔을 제대로 인식하고 표현할 때 작은 행복도 찾아오는 거 같다.


이제 와 이야기하자면 나는 아빠를 떠나보낸 깊은 슬픔으로 삶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빠가 떠났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세상의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 모든 것이 낯설어서 어디를 봐도 눈물이 났다. 스치는 말소리, 바람 소리도 그리움이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게 일어나는 문제들이 사소해졌다. 가벼워졌다. 아빠도 떠나는데 이게 뭐 그리 큰일인가. 내 아빠가 죽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게 뭐. 난 이게 ‘슬픔의 선순환’ 같다.


책을 소개하는 작가님의 이야기가 끝나고, 오늘은 책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최근 느낀 슬픔을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모임 사람들은 슬픔을 이야기하며 울먹이기도 하고, 코를 훌쩍이기도 했다. 슬픔도 사람 생김새만큼 다르고, 또 닮아 있어서 공감이 되었다. 나는 한참 뒤 순서일터라 어떤 이야기를 할지 생각해 봤다. 아마도 우리 집 ‘순자’씨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았다. 작가님은 이 책으로 순자라는 이름에 새롭게 호감이 생겼다고 했는데 나는 우리 집에 순자씨가 있어서인지 처음부터 다른 순자는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집 순자씨는 내 시어머니다. 순자씨는 어느 순간부터 내게 ‘엄마가 해줄 테니 걱정 마’라는 말을 하곤 했다. 시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시어머니는 자신을 엄마로 칭하셨다. 나를 정말 친자식처럼 여기고 싶으셨나 보다. 뭐, 친자식이건 아니건 우리는 친자식, 부모처럼 자주 만나고 수다를 떨기는 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줬다. 어머니는 내가 애쓰는 걸 알아줬고, 나는 어머니가 애쓰시는 걸 바라봤다. 어머니가 목관을 하고 요양병원으로 다시 입원하던 날. 나는 어머니에게 칭찬의 말을 했다. 너무 나약한 상태가 되었지만 어머니의 삶은 위대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불안한 표정만 가득하던 어머니는 내 말에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우셨다. 평생을 애 엄마로 살았던 자신을 인정하고, 그 노력을 알아봐 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았다. 이제야 듣는 그 말에 눈물이 나는 거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면회를 가면 입모양으로 내게 말하곤 했다.

‘죽어야지’

건강이 나빠져 제대로 걷기도 숨쉬기도 힘든 날도 내게 ‘하나님한테 나 데려가라고 기도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림책의 순자처럼 어머니의 소망도 같았다. 얼마 전, 어머니 면회를 갔는데 그날은 오랜만에 어머니와 둘이 마주 보며 예전처럼 같이 눈물을 흘렸다. 기력이 떨어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날이 늘고 있는데 그날은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눈물지었다. 내가 어머니 손을 쓰다듬으며 ‘똑똑한 우리 어머니, 이렇게 계실 분이 아닌데. 그럴 분이 아닌데’ 했다.


그림책 독서 모임, 여긴 참 묘한 곳이다. 사람 여럿이 어울리는 건 기쁘자고, 재밌자고 하는 짓인데 여기는 슬프자고 모인 것만 같다. 그런 경우는 잘 없는데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귀한 그림책을 득템하여 서점을 나섰다. 김휘훈 작가의 <하루거리>는 이미 절판된 책이라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서점에 7권이 있어서 나는 좀 염치 불고하고 책을 선점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엄마에게 이 책을 가져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심심할 때마다 책을 펼쳐 옛날 친구도 떠올리고, 옛 생각에도 잠길 거 같다. 그 시간은 어쩌면 슬픔이 밀려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슬픔에 꿈틀대는 마음이 있어야, 다른 마음도 꿈틀댈 거라고 믿는다. 지금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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