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는 ‘작가란 년이...’다.
이 말은 내가 내게 하는 자조적인 말이다. 나를 한껏 한심해하며 하는 말.
이 말을 하게 된 이유는 이렇다.
한때 나는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낼 때도 맞춤법, 띄어쓰기를 철저히 하는 사람이었다. 간단한 문자에도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허술하면 오탈자를 낸 듯 불편한 맘이 들었다. 오랫동안 책을 만들며 든 습관 때문인 듯했다. 그러니 문자를 쓸 때도 가벼운 맘이 되지 않았다. 남들은 툭툭 쳐서 보내는 문자를 나는 보고 또 보며 검토해야 했다. 그래도 간혹 틀린 채로 문자가 보내졌는데 그럴 때면 내내 찜찜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나날이 문자 쓸 일은 많아지니 과감하게 띄어쓰기를 좀 포기하자 마음먹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틀을 깨니 편해졌다. 통상적인 수준으로만 편하게 띄어쓰기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종종 틀린 단어를 쓰기에 이르렀다. ‘날짜는 편하게 조종하세요.’ ‘선망 증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건 모두 ‘조정’과 ‘섬망’을 잘못 나타낸 말이다. 아이가 어른의 말을 흉내 낸 듯하고, 제대로 모르는 낱말을 억지로 쓴 듯도 싶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낱말만 헷갈리는 게 아니라 맞춤법도 헷갈렸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왔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참담하고 부끄러웠다. 절로 작가란 년이 뭐 이래 했다. 심한 부끄러움에 더럭 욕이 나온 것이다.
어릴 적 나는 국어사전을 옆에 두고 책을 읽었다. 어느 글에서 ‘보루’라는 단어를 보았는데, 문맥상 내용은 이해되었지만 제대로 알고 싶어서 사전을 찾았다. 보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구축물이었다. 언젠가 그 말을 글과 말에 꼭 써보리라 생각하니 신이 났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아는 단어의 세계 속에 있다고 한다. 머릿속 생각은 결국 말과 글로 정리되는 것이니 생각이 아는 단어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말이다. 새로운 단어를 알고 기뻤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글을 쓸 때면 뭔가 떠오르지 않는 단어에 답답증을 느끼곤 한다. 이어질 문장에 딱 알맞은 단어가 있다는 느낌만 들고, 낱말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 말이 뭐였지’ 고민고민 끝에 ‘그래 그거지’하고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끝까지 떠오르지 않아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타도 무지 났다. 사람은 보통 생각보다 손이 느리다. 그걸 감안하고 자판을 두드리면 되는데 나는 맘만 급해서 자음 치고 다음에 이어질 낱말의 자음을 바로 쳐서 오타가 났다. 그러면 다시 지우고 쳐야 해서 속도가 느려진다. 결국 글쓰기가 느려지는 것이다.
이러니 제대로 작가 노릇을 할 수가 있나. 속으로 ‘작가란 년이 한글 맞춤법, 띄어쓰기를 헷갈리고, 적절한 단어 구사에 어려움을 겪으며, 성질만 급해서 한 줄도 못 가서 오타를 내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는구나’ 주절거린다.
그런데 글뿐이랴.
말도 더듬고 버벅댄다. 어르신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가끔 옆에서 거들어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거 있잖아, 설거지해주는 거. 그거.’
‘알아, 안다고 나도 지금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말을 못 하겠네.’
나는 모르는 어르신들의 대화를 엿듣다 속으로 ‘식기세척기요’하고 혼자 대답을 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럴 때가 아니다. 물건이건 인물이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고, 주저리주저리 거린다. 말하다가 이야기의 목적지를 잊어버려 이말 했다, 저말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어수선하게 이어지는 말에 힘이 담길 리 없다. 그러니 나의 글과 말로는 감동도 설득도 불가능하다. 작가란 년이, 25년 넘게 글을 써서 벌어먹었다며 그 시간이 무색하다.
오래전 아는 언니가 내게 넌 작가가 왜 고운 말을 쓰지 않냐고 했다. 참고로 그 언니는 ‘똥’ 소리도 ‘변소’ 소리도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니 가끔 나의 표현이 과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랄을 지랄이라고 하는 것은 이보다 정확하고 적절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야. 그러니 이건 욕이라기보다 정확한 언어 사용이라고 할 수 있어.”
마치 어린 장금이가 감 맛이 나서 감 맛이 난다고 말했던 장면과 오버랩되는 상황이었다. 난 그렇게 당당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정확한 단어를 구사하는 작가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이름도 단어도 자꾸 잊으니 지식도 짧아지고, 표현도 얕아졌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작가란 년이’가 어느 순간 ‘사람이 어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흘러 ‘작가란 년이’가 ‘사람이 어찌’가 된다면 어떨까? 요즘 나는 그런 모습을 심심찮게 보고 듣고 있다. 내게도 그냥 지나치는 일은 아닐 거라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한탄은 봄놀이 나와서 하는 투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갈 길이 먼 건가? 작가란 년이 또 새로운 생각을 건져 올린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