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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경 Sep 06. 2022

2022년 여름 후기

2019년 귀국한 이후 올해 처음으로 미국에 갔다. 이렇게 오랫동안 한국에 갇혀(?)있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코로나 덕분에 3년을 꼬박 한국에만 있으면서 내가 제대로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했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같이 믿으며 실천하는 동료를 찾기가 너무 어려워서 내가 그동안 철석같이 믿었던 것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미친 건가?’ 하는 의심도 들었으니까. 내가 소리를 듣는 방식, 악기를 하는 방식이 제대로인지를 ‘제대로 된 사람에게’ 확인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냥 오랜만에 미국을 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나의 상태를 점검하고 재정비할 기회가 절실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번 여름 정말 너무나 좋았다. 그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답답했던 것들이 모두 뻥 뚫린 느낌이다.


가장 좋았던 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음악적 포장(해석)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악기의 기본, 즉 소리를 내는 법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3년 만에 악기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보니까 너무 힐링이 됐다. 한 번은 Julia Lichten이 콘서트홀에서 '그냥 내는 소리 vs. 퀄리티 있는 소리'를 비교해서 학생들에게 들려주는데 괜히 내가 옆에서 울컥했다. 그래, 내가 확인받고 싶었던 게 바로 이거였어. 그 수업 10분만으로 내가 미국에 온 이유가 충분했다.

 

그리고 이번에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 한국에서 연주하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어떻게 해야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매번 머리 터지게 고민했는데 그게 나에게는 큰 공부가 되었던 것 같다. 내 연주가 2019년보다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고, 실제로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게 '한국에 살면서 바보 되는 것'인데, 어려운 와중에도 내가 계속 노력하면 발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 큰 소득이다.


예전 뉴욕 시절만큼 빡센 연주 스케줄을 다시 한번 경험한 것도 즐거웠다. 이번에 나한테 규모가 큰 소나타 연주가 많이 배정됐는데, 하나하나 쉽진 않았지만 그런 지적인(intellectual) 스트레스는 아직 감당이 되더라. 아직 내 머리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고, 주 40시간 이상 피아노를 치면서 옛날 생각도 나는 게 왠지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땐 주 40시간이 뭐야, 하루에 10시간도 쳤을 텐데 왕년에 했던 가락(?)이 아직은 살아 있구나 싶었다 ㅎㅎㅎ


몇 명 아주 괜찮은 학생들도 있었다. 특히 베토벤 크로이처 소나타를 같이 연주했던 Joshua는 연주하면서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집중력이 좋았다. 올여름에 가장 즐겁게 한 연주였다. 자랑스럽게도 이번에 Meadowmount에서 눈에 띄게 똘똘한 학생들은 한국계였는데, 좋은 유전자가 외국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면 저렇게 빛이 나게 잘 클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한국의 교육은 좋은 유전자도 평범 이하로 만드는 이상한 교육이다...


이번에 패컬티로 온 피아니스트가 총 6명인데 분위기도 좋았다. 원래 우리 분야에는 일 욕심내면서 서로 싸우는 애들이 꼭 있는데 이번에는 욕심쟁이가 1명밖에 없어서 싸울 일이 없었다. ‘그래, 니가 허드렛일 맡아주면 우리는 고맙지~’ 하는 분위기 ㅋㅋㅋ 나머지 사람끼리는 너무 사이좋게 잘 지냈다. 캠프 예술감독이 우리더러 '이번 피아니스트 그룹은 파티 그룹'이라며 뭔가 특별하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마지막에 다섯 명이 한 차에 낑겨서 뉴욕까지 왔을까. (중간에 두 명은 Albany 공항에 내렸지만.)


미국 1, 대만 2, 한국 1, 일본 1. 한국인이 나밖에 없어서 여름 내내 영어만 쓰니 영어도 다시 돌아오더라.
테트리스 게임하듯 차 구석구석 짐을 실었다.
맨해튼 종로상회. 레트로 감성 물씬 나게 꾸며놔서 대학생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외국인들도 좋아한다.


아무튼, 더 이상 어떻게 좋을 수 있을까 싶은 여름이었다. 1년 동안 살아갈 에너지를 충분히 얻은 것 같다. 근데 한국 온 지 열흘도 안됐는데 기억은 벌써 가물가물하다. 그냥 재밌었던 기분만 남았음. 지금부터가 나의 일상이니까 이걸 또 즐겁게 잘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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