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참 바빴다. 너무 바쁘다 보니 몸이 축났나보다. 바쁨에도 관성이 있는 건지 바쁜 일상은 그대로 날 매우 빠르게 몰고 간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아니 그 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하게 날 몰고 간다. 그렇게 살았다. 요 몇 달을.
학교에서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한 선생님께서 사정이 생겨서 하지 못하게 된 일이 나에게 오게 됐다.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거절하면 누군가에게 가게 될텐데, 누군지 모르는 그 사람이 불편해지는 게 불편했다. 다 지나서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다. 누가 누굴 걱정한건지. 어쩌다 보니 원래 내 업무도 거의 고스란히 내게 남아서 나는 갑자기 두 사람 몫의 업무를 하게 되었다. 만나는 선생님들마다 왜 그걸 맡았냐고, 못한다고 하지 그랬냐고 하시는데,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오랫동안 나는 인정하지 않았었지만 어떤 부분에서 나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분명 있다. 새 업무를 맡게되니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틀리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교묘하게 날 괴롭혔다. 업무를 하고 있지 않는 순간에도 내 뇌는 늘 각성상태였다.
순서적으로 보면 이 업무를 맡게 되기 전에 이미 나는 대학원에 가기로 되어있었다. 교사로서 나의 첫 기도가 아이들을 위로하는 교사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기에 교사로서 사는 내내 아이들의 마음은 나의 중요한 고민이자 더 알고 싶은 분야였다. 오랜 마음의 준비 끝에 상담을 공부하고자 어렵게 첫 발을 뗀 때였다.
이 하나는 내 계획이었지만, 계획에 없던 또 다른 하나가 갑자기 내 삶에 끼어들면서 내 삶에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얹어졌다. 학교에서는 수업 준비나 아이들과 관계된 일들을 해낼 시간을 쫀쫀히 줄여가며 문서 작업에 시간을 쏟아야 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업무에 쏟을 때면 항상 드는 생각은, 내가 이러려고 교사가 된 게 아닌데, 이다. 매달 아이들을 위해 실행해오던 익숙한 일조차도 이번 달엔 그만 까맣게 잊고 지나버렸다는 걸 어제서야 깨달았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또 어찌나 내 자신이 실망스럽고 자괴감이 들던지.
모르고 지내다 어느 때부터 느끼게 되었는데, 내게는 무척이나 이상한 비합리적 신념이 하나 있다. 학교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사용하면 죄책감이 든다는 것이다. 얼마 전 친한 언니가 내게 물었다. 넌 심심하다고 잘 표현하지 않는 것 같아. 학교에 있을 때 심심하면 어떻게 해?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나는 심심하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을 뿐더러 실제로 심심할 틈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도 여유로울 거라고 생각하는 직장인 학교에서, 나는 우습게도 일 분 일 초를 다퉈가며 치열하게 근무하다가 시간에 쫓겨 뛰어서 퇴근한다.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며칠에 한 번쯤 있을까 말까 하고 화장실에 들르는 것도 손에 꼽는다. 점심 먹고 한 알씩 챙겨 먹으려고 가져다 둔 비타민 통을 몇 알 먹지도 못하고 시간이 지나 그대로 버린 적도 있다. 나는 꼼짝없이 교실에 붙박이처럼 박혀 수업 하고,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다친 아이에게 약을 발라주고, 생활지도를 하고, 때로 혼내기도 하고, 하교 후면 보충 지도를 하고, 숙제 안 해 온 아이들의 숙제 검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들과 관계된 이런저런 연락을 하거나 받고, 수업 준비를 하고, 업무 처리를 하고, 채점을 하고, 검사를 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중간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그 모든 일들을 제 시간에 끝내지 못할까봐 혼자서 안달복달한다. 그러니 웬만하면 참게 된다. 퇴근 시간 딱 맞춰 초등학생인 아이를 데리러 가야하는 엄마라서 퇴근 이후의 시간은 나만의 것이 아니니까.
최근 몸 이곳 저곳 작은 이상들이 생기면서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생각하게 됐다. 내 몸 내가 잘 돌봐야지 생각하게 됐다. 왜 지난 날의 나는 어쩌다 그런 이상한 생각에 빠지게 됐을까. 도통 모르겠다. 일단 바쁘니까 그 바쁨만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하고, 멈춰 서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그냥 그렇게 사는 건 줄 알고 관성에 의해 계속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공동체의 행복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이야기는 하면서도 나는 왜 내 행복을 돌볼 줄 모르나, 이제야 비로소 멈춰서서 한 번 생각해본다. 나는 희생이 가장 위대한 가치라고 생각하나? 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게 교사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허상의 모델인 건가? 부족한 내 능력치를 그렇게라도 채우고 싶은 이상한 보상심리인 건가?
질문이 시작되었으니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답은 얻을 수 있겠지. 그리고 답을 얻지 못하는 때에라도 그렇게 살지 않도록 노력만은 하고 있어야겠다. 벌써 아주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선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교사로서 살아가려면 바꾸어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둔해서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지금 멈춰 서서 돌아보니 이런 방식으로는 교사로서 '잘'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나는 나를 돌보겠다. 그리고, 나를 돌보는 시선과 온도로 아이들을 돌보겠다. 그것이 더 건강한 사랑일 것이라고 감히 힘주어 나에게 말을 건네본다.
2021. 11. 20.
약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물론 여전한 부분도 있지만 꽤 많은 게 바뀌었다. 첫째, 출근 전과 잠들기 전 나를 위한 시간을 확보했다. 둘째, 업무에 몰입하는 날과 육아 시간을 쓰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날로 나누어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한다. 심리적으로는, 육아 시간을 쓰는 나를 마뜩잖게 보지 않고 기특하게 생각한다. 업무를 할 때에는 완벽보다 실행에 초점을 맞춘다. 셋째, 모든 것을 다 하려고 욕심내지 않고 학년과 학급 특성에 맞게 그 해 내가 집중할 세 가지를 정해 힘을 줘야 할 영역과 힘을 빼야 할 영역을 적절히 조절한다. 힘을 빼서 저장한 에너지로는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는 중이다. 적고 보니 장족의 발전이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