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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속 버려진 기억 하나.

3강 과제

by 연하일휘

종이들이 채운 공간은 사그락거리는 소리 아래에 특유의 향을 품고 있었다. 먼지 냄새가 뒤섞인 달착지근한 향은 빳빳한 새 종이 위로도 내려앉아,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와 뒤섞였다. 나는 그 사이를 거니는 것을 좋아했다. 책등에 손끝을 얹어, 종이가 마찰되며 내뱉는 작은 소리는 기분 좋게 귀를 간질였다. 무심하게 낱장을 넘기다 한 글귀에 시선이 멈출 때면,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글을 읽어 내려갔다. 탁, 책이 닫히는 경쾌한 소리는 마음이 급해지게 만들었다. 다시 그 글귀를 마주하고 싶어 다급히 좋아하는 공간을 빠져나오곤 했었다.


친구들과 탁 트인 길을 웃음소리로 채우며 하교를 했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예외였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른 작별인사를 하고 홀로 도서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었다. 친구와 함께 도서관을 찾을 때면,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었다. 함께 가자는 제안에 친구는 고개를 젓거나 혹은 함께 도서관에 들어서도 몇 권의 책을 휘적이듯 펼쳐보다 금세 흥미를 잃고 재촉하곤 했었다. 친밀함 속에서도 서로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 나는 책 사이에 혼자 서 있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한 친구의 책이 덮였다. 도서관 갈 거야? 친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교 3학년,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쉬는 시간의 행동이 나와 비슷했다. 교과서를 덮고, 서랍에서 꺼낸 책 한 권을 펼쳐 조용히 파고들었다. 가끔 서로의 책이 덮이는 시기가 비슷할 때면, 함께 도서관을 향했었다. 우리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었다. 한 분야의 책에 푹 빠져있던 친구와 그때마다 와닿는 문장을 손에 쥐는 나, 서로의 취향이 달라 평범한 대화들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우리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서고에 들어서면 자기만의 공간으로 향했다. 책더미 사이에서 눈길을 끄는 책을 손에 쥐었을 때면, 재촉대신 입구에서 서로를 조용히 기다리곤 했었다. 입구에 서서 책을 훑는 서로에게 가볍게 고마움의 표현을 하며 도서관을 나섰다. 우리는 친구라기보다는 마치 함께 도서관을 가기 위한 동료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 친구의 손에 가장 자주 쥐어져 있던 책의 제목은 '칼의 노래'였다. 이미 해진 책의 표지는 금세라도 너덜거릴 듯했지만, 조심스러운 친구의 손길 안에서 그 내용만은 언제나 온전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그 책을 자주 빌리네? 나의 질문에 책의 한 구절을 이야기하며 대답했다. 그 문장을 읽을 때면, 늘 가슴이 두근거려- 이순신 장군에게 빠져든 것인지, 혹은 그 책 자체에 빠져든 것인지. 그 짧은 대화 속에서도 친구의 눈은 반짝였다.


1년의 시간 동안 함께 하던 인연은 졸업과 동시에 끝이 났다. 우리는 서로의 번호도, 사는 곳도 모르는 채 짧은 인사말로 작별을 고했다. 어른이 되어, 다시 그 도서관을 들렀다. 군데마다 칠이 벗겨져, 책들이 세워졌던 갈색의 낡은 책장은 이젠 하얗고 맨들한 책장으로 바뀌었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조명 덕분에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하던 그 공간도 인위적인 빛으로 그늘들이 지워졌다. 먼지 쌓인 책의 냄새들도 낯선 종이의 냄새들로 바뀌었다. 어릴 적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 더 이상 없었다.


책 사이를 거닐다, 익숙한 표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속으로 조용히 한 문장을 읽는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새로워진 공간 속에,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친구의 목소리만 남았다. 글귀 하나가 조용히 그 기억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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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강의 과제입니다.



[메인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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