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울증 발병 2년째 되는 2000년 11월.
내 머릿속 생각과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꺼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서툰 끄적임으로는 십 분의 일도 표현되지 않았다.
꼴라쥬로 시작했다. 잡지를 구해 가위로 오리고 붙였다.
형식을 보면,
모두 직사각형. 하나도 겹치지 않는다.
텍스트까지도 잡지에서 오려 붙였다.
날짜 외에는 직접적인 터치가 없다.
사진 조각 하나하나 다~ 영역을 지켜주고 싶었다.
타인의 눈에는 약간의 강박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주제는
어떤 의미라든가 왜 붙인다 하는 의도가 없었다.
직관적으로 이 느낌이야~ 싶은 것들을 붙였다.
현실감이 돌아오고 조울에 대한 병식이 생긴 상태였다.
그래서, 무너진 자아와 일상의 회복이 간절했다.
* 양극성 장애(조울증)는 조증 삽화와 우울증 삽화를 보이는 질환으로, 기분 장애의 일종이다. 삽화는 증상이 계속 지속되지 않고, 일정 기간 나타나고 호전되기를 반복하는 패턴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유병율 1% - 출처 : 서울아산병원
2) 다음 날 아침,
그 자리에 앉아 몰입 상태를 유지했다.
내면으로 조금 더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물론, 이때 잘 판단해야 한다.
억압된 감정이 크면 큰 파도에 휩쓸리듯
갑자기 열리는 무의식에 압도당할 수 있다.
그래서 병리적인 증상이 있거나
트라우마에 가까운 경험과 기억이 있다면
초기 1년은 치료사와 주 1회씩 진행하기를 권한다.
결과물을 보면,
기록, 연결, 대화, 이동, 속도에 관한 사진들이다.
카메라, 창문, 낡은 의자와 한옥 문.
탁구 경기 중 작전을 공유하는 선수들
짐을 싣고 이동하는 사람과 나는 새도 있다.
작업하는 동안에는 읽히지 않았지만
회복에 대한 열망이 보인다.
3) 그다음 날, 외부 일정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포장한 초록색 리본이 맘에 들었다.
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붙였다.
이렇게 첫 번째 셀프테라피는 3일 동안 진행했다.
1) 2002.5.15 크로키북과 크레용
눈감고 마음의 움직임을 느껴보면
어느 순간 피융~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다.
가만히 넋 놓고 있다가는 낭패를 본다.
내 안에 초식 공룡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발작 버튼이 눌려지는 조건과 패턴을 알아내야 했다.
2) 2010년 즈음에도 미술치료사로 활동했다.
내담자와 상담이 끝나면 혼자서 작업을 더 했다.
페르소나와 셀프
밖으로는 춤을 전수하는 할머니였고,
안으로는 뱃속에 있는 아기였다.
당시 나의 내면에는 갈등하는 자아가 2개 있었다.
고집 센 어린 동생과 철든 착한 언니.
이드와 초자아라 할 수도 있고,
감정과 이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수틀리면 휙~ 하고 멋대로 틀어버리는 동생이
스트레스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튀어나왔다.
기세로 밀어붙이는 동생 자아를 다루기 위해서는
언니 자아에게 힘을 실어줘야 했다.
상황을 마주하고 합리성을 키웠다.
논리적으로, 근거를 찾고, 깊이 호흡하고..
'자살'이라는 단어가 일상 저변에 깔려 있을 때
도서관에 가서 죽음에 대한 책을 쌓아놓고 읽은 후
나름대로 죽음을 개념화하고 고리에서 빠져나온 건
착한 언니가 제 역할을 잘 해준 덕이다.
물론, 번아웃 될 때까지 견디다가 터지는
착한 언니의 그림자인 미련함도 있기는 하다.
이때는 옆에 있는 동생이 푹푹 한숨 쉬며 속 터져한다.
암튼 그림을 보면,
페르소나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상위 자아는 깨어날 준비하고 있었다.
종결과 시작이 겹치는 지점에 있었다.
3) 2024년 가장 최근에 그린 그림.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지러운 난화와 위아래로 직선을 그리다가
내 안의 화산이 폭발하듯 올라왔다.
파괴적이진 않았다.
오색풍선처럼, 꽃처럼 솟아나
둥근 곡선을 그리며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1) 이 작업을 했던 시기나 주제는 기록이 없다.
대략 2000년대 초반이지 싶다.
꼴라쥬 할 때 패션 잡지나 인테리어 잡지도 좋지만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이 좋아서 중고로 구입했었다.
내용은 고대 유물의 흔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빨간 사인펜으로 그린 네모와
파란 파스텔로 그린 화살표가 대비된다.
어떤 구역이 열리고 무언가 올라오는 듯하다.
형식은 가위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찢어 붙였다.
그리기 도구들도 자유롭게 사용했다.
핵심 메세지에 집중했고, 재료의 경계는 약해졌다.
2) 내가 서 있는 곳.
옆으로 지나가는 슈퍼, 식당, 세탁소..
눈에 보이는 공간은 수년전과 똑같지만
나만 어딘가 모르게 달라졌다.
매일 걷던 거리가 낯설었다.
이인증을 겪었던 시기가 있었다.
조울증과 마찬가지로 이인증이라는 단어도 몰랐다.
증상을 먼저 경험하고 나서 찾아보니 이인증이었다.
일상 사진에서 내 몸만 오려내어
다른 사진에 붙여 놓은 것 같았다.
그 몸도 온전히 내 것 같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 이인증이란 자기가 낯설게 느껴지거나 자기로부터 분리, 소외된 느낌을 경험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지각하는 데에 이상이 생긴 상태를 가리킨다. 유병율 2.4% - 출처 서울대학교 병원
3) 2007.4.3 화요일
지하철을 타면 마주 앉은 시선들이
머물 곳을 찾아 겉돌다가 스친다.
내 마음이 내려앉은 지점까지 와서 닿은 눈은
아이러니하게도 부랑자들의 눈이었다.
쓰레기까지 배낭가방에 쑤셔 넣는 할머니
자신의 모습을 알지만 멈추지 못하셨다.
낡은 비닐 뭉치도 나름의 필요와 의미가 있어서
그분들에게는 쓰레기가 아니었다.
놓지 못한 것은 자식인가요, 젊음인가요, 사랑인가요.
코너에 몰려 난타 당하는 복서처럼
창문 틈 사이에 갇혀버린 나비처럼
상실을 이겨내지 못한 마음들이 머물러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부랑자들이 무섭지 않았다.
다른 트랙에 서 있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안쓰러움으로
나를 대했다.
사람들은 몸을 통해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내면은 각자 자기만의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
Q1. '무의식'이라는 주제는 어떻게 접근하나요?
A1 무의식은 억지로 끌어내려는 순간 도망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의식을 그린다"라고 직접적으로 주제를 제시하기보다는 눈을 감고 몇 분간 깊이 호흡하고 '손이 가는 대로 흔적을 남겨보세요'라는 표현을 더 자주 씁니다.
혼자 작업을 하신다면 처음에는 꿈을 기록하고 도형으로 메모해보세요. 단순한 선, 색, 도형 같은 기본 요소로 시작해 보세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잘 그리려는 의도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감정과 생각의 무의식적 흔적이 자연스럽게 화면 위에 드러납니다. 점을 하나 찍어도 그림입니다.
그림이나 꼴라쥬를 완성하고 나면 작품을 방 한가운데 놓고 한 바퀴 걸어보세요. 공간에 그림을 그리듯 손을 들어 동작으로 그림을 따라 해도 좋습니다. 지금까지 언어로는 다루지 못한 주제를 과정과 결과물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Q2. '무의식 그리기'는 어떤 분들에게 추천하나요?
A2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자신의 반응이 때로는 낯설고 통제가 안되며, 이해가 잘 안 되는 분들. 감정의 스펙트럼이 좁고 감정표현이 단조로운 분들. 내적 동기가 충돌하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또한, 반복되는 불안과 불면, 이유 없는 우울감처럼 뚜렷한 원인을 찾기 어려운 분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귀문이 열렸다 싶은 경험이 있거나 비슷한 얘기를 듣는 사람에게도 권합니다. 기운을 걷어내고 흩어진 나를 재구성해야 하는데 시작은 '몸 인식하기'부터입니다. 펜을 쥐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두 발로 걷고 꼭꼭 씹어 삼키고..
반대로, 심한 트라우마나 현재 정신과적 위기 상황에 있는 분은 반드시 전문가와 함께 진행해야 합니다. 무의식은 때때로 수압이 쎈 물줄기처럼 터져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한 환경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Q3. 이 기법은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나요?
A3 첫째,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감정과 욕구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정 대상과 갈등이 있을 때 거친 선이나 색으로 표현하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고, 양가감정을 볼 수 있으며 갈등의 이면에 한 걸음 다가갈 수도 있습니다.
둘째, 심리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말보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감정이 해소되어 자신과 감정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이 거리가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조절할 힘을 키워줍니다.
셋째, 무의식의 이미지를 꾸준히 기록하면 자기 이해의 지도가 만들어집니다. 이는 정기적으로 지속하면 자존감 회복과 자기 신뢰 강화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 그리기는 ‘잘 그린 그림’을 남기는 작업이 아니라, ‘나도 몰랐던 나’와 무의식을 만나고 돌보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