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로 이사를 간 나의 베스트알코올프렌드가 귀섬을 한 까닭에 오랜만에 코가 삐뚤어지게_추위 탓일 수도_ 마시고 그만큼 배 터지게 먹은 어제의 나를 약간만 반성하며 가볍게 집 정리를 하고 겨울의 한가운데를 용감히 뚫고 근처 스타벅스로 왔다.
벌써 올해도 얼추 한 달이 흘렀다.
연초의 결심들도 얼추 잘 지켜지고 있다. 얼추.
그 결심들 중 어제의 만남을 포함해 가족 이외의 사람은 4명 만났으니, 사람을 적게 만나자는 ‘참 잘했어요!’ 도장을 꽝하고 받을 수 있을 듯하고 쓰다가 밀려버린 지출 내역서를 정리해 봐야 정확하겠지만 절제하는 돈쓰기도 ‘잘했어요.~' 정도는 될 듯하다.
그럼 무엇이 ‘얼추’라는 단어를 붙일 수밖에 없게 했나?
아무래도 건강 부분이다.
거의 매일 마신 술은 어쩔 수 없다 치고, 평일의 절제된 식생활과 주 1회 정도의 식도락으로 건강과 미용, 그리고 재정까지 토끼해에 발맞추어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나의 삶의 지침이 영~ 지켜지지 않는다.
평일의 절제된 식생활이야 주로 삶은 계란과 과일, 조금 술이 과한 뒤의 밥 없는 해장국 정도로 정해 놓고 있는데, 잘 지키다가도 일주일에 꼭 한 번은 그놈의 떡볶이가 끼어들어 버린다.
딸아이에게떡볶이를 해주다가 그 맵삭 하고 달큼한 냄새에
‘국물에 계란만 하나 찍어 먹을까.’
‘어묵만 하나 먹을까.’
‘떡 몇 개만....’
으로 가게 마련.
엄마를 닮은 것이라곤 떡볶이를 좋아하는 것밖에 없는 딸이기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떡볶이 주문이 들어오기에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도 이 경우엔 알코올에 이성이 잠식되지 않은 상태라 좀 낫다.
주말의 식도락을 즐기는 때는, 너무도 당연히 함께 하게 되는 음주의 정도는 딱 樂의 크기에 비례하기 마련인데, 그렇게 한 달 만에 즐기게 된 삼겹살과 소주의 기름기 좔좔 흐르는 기쁨, 허름한 포장마차에서의 곰장어와 소맥의 낭만, 벼르고 별러 맞이한 이 겨울의 굴구이가 주는 만족 속을 헤매다니다 보면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만취.
그리곤 즐거운 그 만취의 끝엔 어김없이 배달앱 속에서 신전, 엽기, 죠스 등의 단어를 찾아 떠돌아다니곤 하는 것이다.
가끔 실패하기도 하지만, 일요일 혹은 월요일 아침, 숙취와의 동침에서 일어나 보면 먹다 남은 떡볶이가 나를 비웃듯 맞이해 준다.
이런 굴레 속에선 떡볶이를 차마 식도락의 주인공으로 모실 순 없게 돼버리니, 떡볶이를 향한 나의 광적인 갈망은 해소될 길이 없다.
다음 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아내어,
단 하루에 살이 2~3킬로그램쯤 찌는 매직도 감수하고
주말의 식도락의 주인공으로 모셔 질릴 때까지 먹어볼까 생각도 해보지만,
자신이 없다!
떡볶이에 질릴 자신이.
인생에 있어 행복이란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사람은 먹어야 사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먹는 즐거움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순간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다고(떡볶이 빼고) 느껴졌을 때, 난 내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의 큰요소가 사라질 수도 있음을 직감했고 행복의 왕도인 ‘희소성의 법칙’을 빠르게 도입했다.
그렇게 행복을 지켜내고자 제한과 절제를 통해 먹는 기쁨의 극대화를 선택했건만, 결국 그 모든 먹는 즐거움의 끝엔 떡볶이가 있을 뿐이라니.
좀 허무하다.
그리고,
참 많이 다행이다!
나의 식도락의 끝이 최고급 푸아그라에 송로버섯을 곁들이고, 캐비어를 후식으로 먹는 것이 아닌 떡볶이라서.
온갖 사치를 부려도 2만 원을 넘기지 않는 행복이라니!
출근해 한창 일할 시간에 카페에 앉아 한가로이 떡볶이를 생각할 수 있는 작금의 백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준 일등 공신은 공부를 하지 않아 학원비가 필요 없던 아이들과, 결국엔떡볶이로회귀하는 나의 식도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