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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5, 스승의 하루

성실한 스승은 오늘도 너희 덕분에 웃는다

by 청년 클레어

어제, 주일 아침 일어나자마다 화들짝 놀랐다. 교회 가려면 최소 7시 10분에는 집에서 나서야 하는데, 눈을 떴는데 딱 7시 10분이었다. 물론 택시를 타는 방법도 있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머리가 핑핑 돌며, 택시를 탈까, 여자로서 나의 위신을 포기할까 선택의 기로에 섰었다.


전날 천재네 집 가서 현미밥으로 저녁 요리해 주고 설거지한 후, 귀가했던 터였다. 연일 야간인 데다 토요일에 내내 일만 했다. 그리 하고도 직장뿐 아니라 교회, 스터디카페 등 한 주간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새벽 1시까지 일을 했다.


보통은 밤 11시 전후면 잠을 자는데, 그날따라 무슨 미련이 생겼던지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며 똥고집으로 취침 시간을 미뤘다. 저번 주중에도 네, 다섯 시간 잤던 날이 많아 피로가 누적되어 있기도 했다.


택시를 탄다 해도 무리였다. 원래는 이틀에 한번 머리를 감는데, 토요일에 일이 많다 하여 은근슬쩍 주일에 머리 감을 생각이었다. 머리를 감고 말리려면 최소 20-30분은 더 잡아야 했다. 택시를 안 탄다면 5분 안에 빨리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야 했다. 이 모든 생각을 진짜 30초 안에 빛의 속도로 셈을 하고 있었다.


결국 여자의 위신을 버리기로 했다. 그 버스는 30분마다 한대가 오기 때문에 5분 안에 나가야 했다. 그래, 머리는 당연히 안 감고 세수도 실은 안 하고 잘 때 입었던 반팔티 그대로, 오로지 치마와 자킷만 새로 걸치고 해당 고속버스 정류장까지 택시를 불렀다.


택시에서, 가방에 급하게 던져 넣은 선크림을 꺼내 얼굴에 바르고 아이라인을 그리려던 차에, 그만 깜장 선이 빗나갔다. 에이, 아이라인 패스! 다행히 전날 피곤해서 아이라인 전용 클렌징을 안 하고 대충 얼굴만 클렌징 크림으로 세수하고 잤던 터라, 희미한 아이라인이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전부터 생각한건데, 눈썹은 몰라도 아이라인은 차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닌 것이다. 다음으론 선크림 바른 얼굴에 에어쿠션을 톡톡 두둘겨, 난리난 쌩얼을 면피용 화장으로 대충 수습했다.


택시 기사님도 승객이 서둘러 가는 것을 알았던지, 몇 시 차냐고 물었고 다행히 버스 출발 3분 전에 도착했다.



어머니 지병 때문에 교회 가는 날도 대부분 마스크를 끼고 있던지라,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갔다 오면 혹여 면역력이 약한 어머니에게 감기라도 옮길까 봐, 사계절 내내 거이 마스크를 끼는 편이다.


이제 문제는, 이 몰골이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 장성한 여자가 5분 만에 외출 준비를 마친다는 것은 상상초월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동네 마트를 가더라도 옷매무새와 눈가의 눈곱이라도 확인하고 가야 할 터이다.


허나 선택은 했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걍 오전 몇 시간만 이 위기를 잘 나면 될 일이다, 자신을 진정시키며 조용한 버스 안에서 아침 기도를 드렸다. 교회까지는 장장 1시간이 넘는 거리라, 회개 기도부터 이 정신없는 루틴에 대한 자기 성찰, 중보 기도까지 그 와중에도 새벽기도의 루틴을 빼먹진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란 이렇듯 어수선한 날에도 깨어있어야 하는 법인게다.


참, 전에는 매주 짝꿍 천재와 예배를 드렸는데, 짝꿍네 집이 우리 교회에서 1시간 30분 거리라, 한 달 한두 번만 우리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나머지는 천재네 동네에서 드리도록 하고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규모가 커서 대예배는 아는 사람 아무도 안 만나고 무사히 잘 드렸다.





이래 봬도 클레어는 주일학교 교사이므로, 아이들 예배실로 갔다.


예배 전에는 교역자분들 포함 부서 모든 선생님들이 정신이 없다. 서로 말을 건넬 여유가 없이 예배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오늘따라 이 대목이 '호재'란 생각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든든했다.


부서 예배실에 들어가서 교사복 갈아입고 대략 이러저러 하면 이슈 없이 잘 지나가겠다 생각했다. 간혹 아이들이 놀릴지 몰라도 오늘은 2부 순서가 전체 행사라 아이들은 나를 유심히 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리 계산하고 조신하게 부서 예배실로 들어섰다.


근데 저 멀리서, 때마침 아니 그날따라 목사님께서 내 쪽으로 오시는 게 아닌가. 보통 목사님은 설교를 하시게 되면 예배 전에 반교사와는 대화를 할 소재나 시간이 거의 없으시다. 근데 내가 부서 OO 담당자다 보니 그날 해결해야 할 모종의 이슈가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때마침'을 눈빛에 가득 담아 내쪽으로 날렵하게 다가오셨다. 실은 목사님이 다가오셔도 그다지 걱정은 없었다. 남자 목회자분들은 여자 외모나 변화에 무심할 것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섬세한 여자 선생님들의 샤프한 인사말이 걱정될 뿐이었다.


근데 목사님께서 다가오시더니 일 얘기하기 전에 쑥스러우셨던지 뭔가 덕담처럼 한마디를 하는시는게 아닌가.


"오, 선생님 근데 오늘따라 화장이 달라진 것 같아요. 어, 헤어스타일도 바뀌셨네요?"


쾌활하다 못해 천진무구하신 목사님의 말씀은 담백하고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추호도 이 상황을 이상하게 의심하지 않고 스타일의 변화로 보시는 듯했다. 마스크를 낀 탓에 뭔가 외모의 변화를 분절되이 인식하시는 것도 같았다.


헌데, 정신 없는 날의 복병은 의외로 외부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아무 생각 없는 말들이 순식간에 튀어나와 버렸다.


"아.. 목.. 사.. 님.. 제가 실은 세수를 못 했어요. 머리도 못 감고.. 제가 털털해서 그다지 멋을 내는 스타일이 아니라, 호호호"


나란 여자도 참, 그냥 네~ 하고 지나가면 될 것을 굳이 커밍아웃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오지랖도, 투머취 토크도 아니고 어느 행성의 화법인지 말이다.


도리어 덕담이라고 말씀을 꺼내신 목사님이 순간 당황하셨다.


"어... 전 스타일이 정말 바뀐 줄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때론 하얀 거짓말과 까만 거짓말의 경계에서 많은 충돌과 격동을 감수해야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때문이였을까. 한 종교인은 이날 하얀 거짓말이나 묵비권이 아닌 괜한 진실의 깃발을 교회 복도에서 언어로 꽂고 말았다.


난 살짝 앞머리가 있다. 애교 머리처럼 말이다. 근데 이날 잠을 어떻게 잤던지, 앞머리가 양 옆으로 붙어 버렸던 것이다. 2 대 8 비율만 됐어도 깻잎 머리인양 그냥 지나갔을 것을, 5대 5 비율로 양옆으로 눌어붙은 앞머리는 3일째 안 감아 떡진듯한 주변머리와 어우러져 정말 가관이었다.


이런 5대 5면 좋았으련만, 여기서 앞머리가 양옆으로 깻잎처럼 붙은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물론 내 외모는 이런 20대가 아닌 40대의 중후함까지 담고 있다.



예배 끝나고 아이들 2부 순서 때, 교사 후 모임은 줄행랑을 치듯 도망 나올 공산이었다. 어머니가 가끔 편찮으시기도 하고 반 친구들 아우팅(주일학교 교사가 가끔 사비로 맛난 거 사주는 일)할 때면 (사전에 말씀드리고) 교사 후 모임은 빠지기도 하기에 이 시나리오는 적절했다. 그래 2부 순서까지 끝나고 얼렁뚱땅 아니 소리소문 없이 어디에 말도 않고 무거운 비상계단 문을 열어젖히고 계단을 향해 아래로 빨리 내리 달았다.


그렇게 탈출 아닌 탈출을 무사히 하고 한층 아래로 내려오자 안도의 마음이 들어왔다.


동시에 예배드리는 서너 시간 사이 스터디카페에 무슨 이슈는 없었는가 뜬금없이 궁금했다. 순간 핸드폰을 열어 스터디카페 관리자 메뉴와 냉난방 원격 장치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내 등뒤 아니 윗머리에서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OO 선생님~"


앗! 전도사님이셨다.


통상 전도사님은 예배를 마치면 교사 후 모임에 들어가신다. 가끔 교사모임 때 자료 가지려 건물 상부층의 교역자실을 다녀오실 일은 있으나 멀쩡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오실 일은 없으시다. 전혀 없을 일이었다. 게다가 전도사님이 이쪽 비상계단을 쓰시다니, 엉클어진 탈출 성공에 적이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오~ 전도사님 안녕하세요!"


나중에 알았는데, 그 순간 전도사님의 동선은 기이하게도 나랑 동일한 1층이었던 것이다.


수초 이내 발 빠르신 전도사님이 내 옆에 와계셨다. 교역자분들은 축지법을 훈련받으시는 게 아닌가 가끔 생각한다. 내가 조금 뭔가 생각하고 있다 싶으면 이미 옆에 와 계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비상계단이 성인 어른 2명도 버거울 정도로 폭이 좁다는 데 있었다. 순간 속으로 외쳤다.


'앗! 내 머리 냄새'


그렇다, 예배 전에는 모두 정신이 없다 하더라도 예배 후는 아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게다가 환풍도 잘 안 될 좁은 비상계단이라니, 순간 자신이 원래 냄새나는 여자로 몰릴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래, 전도사님이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도 스스로를 변호한답시고 말했다. 즉 그날따라 5대 5로 떡진 머리와 확인할 길 없는 아이라인과 대충 한 선크림과 에어쿠션의 작품을 떠올리며, 얼떨결에 묻지도 않은 셀프 변호를 속사포처럼 읊조렸다.


"아, 제가 어제 일이 많아서 늦게 자서, 오늘 늦게 일어나 머리도 못 감고.. 제가 좀 털털해요...ㅠㅠ"


게다가, 그날따라 설교 말씀 주제가 다음날 주일예배인데 이에 방해되는 일들은 끊어야 한다였는데, 혹여 허튼짓 하다 늦게 잤다 오해 받을까봐, 마스크 아래로 일그러지듯 당황한 마음에 거듭 헛소리들을 허공으로 날라댔다.


사실 주일학교 교사를 하지 않는다면, 이런 날은 대예배를 다음 타임으로 드리면 된다. 허나, 난 주일학교 교사이고 떡진 머리를 숨기려 주일학교 부서예배를 빠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클레어는, 지금 교회에서만 주일학교 교사는 10년 넘게 했고 도합 수십 년을 한결 같이 주일학교 교사를 했던 것 같다. 추석이나 설날 지방 내려가거나 교사방학 외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개근을 지켰는데, 그 사이 이런 류의 일은 가끔씩 벌어지곤 했다.


다행히 전도사님도 급하게 일 보러 가던 길이였던지, 내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웃음으로 응대하며 특유의 축지법으로 나보다 먼저 1층에 도착해서 가셨다.


다음 주에 뵙자는 인사를 드리고 나도 1층 로비문을 향해 총총걸음으로 뛰어나왔다.





저번주는 스승의 주일이었다. 주일 우리 반 아이들이 깨알 같은 손편지와 선물들을 한 아름 가져다가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스승의 날이라고 이거 저거 챙겨 왔는데, 이걸 받는 게 맞나 싶었다. 학교에선 교권이 무너졌다 탄식하며 이젠 스승의 날도 어머니들 눈치 때문인지 선물 안 받는 학교들도 있다하니 참 삭막한 이야기다. 교회에서야 비싼 선물, 대가성 선물이란 개념은 없으니 그러려니 넘어갔다.



선물중 인상적인 아이템은 나를 모델로 만든 케이크 선물이었다. 솜씨도 수준급이었지만 그 케이크를 만드는데 쏟은 노력과 시간, 비용을 생각건대 나조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정성이라 송구한 마음마저 들었다.



또 하나는, 부모님의 돈이 일절 개입되지 않은 듯 보이는, 오롯이 본인 용돈과 자원으로 포장해서 보내온 간식꾸러미 선물이었다. 먹는 것을 유독 좋아하는 친구인데, 얼핏 보기에 본인이 먹으려고 쟁여둔 간식을 허심탄회하게 선생님 선물로 쾌척한 듯했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 앞에서 어리바리해서 가끔 실수도 하고 간혹 난감한 상황에서는 감정이 어수선해질 때도 있었다. 이 아이들을 2년째 섬기고 있는데, 우리 반은 특이하게 재작년 2년간 가르치고 졸업시킨 언니들의 동생이 2명이나 포함돼 있다. 한 친구는 어머니가 간청해서 동생을 일부러 받은 케이스이고 한 친구는 우연히 같은 반이 되었다.


그중에는 아름이(예명)이란 친구가 있다. 언니가 나랑 주일 아우팅 가서, 엄마랑 오래 기다려야 할 때 너무 부러웠었다고 한다. 우연히 우리 반에 배치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 탄식과 갈증을 들으시고 우연히 우리 반이 된 게 아닐까라며, 서로 까르르 웃기도 했다.


사람들은 주일마다 아니 주일 때문에 멀리 여행도 잘 못 다니고, 노는데 제한을 받는 주일학교 스승의 여정을 안쓰럽게 볼 테지만 말이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 덕에 집콕녀에서 벗어나 매년 못 가본 지역으로 수련회도 가고 소풍도 다닌다.


한 번은 교회 주일학교에서, 놀이공원으로 놀러가서 중학교 이후로 수십 년 동안 안 타본 롤러코스터, 바이킹도 타봤다. 정말 순교하는 줄 알았다. 우리 반 친구 한 명이 너무 타보고 싶어 급기야 눈물까지 터뜨렸던 차였다. 그반 친구들이 유독 놀이기구를 무서워해서 누구도 타려 하지 않아, 결국 내가 그 친구랑 단 둘이 탔었다.


나머지 반 아이들은 바이킹 타고 내려올 때, 내 얼굴이 너무 창백해져서 진심 걱정했다 한다. 롤러코스터 타고 내려온 날은 영혼이 탈탈 털린 것 같다며 놀리기도 하고 낄낄대며 웃다가는 이내 정말 괜찮냐고 걱정을 해주었다.






주일학교 교사는 오늘도, 군인처럼 일어나자마자 5분 만에 외출준비를 마치고 나와 떡진 머리로 반나절을 세상 이곳저곳을 휩쓸고 다녔다.


그날 저녁 천재를 만나 이 이야기를 하자 대뜸 한다는 말이 이랬다.


"어쩐지, 오늘따라 조커 같더라고 ㅋㅋㅋ"


남자의 언어에 강단이 생긴 이유가 있다. 요근래 화장실 막힘을 2번이나 스스로 해결한 쾌거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는 듯하다. (참고글 : 우주적 유머의 남자)


그는 몇 년 전부터 당뇨와 고혈압 전단계라, 내가 열심히 관리해 주었더니 혈압은 아주 정상수치가 되었고 당도 132로 양호해졌다. 그 사이 우리 사이엔 천재 어록이 넘쳐나는데, 언제 지면으로 이 남자의 사는 법도 한번 공유하겠다.


근데 천재가 나를 두고 조커를 논하면 안 되지 않는가? 왕년에 최양락과 톰 크루즈 주제의 본인 버전만 할까. 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시면 아래 글을 살펴보길 바란다.


스승의 하루는 고래로 고초가 많은 길이다. 그럼에도 이 길은 행복한 길이다. 우리 주일학교 친구들아 지금처럼 파릇파릇 아름답게 성장해서, 너희도 나중에 다음 세대의 제2의 스승이 되길 기대한다.




https://brunch.co.kr/@kimmiracle/172















별책 부록. 스승의 날 고사리 손이 건네준 선물과 편지들



우리 반 아이들이 자신들을 이리 표현했다.
편지 동봉도 이리 정성스럽게 해서 주었다. 서양 고전 영화에 나오는 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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