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단톡방에 행복의 샘물이 흐를 수 있었던 비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24-25)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든 사람 사는 곳에는 조용히 때론 소란스럽게 말이 많다. 누군 듣기를 많이 하고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귀 2개, 입 1개라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때로 경청을 잘 하는 사람들조차 실은 자기 말을 켜켜이 쌓아놓고 샤우팅 할 데 없어 마음이 곪아가곤 한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늘 희희낙낙하고 심각한 다툼엔 거이 휘말리지 않는 평안을 신비로워하는 것 같다. 일례로 수십 년 직장생활 동안 누구와 심각하게 다툰 일이 거의 없다. 두세 번 작은 논쟁이 있었다면 그 조차 그에 인격 미숙이나 질시의 수준이었으니 다퉜다기보다 당했고 이내 털어냈다 할 것이다.
며칠 전 셋째 언니가 어머니 간병 관련해서 소소한 답답증을 토로했다. 즉 언니는 일을 굉장히 야무지게 숙련되게 잘 하는 사람인데, 다른 언니들은 그렇지 못한 것에 소소한 트러블이 있었나 보다. 게다가 셋째 언니가 지금은 많이 온유해졌으나 좀 다혈질이다.
우리 집안의 성격인자는 극단의 두 유전인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곤 한다. 술 마시면 돌변하는 다혈질 아버지와 성인군자와 같이 온유가 하늘을 찌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그 유전인자는 7남매에게 다양하게 배분되었다. 오빠는 거이 엄마 유전자를 몰빵으로 받아 그 역시 성인군자 계통으로 나아가고 있다. 남동생은 좀 아빠 성격이 과반이다. 큰언니, 셋째 언니, 넷째 언니는 반반 받은 것 같은데, 상황이 안 좋으면 아빠 성격이 나온다. 둘째 언니와 나는 20% 아버지 성격이 숨어있다 화가 나면 올라오곤 했는데, 나이 들수록 그것도 점점 소멸되어 조금씩 엄마 계열로 편입되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거 뭐 참는 일이 많아지는 게, 어느 때는 내가 글로벌 호구가 된 느낌도 든다. 물론 나는 소소한 일들은 무던하고 무디어서 대충 넘어가고 신경 끄며 살곤 하나, 가끔은 저 심연에 꼬깃꼬깃 접어 놓았던 아버지의 울화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이 말이다.
저번주가 그랬다. 주변에서 뜯어말릴 정도로 내가 희생하고 손해 봐도, 누군가를 회복시키고 살릴 수 있다면 신기할 정도로 전혀 피해의식이 없는 나다. 허나,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지점에 맞닥뜨리니 순간 현타가 왔다. 넷째 언니와 조카네 집(참고글 :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0) 이모, 죽고 싶어요)에 또 이슈가 생겨 저번달 5월에만 900만 원 현금 생돈을 거기에 쏟아부어 도와주었다.
오빠네(참고글 :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1) 어느 흙수저 장남의 꺾이지 않는 인생,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2)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통기타로 직장생활 평정한 사원)는 아직도 수원 아파트가 안 팔려, 자금이 묶여있는 데다 올케언니네 병원도 매출이 조금 준 듯해서 도와줄 여력이 안 되었다. 실은 조카 학군 때문에 반포 원베일리 아파트로 무리하게 이사 가면서 그때부터 자금출처는 내가 되었다. 수원아파트 14억에 팔면 원베일리 대출 14억을 갚을 생각이었는데, 2년 가까이 이리 안 팔릴 줄이야.
나 혼자만 살겠다 하면 재정이고 감정이고 힘들 일이 1도 없는 인생인데, 7남매 가족에 심지어 9명의 조카, 최근엔 교회 친구 20대 두 아들까지 케어하느라, 이건 내가 성직자도 아니고 대모도 아닌데 뭐 하는가 싶었다.
물론 조카는 2-3년 전 자살충동에서 건져냈고 넷째 언니도 비슷한 증상에서 살려냈다. 친구 큰아들은 5년 가까이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데, 내가 스터디카페 아르바이트 명분으로 케어하면서 180도 바뀌었다고 다니는 교회 교역자, 집사님들이 칭찬을 한다 하니 이 또한 보람이다. 친구 작은 아들은 재수하는데, 그 역시 나 만나 생기가 회복돼 무기력에서 점점 벗어나 새벽에도 파닥파닥 일어나 우리 스카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하고 있다. 독거어르신 할머니도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종종 말씀하신다. 내 짝꿍 천재도 비슷한 말을 한다.
물론 나 때문에 벼랑 끝에서 살아난 사람이 여러명인 것을 도리어 황송하게 감사하다. 허나 저번달 또다시 갑자기 벼락 맞듯이 재정에 구멍이 생겨 내 카드결제도 겨우겨우 해야 하는 판이 되니 마음이 어려웠다. 나 자신에게는 검약하며 돈을 아껴 쓰는 사람인데라며 말이다.
그러던 중 어제 큐티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속에서 조금씩 울화가 올라오려는 나 자신을 직면하게 됐다. 평정심을 잘 유지하고 화도 잘 안 나는 나이건만, 나의 화를 돋우는 세상에 마음으로나마 발길질을 해대고 있는 자신을 말이다. 아니 실은 그런 감정의 엉킴 속에서 최근엔 조카와 친구 아들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쓴소리를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인간관계에서의 평화와 화목도 그렇다. 본성상 죄성이 가득한 인간들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화목할 수 있겠는가. 내 장래의 안위를 잠시 미뤄두고 재정적 부담을 떠안으며, 조카들이 용돈 떨어져 힘들어 하면 몰래 몇 십만 원 입금해 주고, 친구 아들들이 취업이나 공부로 좌절하니 스터디카페 알바라는 명분으로 실은 시세의 3배의 용돈을 만들어서 주고 있는 형국이다.
올해 상반기도 어머니는 저혈당쇼크, A형 독감, 이번 주는 가벼운 요로감염으로 올해만 응급실을 6-7번 넘게 가셨다. 그때마다 병원비는 대부분 내가 부담하고 있다. 오빠는 종종 일부를 도와주고 있다.
"돈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영적인 질서를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구현하며 살고자 했던 것인데, 그러니 우리 가족들은 어머니 간병으로 인한 신경전이나 다툼이 현저히 적다. 다툼은 과반이 돈문제일 텐데 이 문제로 일절 잡음을 없애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물주로서 '자기의'나 '친절의 폭력성'-선의를 베푸는 이들이 은근히 부리는 갑질, 언어폭력-이 생기지 않토록 주의하려 한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영적인 질서, 우선순위 대로 인생을 살려다 보니, 내가 돈을 과하게 부담하는 구조가 됐다. 5월 병원비와 간병비만 400-500만 원이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돈보단 24시간 어머니를 간병하는 언니들의 수고를 더 안쓰럽게 보며 나보다 더 고생한다 생각하니 요구하는 마음이나 피해의식은 전혀 없다.
가끔 나의 생각회로, 마음회로가 피해의식이나 공로의식이 아닌 죄인의 은혜로 수렴되는 것에 나조차 놀라곤 한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용서받은 은혜를 삶의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누리는 사람임을 절감한다. 주변 사람들은 상당수 나를 인간적인 형통의 관점에서 복덩이라 하는데, 그보단 내 내면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이 세팅해 주신 마음회로가 더큰 복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최근 지나가는 어떤 글이 인상에 남았다.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진짜 운이 좋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로또 당첨처럼 큰 행운과 좋은 일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나쁜 일이 안 생기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일정 부분 동의 한다. 여기에 보태 진짜 운이 좋은 사람들은 나쁜 일을 만나도 그것을 절호의 기회- 나로 치면 사람들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로 보는 이들일 것이다. 무엇보다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미션(사명)으로 받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누가, 어떤 일이 해를 끼칠 것이며 그 행복과 평안을 무엇이, 누가 빼앗을 수 있을까.
단, 진짜 운이 좋은 사람이 더불어 새겨야 하는 것은, 그 마음의 해석에 비례해서 남다른 수고, 손해, 희생을 감수할 근육과 실력을 잘 훈련하고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투고 삶이 고통의 아수라장이 되는 것은, 실은 서로 덜 수고하고 덜 손해 보고 덜 마음고생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라'라고 아예 명령했다. 마음의 평안을 추구한다고 험하고 궂은 일들을 피해 억대 재벌 만나 궁궐 사모님이 되려 하는가? 그 사모님은 바로 그곳에서 도리어 고통의 감옥을 직면할 것이다.
대학 때 멘토는 자주 이지고잉 라이프(easygoing life) 곧 쉽고 편한 삶을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 대학생들이, 인간들이 병들고 불행해지는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이다. 오늘 내가 만난 그 누군가의 얼굴이 어둡다면, 내가 속한 가족이나 커뮤니티가 어둡고 심지어 다툼이 휩싸였다면, 그것은 다른 누구 탓도 아닌 내가 아직 한 알의 밀알로 덜 썩고자 했기 때문이다.
죽으면 썩어버릴 몸 뭘 그리 아끼며, 죽으면 가져가지 못할 돈 뭘 그리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쌓아놓으려 하는가.
그냥 푹~ 썩어버린 밀알은 "복으로" 진리가 주는 참자유와 내면에서 샘솟는 평안을 일상적으로 누리게 된다.
짝꿍 천재와 내 삶의 루틴 중 한 장면이다. 나는 회사 출근하면 늘 이렇게 천재에게 카톡으로 보고 한다. 그럼 펭수를 좋아하는 천재는 그날마다 재밌는 이모티콘을 날린다. 이런 유머와 위트에 질세라 나는 더 웃긴 이모티콘을 날린다.
어머니가 연초 독감으로 몸무게 5kg 빠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요즘은 죽은 물론 밥도 세끼 잘 드시고 계시다. 이 단톡방 내용은 그렇게 어머니가 혼자서 하는 영역이 많아지고 심지어 치매초기였는데, 기억력도 전보다 더 좋아진 상황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다.
한 여자 조카는 최근 잠깐 아르바이트를 쉬고 있어 용돈이 아쉬워, 그 전주에 20만 원을 몰래 송금해 주었다. 이날 그 친구도 두 번째로 퀴즈를 맞혀 2만 원을 추가로 거머쥐었다. 1등으로 정답을 맞힌 여자 조카는 작년에 진로 문제로 우울증까지 와 울고불고 했었는데, 지금은 적성에 맞는 직업을 만나 만족하며 다니고 있다. 면접 보러 다닐 때, 내가 몰래 5만 원, 10만 원 입금해 주었고 그게 큰 힘이 됐다 한다.
세 번째는 우리 큰언니, 내 깜짝 퀴즈에 몇 번 당첨금을 챙겼던 퀴즈 매니아이시다. 깜짝 퀴즈의 묘미는 스피드! 늘 깨어 있어야 이 당첨금을 챙길 수 있다.
당첨자가 많아 앞에 2명만 주어 아쉽지만 기분은 좋다. 물론 이 날 내 통장잔고는 아래 큐티의 여러 이슈로 실은 몇 십만 원에 불과했으나 통 크게 쏘았다. 근데 놀랍게도 얼마잖아 이 복스러운 통장은 또 한 번 신기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잔고를 채워주셨다.
오늘도 내일도 굿데이(Good Day)!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할 때
가족들의 좋은 날은
유효기간이 길어진다
본 큐티는 어제 근무시간 전에 진짜 초피드로 썼던지라, 문학적으로 보지 마시고 심정적으로 봐주세요. 퇴고가 많이 부족해요 :)
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2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3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6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8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9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시편 102:1-9)
세상을 살면서 종종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나의 부르짖음'은 늘 있으나 제대로 아니 정확히 표효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알 수 있는 내 깊은 심연의 부르짖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현저히 돌아가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제대로 드러나지도 잘 구현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죄 때문인지, 인간은 자기 내면의 고통에 대해서 제대로 고르고 올려 탄원하는데 서툽니다. 그래 내 부르짖음은 자꾸 내 내면 깊숙이 비집고 들어가 황망한 얼굴을 수그린 채 쭈그리고 앉아 기운 빠진 모습으로 있곤 합니다.
간혹 나를 포함한 인간들의 부르짖음은 끽해야 타인을 향한 질타와 원망, 적의와 반감 등 왜곡된 형식으로 부유하곤 합니다.
그럴 때면, 상대방 사람들은 이를 고통에 대한 탄원이나 부르짖음으로 듣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대부분 그의 인격이나 감정상태로 인식하고 나아가 발신자가 어떤 행태를 보였는가 품평하기 바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 내 마음을 토로하고 시원하게 샤우팅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혁신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인간처럼 수신자 오류도 없습니다. 내가 ‘아’ 하고 말해도 ‘어’ 하고 제대로 이해하시는 놀랍고도 신비한 변환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나의 고통을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때론 탄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더 우선해서 또 근본적으로 우리의 고통에 대해선 그 부르짖음의 퍼스트 수신자는 오직 하나님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은 내가 얼마나 답답한지, 불안한지, 의기소침했는지, 마음이 상했지만, 황망하고 막막한지, 버겁고 슬픈지, 상처받고 무너지는지, 얼마다 두려운지, 얼마나 이 모든 것에 고통이 사무치는지 토로하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혈연관계, 오래된 친구라도 타인의 부르짖음을 제대로 알아듣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 자신들의 부르짖음과 섞여서 도리어 왜곡하고 딴지와 역풍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마음이 못 뗀 사람들은 타인에 고통의 부르짖음을 악용하여 사기를 치고 더 상처 주고 괴롭힙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요즘 속이 속이 아닌 나 자신의 진짜 속내를 들여다 봅니다. 넷째 언니네는 5월에도 내가 900만 원 변제를 도와줄 수밖에 없는 일이 터졌고 OO은 그 와중에 자기 돈이지만 1850만원짜리 OO을 사고야 말았습니다. OO은 사치가 심한 사람은 아니나 한번 필이 꽂히면 언젠가는 사고야 마는데, 이것도 몇 개월을 참다가 구매한 것이지만 타이밍상 아쉬웠습니다.
5월 언니네 때문에 아니 덕분에 빠듯해진 재정과 직장 업무 관련 성사여부의 일상적인 긴장감, 폭주하는 직장일, 집안일, 짝꿍네 집안일과 연구소 행정일, 교회 봉사 등등 한시도 쉼을 누릴 수 없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다시금 조금씩 방전과 탈진감이 들었습니다. 급기야 스터디카페 사장인 조카와 스터디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내 친구 아들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똑같은 실책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MZ세대 안일한 청춘들이 급 고구마처럼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가령 친구네 큰아들은 집안이 어려운데, 돈이 없어 감기에 걸려도 병원을 안 가면서 툭하면 스타벅스 커피를 사서 그걸 일터에 갖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집은 기초수급에 빚이 많아 어머니는 매달을 어떻게 살지 막막한데 말입니다. 게다가 스카에서 자판기로 판매하는 다른 브랜드 커피를 본인이 팔아야 하는 입장인데도 말입니다. 두세번 그러길래 웃으면서 돈 아끼자고 얘기했는데, 이번주 월요일에 또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처럼 초등학교때부터 철이 일찍 들기 바라는 건 욕심이라지만 참 혀를 내두르게 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안일함과 자기중심성. 그러다가도 다음 순간 그렇게라도 당충전과 폼생폼사로 자기만의 스트레스를 풀고 자아를 충전하려나 보다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3명 청년들이 참 탈도 많고 말도 많지만 심성이 착한 것에 도리어 감사했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통해서, 이런 날에 내 부르짖음을 인간보단 하나님께 우선 아뢰야 한다고 다시금 환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중략)
제가 언제나 최고의 하나님께 내 속내를 부르짖으므로 사람들에게 왜곡되게 전달되는 감정 배설을 주의하고 절제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때마다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