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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말씀 시점

말씀 품평보단 한 가지 실천을 하자

by 청년 클레어

중학교 2학년때인가, 요즘도 가끔 기억에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수요일인가, 점심시간마다 신우회처럼 학교 내에 찬양모임이 있었다. 그때는 한국교회 부흥기라 교회밖 직장이나 학교 등에서도 평일 소그룹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중학교에서 기독교인 선생님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모임 같았다.


그 시절, 6학년 봄에 정식으로 교회 나가기 시작했고 은혜로 중학교 2학년때인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터였다. 믿음이 생기던 때였기에 뭐든 걸신들린 듯 듣고 배우고 익히고 싶은 때였다. 동시에 초신자 특유의 까막귀 때문인지 설교 말씀들은 외계어처럼 귀에 박히지 않고 슝~ 통과할 때가 많았다.


당시 중학교 찬양모임 때도 그랬다. 전문 성직자도 아닌 학교 선생님들이 애를 쓴다는 점에서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전하는 말씀들이 잘 와닿지 않아 애를 쓰는 시간이었다. 짧은 설교뒤에 이어질 찬양시간의 멜로디가 더 기다려지던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 보는 한 남자 선생님이 단상에 올라와 의례히 이어지는 짧은 설교말씀을 전해 주셨다. 근데 선생님 발음이 좀 샜고 어눌한 느낌이었다. 속으로, 오늘도 졸지 말고 참아야지,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선생님은 말할 때면 입 주변에 침이 고이고 발음은 더 어눌해지까지 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이 선생님이 전하는 말씀들이 발음의 유려함 여부를 초월하여, 번개처럼 귀에 속속 박히는 것이었다. 그날은 좌우에 날 선 검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절절하게 전해 주셨는데, 그때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선생님은 정말 성경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있구나. 말씀을 자의로 해석한 게 아니라 정말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셨구나. 말씀의 정곡을 찔러 주시는 게, 어디서도 듣기 어려운 지점을 일러주시는구나'


이 생각은 빛의 속도로 나의 뇌를 관통했다. 말씀이 달고 오묘하다는 게 이런 건가 그때까지 들어온 어떤 말씀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움을 자아냈다. 겉모습은 옷차림부터 정말 초라할 정도로 행색이 부족한 노총각 선생님, 말할 때마다 입에 침이 고이는지 튀기는지, 폼이 안 나는 모습이었데 말이다. 이 깡마른 노총각 선생님이 말씀을 전하실 땐, 어린 내가 듣기에도 뭔가 절박함과 권위가 느껴졌다.


이날의 경험은 오래도록 잔상을 남겼다. 의식과 무의식 속에, 나도 말씀을 진짜 사랑하고 경외하며 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 후 대학교 때,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말씀을 배울 때도, 이때의 감탄을 다시금 경험할 수 있었다. 지역교회와 선교단체들은 동일한 기독교이지만 좀 분위기나 훈련강도,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서 온도차가 있었다. 선교단체들은 태반 선교사나 전문 사역자, 강하게 훈련된 평신도를 세우는 공동체이다 보니 군대로 보면 특공대 같았다.


10년 전엔가 내가 몸 담았던 지역교회 청년부 목사님이, 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지체들에게, 나를 두고 '보통 자매가 아니에요. 특공대 출신이에요'라고 말씀하셨던 일화가 일례이다. 당시 목사님도 내가 어느 선교단체 출신인지 또 이미 함께 일하며 겪어보시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전, 이사하기 전에 잠시 다녔던 집근처 교회에선, 매일 새벽 6시 큐티모임을 주일도 빠지지 않고 목사님이 오시기 전 5시에 매일 가서 간식과 방석등을 세팅하기도 했다. 무려 걸어서 20분 거리 교회였는데 말이다. 지금 다니는 교회 부서 선배님들이나 지인들도, 너니깐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지, 너니깐 그 사람들을 케어할 수 있지 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육적인 교만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교만해질까 봐 늘 조심 조심 하곤 했다.


그래서일까. 선교단체 나오고 지역교회로 다시 돌아왔을 때, 나의 최대의 기도제목 중 하나는 "귀가 겸손한 사람이 되게 도와주세요. 어떤 주님의 종이 말씀을 전하시더라도 꼭 한 가지 배우게 하시고 실천하게 도와주세요."였다. 동시에 가끔 불신자들이 조롱하듯 '기독교인은 말쟁이들'이란 얘기를 듣지 않으려고, 그 말씀을 들으면 말을 잘하거나 자기 능력을 떠벌리는데 쓰기보단 삶에서 조용히 한 가지를 실천하는데 집중하고 싶었다. 그것이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며 성장과 성숙의 지렛대라 생각했다.




이런 조심성엔 작은 서사가 있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가 전도한 교회에 다녔었는데, 그 교회는 다 좋았는데 몇 가지 나쁜 문화가 있었다.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 설교들을 품평하고 순위를 매기는 느낌이랄까. 그런 분위기는 실은 지금 교회에서 아주 가끔씩 목도해서 깜짝 놀라곤 한다. 내가 선교단체에서 배운 바로는, 이처럼 교만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즘 교회 성도들은 거리낌 없이 설교쇼핑, 설교 품평을 하는 것을 보며, 무슨 화를 입으려고 저리 경외심이 없는가 우려가 생기곤 한다. 그런 태도는 실은 하나님께 대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친한 분들일 경우엔, 미운털이 박힐지라도 설교를 평가하고 교역자를 비교하는 일은 덕이 안 된다는 말씀을 대놓고 여러 번 했었다. 물론 난, 뒷담화도 질색팔색하기에 내가 들어가면 그런 류의 주제는 슬그머니 들어가곤 한다. 직장에서도 동일하다.


헌데, 반대로 말씀을 전하는 분들을 볼 때도 두려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학식과 정교함이 있냐 없냐, 준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경 말씀의 해석을 받는 사람인가, 말씀을 이용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느냐의 문제였다. 이 한 끗 차이는 실로 엄청난 거리이다. 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심지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자신의 자의적 생각과 뜻을 은근히 섞는 작위적인 해석과 전파 부분은 실은 중대한 교만이고 불경이다. 교역자끼리, 강단에서 말씀으로 싸우는 교회들도 있다 들었다. 심지어 말씀으로 특정 성도를 공격하는 교역자도 말이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책망을 대언하는 것과 사사로이 공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양상이다. 당연히, 이 애매하고도 예민한 부분에 대해선 어디서도 실명을 언급하며 말한 적은 없다. 그저 기도의 골방에서 불경함에 대해서 혹독하게 다루어 달라고 중보 할 따름이었다.



말씀의 원 화자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하는 뜻을 개이치 않고, 인간적으로 자기 감정, 뜻을 관철하려고 말씀에 사사로움의 가라지를 섞는 것은 엄중한 죄이기 때문이다. 말씀 앞에서 그 사람의 자세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더 확실하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아무리 청산유수처럼 말씀을 잘 전해도 그의 신앙, 그의 인격은 결국 말씀을 대하는 자세에서 궁극적으로 맞물려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래전 어느 교회에선 목사님에게 들이받는 한 전도사님이 계셨다 한다. 성도들은 그분이 설교강단에 서면 좀 염려가 되었다. 그 전도사님은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아서, 말씀은 잘 전하시는 것 같은데, 꼭 누군가를 타깃으로 공격하는 뉘앙스가 저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목사님은 인격이 훈훈하고 넉넉했는데, 이제 막 신학생이 된 전도사님은 직장으로 치면 자기 상사인 목사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듯 자행자지했다. 그때도 어느 누구에게도 이를 말하지 않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이 전도사님을 깨닫게 도와달라고, 능력 있는 사람, 야심가가 되기보단 바로 위 목사님을 세워드리고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다음 해인가, 다른 교회로 가신 그 전도사님은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실지. 또 그 전도사님의 모습이 혹여 나에게는 없는가 지금껏 반면교사가 되어 주신다.





70-80년대 일부 동네 교회 등에선, 교역자의 제왕적 권위가 유행하듯 자란 적이 있었다 한다. 그래서 설교 강단에서, 목사님에게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 헌금을 안 내면 징계를 받는다는 식으로, 말씀의 한 부분만 강조하면서 위협적 권위를 세우려 했다. 심지어 성도들을 겁박하려는 모습도 가끔 있었다 한다. 물론 이 영적인 원리도 일부는 맞다. 문제는 그날 성경말씀 본문 주제가 전하려는 말씀은 따로 있는데,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편취하듯, 작위적으로 내 의중을 피력하려 도구화하고 다르게 해석해서 몰고 가는 것이다. 심지어 그간 마음에 안 들거나 자신에게 밉보인 사람들을 대놓고 말씀으로 공격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어떤 전도사님은 자기보다 훌륭한 목사님을 견제하고 경쟁하려는 도구로 말씀의 능력을 쓰는 경우도 보았다. 성도들이 알아채지 못할 줄 알았나 보다, 아니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마냥 무의식과 감정을 반영한 것이니, 그 영적 무감각함을 목도함이 우려스러웠다.


물론 강단에서 말씀으로 책망하는 것은 의당 해야 하는 일이다. 다만 그때도 하나님께 간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분별해야 한다. 그래야 말씀에 가라지를 뿌리듯 말씀의 본류를 틀어 사사로이 감정을 실어 강단에서 쏟아내는 일을 경계하고 주의할 수 있다.






중학교 때 경험 이후 말씀을 전하는 화자가 교역자이건 평신도이건, 빈부격차나 지위고하를 보지 않는 습성이 생겼다. 즉 말씀 자체를 오롯이 경외하는 사람이 갖는 말씀의 능력, 권위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류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기도했기 때문인지, 난 말씀을 가까이하고 귀납적 성경공부를 많이 한 사람치고 말씀을 전하는 권위자들을 평가하는 마음이 잘 안 생긴다. 누구보다 말씀을 품평할 예리한 눈을 가졌음에도 말씀을 평가하듯 품평한 적이 거의 없다. 아니 품평 안 하려고 마음에서부터 씨름한다. 물론 말씀에 은혜 받았다는 칭찬과 경의에 찬 단박 한 표현들은 종종 하는데, 이것은 품평이라기보다 칭찬과 세움을 위한 인사치레 같은 일이다.



말씀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영적인 권위가 생긴다. 그것은 말씀을 잘 이해하고 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를 때도 있다. 말씀을 정말 경외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고도 말씀을 그럴듯하게 전할 순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경외심을 갖고 해석하는 사람이며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말씀대로 한 가지라도 실천하고 순종하려는 사람이다.


요즘은 세상이 성경말씀을 인용하기보다 교회가 세속의 책, 드라마나, 엔터테인먼트, SNS 등 세속을 인용하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성령소멸 시대에 청자인 성도와 불신자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 같다. 허나 우려되는 것은 혹여 말씀을 정말 사랑하고 경외하지 않고 가벼이 여기기에 스며 나오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점 때문이다. (이 멘트는 좀 심하다 싶을 테다, 이 부분은 일부러 직설적 쓴소리를 기술한 것이니 누구든 돌을 던져도 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추상적이지 않다. 구름 떠다니듯 하나님을 경외한다, 두려워한다고 무한 반복 말하면 되는 일이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내가 더 소중히, 자주 돼 내는 것, 우선순위에서 선택하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부가 드러난다. 각종 SNS나 미디어 중독, 유튜브 중독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눈높이를 명분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교활한 획책일 수 있다. 실은 이 말은 요즘 나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자기책망이다.


영적인 안일, 세속화, 타협. 누군가는 뒷담화가 아닌 앞담화로 이 주제에 대한 쓴소리를 해야 하는 영역이 아닐까 싶다.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고 참고서로 쉽게 씨름하고 허둥지둥 도파민 예시로 떠돌아다니는 모습. 제왕적 권위로 성도들을 겁박했던 그 어느 시절의 불경함이 아닐지, 이 쓴소리를 반격하지 않고 경청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일부 교회들에선 말씀을 전하며 정치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역시 경솔함이라 생각한다. 모 강단에선 트럼프 대통령을 대놓고 칭찬한 경우도 있다는데, 참 우려스럽다. 누구를 지지하는 게 옳고 그른가 여부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성도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영적인 리스크에 무감각한 것도 수년간 쌓아온 명성으로 상쇄시킬 수 있다는 안일함 때문이 아닐지, 서로 흔들어 깨어주어야 할 시대이다. 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가라지를 뿌리는 일이 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다면 그것은 소자를 실족하는 일로서, 목에 연자 맷돌을 매야 할 일일 수 있다.


이런 주제를 오프라인에서 드러낸 적이 있냐고요? 거의 없다. 다만 골방에서 중보기도할 따름이다. 그저 들을 귀가 있다면, 또 나비효과처럼 이 글 한 장이 나단의 직언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몰래 비밀일기 남기듯 이곳에 살포시 남긴다.











아래는 저번주 큐티말씀을 거이 수정하지 않고 몇 편 그대로 올린다. 나는 글쓰기 연습이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큐티를 수십 년간 하다 보니 글이 조금 늘었다. 글이 길어질테지만 큐티 3편이나 날것으로 인용하는 것은 혹여 큐티를 어떻게 하는지 호기심이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이다. 나도 소싯적에, 선배들의 큐티묵상에 자극을 받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 [생생큐티 1]2025년 7월 3일(목) 내가 한 모든 수고(전도서 2장)


18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19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2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25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도서 2:18-26)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수고의 짐을 짊어지게 됩니다. 마치 중국 화산의 짐꾼처럼 너나없이 각자에게 부여된 노동과 고생을 합니다. 동시에 이 땅에서 생을 마치는 날 그 모든 수고를 그치게 됩니다. 가끔은 이 개인 종말의 날, 수고에서 벗어나는 인간들은 어떤 만감이 교차할까 생각합니다.


호흡에 생기를 달고 태어나 섣불러 내가 종료버튼을 누를 수도 없습니다. 간혹 그런 자들이 보이지만 그것은 최선이 아닌 최악, 차악임을 모두가 공감합니다. 즉 수고의 마감 일자는 피동적으로 부여될 때가 많은데, 오늘 전도서의 저자는 마치 자기 수고의 종료 시점을 직감하고 있는 듯합니다.


수고의 무게를 덜어내는 날 인간은 자유롭겠지만 동시에 자기 인생을 순식간에 복기하며 그 모든 수고가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전도서의 저자가 내뱉는 신음이 마음 찡합니다


18절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를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전도서의 저자는 대부분 솔로몬이라는데 공감합니다. 누구보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느껴지는 위대한 왕이 자신의 모든 수고를 미워할 정도로 허탈해하며 탄식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한 수고의 산물을 죽으면 하나도 가져갈 수 없고 그 뒤에 남겨진 이들이 갖게 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인간은 상당히 착각하는데, 그중에 하나는 열심히 일한 댓가와 소유권이 영원할 듯한 착시입니다. 물론 자식에 물려주는 것도 의미가 있는데, 전도자가 허탈해하는 것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에 대해 심술이 일어나서가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의 생명의 유한함이 가져다주는 유효기간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참생명은 영원함을 안다면 이 자학적 허탈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이라, 생각할 때 느끼는 비애를 전도자는 23절에서 기술합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일평생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의 본질은 ‘슬픔’이라고 토로합니다. 열심히 고민하고 걱정하고 안달복달하는 그 모든 것이 잔잔히 슬픔을 담고 있는 인생은 참 우울합니다.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합니다.


반면에 이런 인생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면 전혀 다른 반전이 있습니다. 26절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도리어 지혜, 지식, 희락을 주시고 게다가 죄인들이 고생해서 모아 쌓은 것을 그 기뻐하는 자들에게 주시기도 합니다.


이런 예는 실은 이 땅에서는 제한적인 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사항되지만 영원으로 확장해서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 허무한 수고가 주는 허탈감과 실망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전도자의 허무함은 뒤집어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주는 도구가 됩니다.


제가 이를 기억하고 매일 닥치는 수고와 고생을 성실히 감당하되 그 안에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잘 분별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ㅡ 하략 ㅡ









●[생생큐티] 2025년 7월 4일(금) 해아래 모든 학대(전도서 3장)


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5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6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전도서 4:1-6)



학대란 몹시 괴롭히거나 가혹하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많은 학대들을 주목하였습니다. 누군가를 괴롭히고 가혹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런 일은 없어야 하고 있더라도 바로 응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학대받는 자는 제때 도움을 못 받을 때가 많아 보였습니다. 아니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위로자가 없다는 것은 극단적인 비약입니다. 하나 전도자는 그 위로의 비율이나 위로자의 수치를 보건대, 학대받는 사람들이나 상황에 비하면 0에 수렴하는 수치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전도자는 권세가 있고 힘이 있는 자들의 학대를 보았습니다. 고래로 부귀영화를 거머쥔 권세자들은 없는 자들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와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을 압제하므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갖고자 했습니다.


이렇듯 위로자가 없는 세상은 학대받는 인생들을 절망케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자기를 불의하게 착취하고 괴롭히는 자들에게 반발할수록 더욱 고통이 가중되는 세상에서 그들을 일방적으로 맞고 당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권세 있는 사람들보다 압제 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법이었습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을 태어나 학대를 경험하고 그 학대의 고통 속에 살다 죽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인생들을 보다 살아있는 것이 재앙이라 생각되었던 거 같습니다.


2절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여으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학대를 받지 않는 자를 포함하는 살아있는 자들의 삶을 일반화해서 재앙을 규명하는 게 맞을까요? 3절에서는 이런 학대받는 자들을 보는 것도 고통이고 재앙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즉 세상에는 학대자, 학대받는 자, 학대받는 자를 보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 모두 그 무기력한 죄성에서 애초부터 저주받는 생명 같아 보입니다.


학대는 죄와 사망권세가 가득한 원죄를 입고 태어난 인간세상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죄 많은 인간들이 또 다른 인간들을 죽이고 괴롭히는 일은 주어진 숙명처럼 당연히 일어나는 일들이기에, 살아있는 한 견뎌내야 합니다.


전도자는 살아서 생명을 살아내는 일엔 기쁨도 있지만 얼마나 많은 죄악, 불의를 견디며 사는지 그 삶을 슬프게 절망합니다. 이 깊은 절망과 회의, 허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될 천국의 위대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오늘 짝꿍과 재미 삼아 유튜브에서 단독주택을 함께 찾아보는데, 문득 이 땅에서 100년을 살 거고 앞으로 50년 전후를 더 살 것인데, 이런 성취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순간 생각되었습니다. ㅡ 중략 ㅡ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여 이 감정은 적실이 진실임과 동시에 더욱 하늘소망을 품고 살아야 당위성을 일깨워 줍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살다 보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 마냥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때마다 다시 만날 주님을 고대하며 현재를 살아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때마다 저를 도우시고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생생큐티] 2025년 7월 5일(토) 삼갈 지어다(전도서 5장)


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전도서 5:1-3)



전도자는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라며 그들의 삶에 루틴이자 일상이 되어 있는 영역을 치고 들어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은 종교사회, 종교공동체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일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 호흡하듯 늘 수행하는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일들이 일상이 된다는 것은 장점과 치명적 약점을 둘 다 갖게 됩니다.


일상이 되면, 익숙해지고 숙련되기도 합니다. 처음보다는 좀 더 편안하게 능숙하게 처리한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동시에 일상이 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형식적이 되기 쉽습니다. 심해지면 본래 취지와 달리 이것에 왜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하게도 됩니다.


'삼가다'는 것은 사전적 정의로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1절의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란 행동은 모순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극심하게 조심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알 때, 인간들이 행하는 언행, 몸가짐, 선택들이 얼마나 무례하고 겁이 없는지 절감하게 됩니다. 근데 그런 하나님을 매일, 매주, 절기마다 편하게 만나게 되면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너무 편하게 일상적으로 대합니다. 조심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허나 이 조심성이라는 것도 잘 생각해 보면, 인간의 죄성으론 달성하기 어려운 미션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조심한다는 것이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이에 대해서 ‘발’과 ‘말’을 조심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발이나 말만 조심하면 된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어쩜 우리 인간의 중간지대에서 우리 조심성의 마지노선이 되는 지점이 발걸음 곧 가는 곳과 언어이기 때문에, 최후 통첩 아니 최소한의 한계치를 지적해 주는 것 같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근데 잘 살펴보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막연하게 또 신앙적 낭만이나 유희적으로 대충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허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구체적이며 실제적으로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말을 발화할 때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그것은 교회에서든 가정이나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걸음 곧 어디를 갈지, 누구를 만날 지부터 어떤 일을 행할지 등 우리의 매일 선택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선택과 우선순위에 대한 매일의 투쟁입니다. 이것이 발걸음을 조심하는 일이라면, 언어를 조심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경외함에 핵심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 제가 얼마나 조심성이 없는 사람인가 절감합니다. 평균적인 수준에서는 말도 아끼는 편이고 행동도 좀 조심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편에서 살펴보면 허점 투성이고 경거망동할 때가 있음을 생각합니다. 최근 마트에서 투명스러운 직원의 불친절에 대해서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무시하듯 내뱉은 말들이 그러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얄밉고 해괴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조심했어야 하는 말, 굳이 내뱉지 않아도 되는 과거의 클레임들도 떠오릅니다.


제가 교회 안에서만 교의적으로 반복하는 하나님 경외가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하는 경외심이 더욱 몸에 배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말을 더욱 조심해서 하고 발걸음을 조심해서 내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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