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공경하는 아이로 키웁시다
< 청년 클레어의 참조글 >
1. 본글에 언급한 CEO채용건을 처음 의뢰 받았던 날을 소재로 쓴 글
https://brunch.co.kr/@kimmiracle/536
2. 인간성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이였음에도 좋은 인성의 어른이 된 친오빠의 서사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1) 어느 흙수저 장남의 꺾이지 않는 인생
https://brunch.co.kr/@kimmiracle/81
3. 노인빈곤을 가까이에서 목도하며 쓴 글
https://brunch.co.kr/@kimmiracle/23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ㅡ 출애굽기 20:12 (십계명 제5계명)ㅡ
이번 주 직장에서 역대급 좋은 소식이 있었다. 동시에 어머니가 화요일에 요로감염으로 다시 입원하셨는데, 입원 후 다음날 코로나에 걸리시기까지 하셨다. 간병하던 셋째 언니도 코로나에 함께 확진되어 나는 졸지에 밀접접촉자가 되었다. 덕분에 회사에 사정을 얘기하고 셀프 격리하며 쪽잠을 자며 거이 밤샘 간병을 하기도 했다. 교회도 진짜 오랜만에 셀프 격리하듯 집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늘 그렇듯 어머니에겐 이번 일도 도리어 복이 되셨다. 어머니는 놀랍게도 현재 573,000원짜리 1인실에 입원해 나름 호화 병원생활을 하고 계신다. 입원 2일 차에 걸리 코로나 덕분으로 코로나 급여가 적용돼 환자가 45,000원 부담하는 조건으로 병원이 배려해 주었다.
맞다! 우리가 요구한 게 아니라 병원에서 적극적으로 1인실로 옮겨 주신 것이다. 요즘 대학병원에 코로나 환자가 많다는데, 그럼에도 다들 1인실 병실이 없어, 대부분 다인실에 그대로 있기 마련인데, 놀랍게도 우리 어머니가 코로나 확진되던 그 즈음엔 1인실이 난 것이다.
여기엔 어머니의 인품도 한몫을 한 것 같다. 이전에도 몇 번 지금 대학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시절 어머니는 '귀여운 할머니'로 통했다고 한다. 간호사들에게 친절하고 뭐라도 챙겨주고 무엇보다 위트 있는 말솜씨 때문이었다.
"나 아파요, 살살 놔줘요"
"(간호사님) 정말 주사도 잘 놔주시네"
게다가 특유의 인자함과 밝음에 간호사들이 좋아했다 한다. 며칠전 혈당 체크하던 간호사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참 귀여운 할머니이신데, 오늘 열이 좀 나서 자꾸 주무시네요.. "
그랬더니 간호사가 예전에 어머니를 봤었던 듯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귀여운 할머니가 흔하지 않은데, 할머니가 그랬었지요"
"오, 저희 어머니를 아세요? ㅎㅎ"
"그럼요!"
어쩜 나비효과처럼, 60만 원을 호가하는 1인실의 특혜는 바람결에 우연처럼 필연처럼 어머니에게 당첨된 게 아닐까. 어머니가 요로감염으로 항생제를 맞게 되면 의례 밤에 섬망이 와서 헛소리를 하곤 하셨기에, 애로사항이 예상되었다.
근데 1인실로 옮긴 덕분에 그 애로사항이 많이 해소되었다. 간병하던 언니의 침대도 편안한 쿠션이 있어서 감사하다. TV에, 화장실, 냉장고까지 다 있는 VIP급 1인실에 입성한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신다. 코로나는 이젠 거이다 나아지는데도, 이 혜택은 다음 주 수요일까지 받게 되었다.
요즘 2030 젊은이들은 일자리 찾기도 어렵고 생계도 어렵다 말하곤 한다. 가끔 청년빈곤에 관한 다큐를 보는데, 그때마다 그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에, 주변의 청년들 가령 조카나 친구 아들, 딸들을 종종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쉬운 것은, 갈수록 희소해지는 <효도>에 대한 공감대와 문화, 가치관이다. 나 힘들고, 나 아프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은 많은데, 우리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도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고뇌하고 마음 아파하는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는 듯하다.
어쩜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에 비해 고생을 덜한 청년들, 젊은 세대들이 겪는 취업난이나 이른바 청년빈곤은 묘하게 중년빈곤, 노인빈곤과 데자뷔를 이루는 듯하다. 어쩜 하늘이 마땅히 풍족해야 할 젊은이들에게 전에 없이 빈곤과 결핍을 허용하셨다면, 그것은 부모와 조부모세대 아니 주변 사람들의 빈곤에 대해 역지사지의 공감대와 인격을 연단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늘의 의중이 이러한데, 우리가 여전히 내 고통과 결핍에만 몰입되어 있다면, 그 빈곤 연단은 종착지를 찾지 못하고 반복되지 않을까, 그런 우려를 느끼곤 한다. 나 살기 힘들지만 더 힘든 가족이나 이웃을 돌아보는 것, 그것이 이 고통스러운 연단, 그 수렁에서 좀더 빨리 졸업하는 길이 아닐까 가끔 사색한다.
특히 30-40대 젊은 부부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좀더 역력히 보게 된다. 자식에 대해서는 애지중지하는 그들이 어쩜 그리도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에게는 무심한지 씁쓸하고 때론 엄중하게 화가 날 때도 있다. 때론 TV 다큐 속에서 계수하는 홀몸노인의 뉴스나 통계치는, 마치 전혀 다른 세상의 무자비한 철면피들의 얘기인 것만 같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자녀나 손주, 손녀는 내 주변 이웃이나 지인으로 너무도 멀쩡하고 상냥하게 살고 있기에, 누가 이른바 불효를 저질렀을까 싶을 정도로,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겉으론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나 먹고 살기 빠듯해 미처 챙기지 못 한, 아니 챙기지 않은 누군가의 부모님이였을 홀몸노인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 안쓰럽고 애잔하다. 종종 길가 스쳐 지나가는 젊은 부모나 청년, 청소년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부모 공경, 어른 공경은 단순히 윤리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이다. 노인빈곤은 비단 극빈층에서만 발생하진 않는다고 한다. 한때는 번듯했던 중산층의 부모님들이 자식들 교육, 결혼 밑천 다 챙겨주고 나아가 손주, 손녀 교육비 염려에 작은 용돈조차 눈치 보며 받는다 한다. 그렇게 노년이 길어지면, 급기야 셀프 부양을 선택해서 홀몸노인이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자녀들 사교육비에는 그리 돈을 아끼지 않는 젊은 사람들, 그들은 과연 부모님들, 조부모님들께는 얼마의 용돈을 드리고 있을까? 아이들이 학교에서 조금만 책망을 들으면 득달 같이 교장실을 찾아가는 부모님들은 과연 얼마나 학교 선생님들을 존중하는 것일까?
내가 봉사모임을 하는 반 아이 중에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있는 아이가 있다. 근데 이 아이는 종종 선생님을 존중할 줄 모른다. 마땅히 선생님이 아이들을 훈육해야 하는 대목에선 말을 가로채고 마치 압살롬처럼 아이들 비위에 맞는 말을 해서 인기를 얻어내려 한다. 한 번은 그런 행동이 옳지 않다고 따끔하게 얘기를 해주었다. 작년에도 아이들이 공동체 지침에 따르지 않고, 여름행사 때는 밤새 떠들어 옆반에 민폐를 끼치는 등 수위를 넘어섰던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선생님이 그런 아이들 비위를 맞추도록 분위를 왜곡하며, 나에게도 책망하듯 푸시하며 아이들의 인기를 가로채 회장놀이를 하곤 했다.
회장놀이든 뭐든 수더분에게 다 포용했고 넉넉하게 받아주었지만, 옆반에 폐를 끼치고 공과시간에도 놀자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래 흔치 않게 했던 책망이었다. 그 후 그 아이는 비위가 거슬렀던 모양이다. 거이 개근하는 아이인데, 그해 스승의 날은 빠졌다. 올해도 비슷했다. 스승인 내게 주는 편지를 썼는데, 집에 두고 왔다며 다음 주에 주겠노라 했는데, 다음 주에 결석했고 결국 주지 않았다. 2년 연속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아이의 비뚤어진 심성이 보였지만 금쪽이를 애지중지하는 어머니들이라 그냥 모르는 듯이 넘어가고 전과 동일하게 대했다.
그런데 몇 주 전 우리 반이 예배시간에 대표기도를 담당하는 주였다. 그 아이는, 자발적으로 자기가 이번엔 대표기도 하겠노라고 하더니, 바로 전날 토요일 오후에 엄마 편에 갑자기 휴가를 와서 예배를 못 온다고 통보를 했다. 맞다! 통보다. 뭔가 고의성이 짙어지는 대목이었다.
전날이라 대표 기도자를 찾지 못해 결국 내가 하고 말았다. 그 아이의 어그러진 인성이 느껴졌다. 작은 초등학생이지만 마치 어른들처럼 권력욕과 인기욕이 느껴졌으나 이번에도 한쪽 눈을 감고 모르는 척했다.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도 무슨 말을 했던지, 내가 우리 어머니가 아프셔서 이러저러하다 얘기를 어머니 단톡방에 했는데도, 모두들 걱정하고 기도하겠노라 하는 분위기에, 그 아이의 어머니만 유일하게 안부는 일절 안 묻고 생뚱맞게 행정적이 질문만 드라이하게 해서 분위기를 싸하게 했다. 아이들은 부모를 80% 이상 닮는다고 하는데, 학교에서 회장을 하고 공부를 좀 하면 뭐 하는가 싶었다.
너무도 평범한 품성으로 느껴지던 어머니도, 자기 아이가 책망 받으면 이렇듯 어그러진 속내를 드러내곤 한다. 강단 설교에서도 책망이 거이 사라진 시대이니 이런 반응은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아이가 왜 책망을 받았는가를 돌아보거나 스스로에게 묻기보다, 아이 말을 듣고 그에 따라 돌변해서 교사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을 보이다니 얼마나 얕은 그릇인가. 안타깝게도 이런 부모님들은 매해 한-두 명 이상은 있다. 내가 평소에 워낙 수더분해서 모르는 척 묻고 갈 뿐이다.
심지어 학생 제자훈련 프로그램 때 6주간 담당교사인 내 문자를 자주 씹기를 밥먹듯이 하는 어머니도 계셨다. 5-6년 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바쁘셔서 그러신가 했다. 그런데 몇 년 후 같은 부서에 신입 교사로 오신 이후론, 너무도 친절한 ㅊㅇ선생님으로 등판하셔서 좀 당황스러웠다. 마치 교회밖에선 무심하고 불친절하고 불신자로 살다가 교회만 오면 친절해지는 어떤 소수의 신앙인들을 보는 듯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분에 대해서도, 이전 일은 전혀 기억하지 않는 사람인양 잘 대해드리곤 있다.
제대로 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일관성 있는 인격에서 드러나는데, 가끔은 씁쓸한 문장을 삶에서 만나곤 한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혈육 있는 부모님조차 공경하지 않고 나 살기 빠듯하다고 현대판 고려장을 행하는 일들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급속한 산업화 발전 때문에 부모세대가 실책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들은 알코올 중독이 폭언, 폭력성으로 또 어머니는 직장일로 무심하거나 예민해서 상처를 주었던 가정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전에 말한 바 있는데, 내 친오빠가 월세보증금 3000만원도 없어 돈 빌려서 신혼을 시작해서, 50대 초중반인 현재 순자산 40억 자산가가 된 것도, 어머니를 일관성 있게 극진히 공경하고 친척 어르신들은 물론 이웃에게도 예를 다하는 어른 공경도 한몫을 했다는 합리적 추정을 하게 된다. 오빠는 사람들에게 예를 다하고 존중하며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려 애쓴다. 사람들이 자주 하는 뒷담화도 거이 하지 않는다.
서두에, (난) 이번 주 직장에서 좋은 소식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헤드헌터로서 CEO 채용건을 진행해서 1건만으로 1.3억 전후의 성과급을 10월-11월 전후로 받게 된다. 대기업 차 부장-이사급의 1년 치 연봉을 한건으로 받는 것이다. C-level 임원을 전문으로 많이 진행하는 헤드헌터는 조용히 활동하기에 일반에겐 잘 알려지지 않아서 이 세계는 가리어져 있다. 나는, 임원급과 팀장급을 주로 하기에 우리 회사 사람들은 대략 아는 스토리이긴 하다.
성과급의 십일조도 정확히 낸다. 다만 1.2억 초과하는 성과급의 십일조는 본교회가 아닌 개척교회나 선교단체에 낸다. 돈이 많아야 아니 어느 정도 돈은 있어야 장로나 순장, 부장 등 직분을 맡는다는 기독교계 저변의 생각에 저항하기 위해서이다. 이 말은 실제로 느끼는 분들에게 여러번 들은 내용이다. 예전엔 틈만 나면 교회 선생님들이나 교역자분들 간식이나 식사도 대접했는데, 요즘은 본교회에서는 이른바 한턱 내기를 절제중이다. 돈이 많아서 인정받고 뭐한다는, 누군가의 열등감과 비교의식, 왜곡과 상처에 배려하기 위한 조치이다. 차라리 교회밖에서는 밥도 더 잘 사고 섬기려 한다.
물론 본건 외에도, 올해 다수의 임원급을 이미 성사한 터이다. 우리 써치펌에서 본 CEO건은 단회건으로 역대급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번 건을 진행하면서 내 힘으로 한게 거이 없다시피, 순풍에 돛 단듯 매끄럽게 성사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일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스토리를 들으면 기적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순적하게 진행되었다.
이 건이 의뢰 오긴 1개월 전엔가, 짝꿍 천재가 조카 일로 자기 돈 2억 정도를 대준 일로 내내 마음이 미안하고 어렵던 터였다. 게다가 위례 근처 아파트를 천재가 사주다 시피해서 내 명의가 된 일도 내내 마음에 남았던 터이다. 천재가 상속재산이 있어 넉넉한 편이나 그럼에도 연인끼리라 좀 미안했고, 올봄에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하나님께 들고나가 하소연하며 기도했다. 그리고 조카도 천재에게 미안해서인지, 이건이 잘 성사되도록 새벽마다 기도했다 한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성사되었고 짝꿍의 돈을 어느 정도 돌려줄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보통 연인관계에서 이런 재정 문제가 얽히면 관계가 어려워진다 하는데, 천재와 나는 사람들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에 있어선 의기투합이 잘 된다. 또 그렇게 누군가를 살리려다 손해를 본 돈들은 이후 놀라운 방법으로 채워주심을 그간에 함께 경험하곤 했다. 즉 하나님께서 명하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이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 본질이다-을 할 때 모든 것을 채워주심을 경험했고 천재도 믿음이 많이 생겼다.
천재는 이번 고액건이 성사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주님께 영광!"이라며 앞으로도 주님만 의지하며 살겠노라고 초신자다운 순수함으로 신앙고백을 했다.
시부모님, 친정어머니, 동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 선생님, 동네 이웃들 등등 어머니는 늘 상냥했고 예와 존중을 다했다. 틈 나는 대로 마음이나 말뿐 아니라 없는 형편에도 물질로도 공경하셨다. 그 어머니는 이젠 며느리도 서울대 나온 의사, 예비 사위인 천재도 해외 유명대 나온 의사요 교수이다. 무학으로 지금도 글도 읽지 못하시고 허드렛일만 했던 분이신데 말이다. 게다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으시다. 늘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인성과 사람됨만 강조하셨다.
어머니의 자녀복은 어쩜 어머니 자신이 부모님을, 동네 어르신들을 내 부모처럼 공경한 것에 대한 순리적인 복이 아닐까, 가끔 상상한다.
자녀가 버젓이 있는데도, 무료급식을 의존해야 하는 빈곤 노인 곧 가난한 어르신들을 생각할 때면 요즘도 마음이 자주 아프다. 내가, 섬기는 독거어르신에게 정성을 다하게 되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복에 눈이 번쩍이며 부러워하고 때론 질시하고 깎아내리면서, 타인의 남모르는 희생과 헌신은 배우려 하지 않는 시대이다. 어그러진 인성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어쩜 하나님께서는 가끔 전혀 엉뚱한 자들에게 육신적인 복을 주시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같은 이들의 민낯을 드러내듯 그들의 탐욕과 이중성, 잔혹한 무자비함과 불손함을 드러내시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살면서 큰 부자 되기를 기도한 적이 없다. 돈을 꾸어줄지언정 꾸이지 않는 정도로 자족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신랑감도, 하나님의 뜻에 맞다면 고졸도 좋다 하기도 했다. 직장일을 하면서도 동료들과 경쟁의식을 갖고 일한 적도 별로 없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동료들을 많이 도와주고 밥도 사주곤 했다. 최근엔 현 직장에서 재능기부하듯 20명이 넘는 동료들에게 업무 노하우를 강의해 주기도 했다. 욕심으로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육신적인 복도 응답받은 것, 단 한 번도 아파트 청약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파트가 물 흐르듯 저절로 생긴 것등 나도 가끔 어리둥절하고 신기하다.
다만 이상할 정도로 내 일이 잘 풀릴 때면, 그건 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하나님의 십계명조차 실천하지 않는 세대에, 오병이어처럼 반어적 시그널을 주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하며 옷깃을 여민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ㅡ 에베소서 6:1–3 ㅡ
https://youtu.be/4NrZHGbAnUo?si=ysFU8blJ-yoNDyMb
https://youtu.be/zz-FNIKCZ3c?si=CxRYsV17e6osdBp5
https://youtu.be/N3pwELmCwAU?si=zt_axqOnah4084Bj
https://youtu.be/zTcL61_Mr4M?si=_39gVQfTPf0FITCf
https://youtu.be/DlF7OZVjDgs?si=iGN27mL2fKb1P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