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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안할 때(17) 수호천사가 하는 일이, 로또?

신을 만나기 좋은 때 = 로또의 때

by 청년 클레어

본글은 써놓은지 거이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불현듯 11월이 넘어가기 전 발행 버튼을 눌러본다.



하나님이 종종 세상에 고통과 수고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 그 심연을 직면하기 힘들어 하기 때문이다. 그 심연은 때로 가족도, 절친한 친구도, 부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봉인 해제되지 않는 구간이다. 심지어 그곳은 자기 자신도 손 대기를 거부하고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는 금단의 영역, 직면을 회피하는 저리고 아픈 판도라의 상자이다. 구역을 통칭해서 '죄'라고 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죄란 비단 가해자(피의자)의 모습으로만 우리 삶에 침잠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때론 내가 절절한 피해자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죄를 짓는다. 죄란 포괄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삶으로서" 하나님을 배제한 마음, 언어, 행동, 선택 등 삶의 모든 영역이 죄의 지배권 안에 들어간다.


일례로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 분노, 살의도 (다소 억울하겠지만) 엄밀하게는 죄가 된다. 그것은 내가 당한 피해의 경중을 떠나, 나 역시 하나님 앞에선 용서받아야 할 죄인인 것을 놓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니,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제할 때, 우리의 감정과 삶은 고삐 뿌린 망아지처럼 내 본능과 자기 중심성, 방종적 자유를 허용하고 인간은 이것을 낭만을 섞어 자유로 오독한다.


나의 삶에 시시비비 간섭하는 듯한 신을 걸러내 버리고 굴복시킨 후, 이내 자기감정 가령 미움, 절망, 불평, 질투, 탐욕을 정당하게 허가해 주기 때문에 얼핏 이것이 자유라 착각한다.


인간의 이런 고집과 자기 중심성, 교만함은 잘 꺾이지 않는다. 아니 직면도 인정도 하기를 격렬하게 거부한다. 하나님조차 억지로 꺾어내지 못하는 영역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인간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었다 뿐이지 인간의 그런 방종 상태를 마냥 방치하지는 않는다.


고통과 수고, 아픔은 이 대목에서 우리 인간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이다. 인간은 아파야만 겸손해진다. 아픔은 재정적 손실, 관계의 틀어짐, 반복되는 실패, 육신과 마음의 병 등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삶을 침범한다. 인간이 겸손하다면 죄로 인해 자초하는 고통과 아픔은 상당히 줄 수 있다. 허나, 육적인 겸손은 그나마 인간계에 가끔은 있으나 영적으로 겸손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되는데, 이게 도통 쉽지 않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인간의 심연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럴듯하게 포장한 인간적인 겸손에도 속지 않으신다. 그 사람이 영적인 겸손의 자리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고 순복(순종)하여 결국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 그 자리까지 이끄신다. 이 인도하심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선, 때론 나치 히틀러의 폭거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다가오기도 한다.





겸손의 상술,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말인데, 인간이 얼마나 뿌리 깊이 교만하고 거짓된지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겸손을 향한 인간들의 동경과 존경. 찬사. 그래서일까 겸손을 아이템으로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종종 아니 자주 생겨난다. 그들은 겸손으로 포장하여 테크니컬 하게 자신을 잘 메이크업한다. 겸손, 그것이 비록 인간적인 겸손일지라도, 겸손은 인류 동지들이 잘 체득하지 못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경지 곧 다수가 겸손하다고 인정하는데 이르면 그 사람에겐 모종의 권력이 생긴다. 호감이다. 모 유명 스타의 말은 이를 반증한다.


"유명해져라. 똥을 싸도 대중은 박수(환호)를 쳐줄 것이다."


이런 맹목성과 무지는 다수 대중심리, 유행, 다수결의 원리와 결탁하여 기형적인 스타, 유명인, 자칭 위인을 양산하기도 한다. 이들은 말년에 아니 후대에 그들을 열광한 타자들의 뒷통수를 치기도 한다.


겸손하면 됐지 왜 이토록 까다롭냐고요? 겸손에 또 겸손을 요구하는 결벽증적 요구 같지만, 이는 인간이 얼마나 뼛속까지 거짓되고 악한지, 그 스스로 온전한 의를 이루기 어려운지를 드러내기 위한 변증이기도 하다.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며 그 자신은 예쁜 여자, 잘 생긴 남자를 만나는 것을 보라. 차라리 본인 스스로 속물이라고 밝히고 납작 엎드려 얼굴을 들지 않는 편이, 인간 동지들에겐 훨씬 더부룩함을 덜 줄 일일 것이다.인간의 내로남불은 이 지점에서 특히나 도드라진다.


내 인생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들은 간증이고 풍성한 열매인데, 타인 인생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들은 표적 찾기고 세상 성공을 추구한다는 시선도 그 예이다. 마치 내가 받는 모든 고통은 욥의 고난으로 격상시키면서도, 타인의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로 보는 형국이랄까. 영적인 내로남불인셈이다.


어쩜 그리도 인간은 허접하게 위선적이고 이중잣대에 인이 박힌 얕디 얕은 존재인가. 인간은 자신만 모르고 모두가 아는 위선과 거짓, 자기 이익에 몰두하는 참으로 교활한 장사꾼이다. 이익이란 비단 돈뿐 아니라 학식, 인기, 명예 등 다양하다.


어쩜, 내가 이타성을 남달리 추구하는 것도, 이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자기 저항이 아닐까 싶다. 기복 신앙을 추구하지 말라면서, 자기 자식만은 명문대 가길 은근히 추구하고 또 대기업 등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간구하는 그 마음을 어찌 다 악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나 내 가족, 자식이) 하나님을 잃느니 (인간적으론 그냥) 폭삭 망하게 해 주세요!"


혹시 이런 기도를 해본 적 있는가? 자기 혈족인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식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한 적이 있는가? 살아보니깐, 진짜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담대하게 할 수 있게 된다. 저주라기보다 하나님을 잃는 것보단 인간적인 것들을 잃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를 바라는 축복인 것이다.


내가 그랬다. 친오빠가 30대 초반에 결혼하고 신혼 때였다. 신앙이 느슨해져 현재 내가 다니는 교회 1부 예배 성가대 봉사하고는 오후에는 셋째 언니 운전기사 노릇하며 이른바 놀러 다녔었다. 그때 아무리 말해도, "셋째 누나가 부탁하는데 어떻게 하냐?"며 합리화만 하는 오빠를 위해서 담대하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자동차가 문제입니다. 저 차가 있어 주일을 온전하게 헌신하기 어렵습니다. 저 차를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 기도를 시작한 지 6개월인가, 1년이 지났을 무렵에 소식이 전해졌다. 오빠가 그 차를 폐차했다는 것이다. 오빠가 당시 교통사고가 다소 크게 나서 차를 폐차했던 것인데, 놀랍게도 오빠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 내가 중보기도를 하긴 했지만 교통사고에 심지어 폐차라니, 그런 시나리오까지 생각지 않았던 터라 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폐차 수준의 교통사고임에도 오빠가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웠다.


오빠는 직장, 교회, 가족들 사이에서 겸손하고 온유하며 인간성이 좋은 사람으로 평판이 좋다. 오빠를 욕하는 사람을 사실상 본적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근데 오빠에겐 그런 칭찬이 독이 되었다. 그 인간적인 겸손 때문에 영적인 교만이 묻히고 자행자지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진짜 두려워하지 않는 말, 행동, 선택은 그가 인간적으로 아무리 겸손을 포장해도 궁극적으로 즉 영적으론 교만하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몇 주 전, 오빠는 그 폐차 사건이 있은지 13~15년 만에, 나의 단호한 기도를 또 한 번 자극했다.


오빠가 반포의 그 유명한 원**에 20억 전세로 살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동시에 한남동에 7억(대출 3억, 현금 4억)에 매입한 다 쓰러져갈 듯한 아담한 2층 단독주택이 재개발지역으로 확정되어 22억 이상으로 시세가 올랐다는 소식은 5년 전의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착하게 살았던 오빠와 돈 없는 집안의 장남을 믿음만 보고 배우자로 선택한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올케 언니에 대한 하늘의 위로로 생각했다.


믿음의 사람이 이리 재테크 하는 게 맞는가 싶다가도, 그리 번돈으로 넷째 언니 제과점 등 차려주고 좋은 일을 하겠다고 오빠 내외는 말하곤 했다. 단, 형편이 풀리면이었다. 실은 오빠가 투자에 골몰하는 스타일도 아닌데, 손만 대면 자산들이 요술 방망이처럼 불어나곤 했던 것이다. 즉 그 나이 남자 직장인들에 비하면 투자에 쏟는 노력은 평균 정도에 불과했다.


지금이야 오빠 부부가 폼생폼사-의사 아내에 서울 반포에 집 있고 아들은 공부 잘하는- 로 잘 나가는 것 같지만, 두 내외는 신혼 때 월세보증금 3000만 원으로 시작했던 가정이라, 늘 영끌 대출로 포도시 집을 사고 손바꿈 이사를 했다. 신혼때 그 월세보증금 3000만 원도 올케언니의 큰언니에게 빌렸다는 후문이다.


그리 악착같이 살았던 오빠네라 그간 오빠의 결정에 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젠 살만해졌으니 수원 아파트 팔리면 현재 원** 전세대출 14억 갚고, 그 후엔 디스크 수술을 5-6차례나 받아 장애진단-사지나 보행은 전혀 멀쩡하나 디스크 때문에 무리한 일을 할 수 없는 수준의 장애-을 받은 넷째 언니를 도와주고 그간 말했던 공약을 이젠 준수하기 바랬다.


그런데 이 부부가 탐욕에 눈이 씌었는지, 안 팔리던 수원 힐**아파트를 올해 5월에 12억-분양가 5.8억로 한때 20억까지 올라감-에 급매로 팔더니, 더 욕심을 내서 올 여름 8월엔 반포에 아크로*** 아파트를 자가로 매입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영끌이다. 이 아파트도 반포에선 유명한 아파트로 국평 매매 시세를 찾아보니 54억이 넘었다.


참고 또 참았으나, 더 이상 이 부부의 늘어나는 탐욕과 위선스러운 가정복음화의 명분을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그날 이 사실을 알고 나는 대노했다. 오빠와 언니의 전화, 카톡 차단으로 엄중한 책망을 보냈다. 아니 나의 이례적인 반응을 보고 경각심을 갖기를 바랬다.


물론 누구는 나보고 아무리 친동생이라도 좀 오버하는 것 아니냐고 할 것이다. 가족이라도 타인의 재산권에 감나라 배나라 하는 것이 선을 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사람이 부를 늘려가는데, 내가 돈 한 푼 대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면, 혹자는 내가 혈족이라 해도 배가 아파서 그러나 싶을 것이다. 허나 셈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시는 섭리를 알기 때문이다. 내가 책망하지 않아 더 탐욕스럽게 살면 하나님이 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는 내버려 두시는 법이 없다. 잠시나마 카톡과 전화 차단은 하나님께 매몰찬 훈련을 받기 전에 예방접종이 포함된 책망이었던 것이다.





그건 오빠 부부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셋째 언니가 유독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핍박했다. 내가 주일에 결혼하지 말라고 했는데 굳이 형부 본가인 부산까지 내려가 그것도 주일에 결혼해, 난 그 결혼식을 불참했다. 형부도 독실한 불교신자를 만났다. 물론 형부는 진짜 성인군자 같이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셋째 언니가 당시 그토록 기독교를 핍박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나를 하나님께 뺏겼다는 피해의식이 박혀 있었던 탓이다. 셋째 언니는, 내 중학교시절 덧니교정 등 나를 위한 지원들을 아끼지 않았다. 이유는 내가 공부를 잘하니 나중에 어른이 되어 성공해서 가정에 재정적으로 기여하기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 들어가자마다 선교단체에 들어가 10년간 독립해서 살며 돈도 안 되는 일만 하고 사니 속이 뒤집어졌던 것이다. 그래 억하심정으로 엇박자를 냈던 것이다.


게다가 셋째 언니는 결혼 후 형부의 연봉이 2-3억대에 이르자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나는 언니 때문에 가정복음화가 막히는 것을 오래 지켜보다 10년 전엔가, 1년 넘게 기도했다. 우리 집이 가난해져도 되니 셋째 언니가 망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이 기도 후 1-2년 만에 놀라운 정확도로 언니는 폭싹 망했다.


나도 잘 몰랐는데, 당시 언니는 아파트 2채 포함해서 6~7채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40-50억대 부동산이었다. 그런데 노량진 일타 강사였던 형부가 온라인 교육사업을 제안한 지인에게 반사기를 당하면서, 이 갭투자의 성공신화는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것이다. 언니는 그 과정에서 부동산을 다 날렸고 형부도 이젠 나이가 많아 남들 은퇴할 나이에도ㅡ 현역에 있지만 벌이가 전만큼 못 해 예전처럼 회복은 어려운듯 하다.



기복 신앙이 아닌 순수한 신앙을 갖고 있다 자부하는가? 내가 본 크리스천들 중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진짜 보기 드물었다. 그는 가난이라는 고통 속에서는 원망으로 그 믿음의 실체를 드러낸다. 반대로 하나님의 넘치는 이른바 삼박자 축복을 받을 때면 마치 자기가 의인이라 인간적인 복을 받은 것 마냥 득이하고 안일해지며, 겉으론 청빈을 구하나 실은 돈과 명예, 명성, 인기를 향한 향방 없는 탐욕을 내며 선을 넘어 차곡차곡 탐욕을 쌓는다.


자신을 살펴볼 때, 후자 곧 인간적인 축복으로 안일해졌다 여겨진다면 단호한 자기 처방은 있다. 고난과 고생을 자초해서 수고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다소 부대낄 정도록 그 부귀영화를 다른 사람을 돕는데 쓰는 것이다.


이른바 유명인이 된 기독교인 중에서 이런 단호함을 견지하고 초심을 지키는 경우는 점점 찾기 어려워진다. 그게 돈이 아니라 유명세, 인기라는 측면에서도 말이다.


인기가 많으면, 자기보다 더 인기 있는 누군가의 유튜브 조회수를 은밀히 찾아보며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을 좇아 기민하고 교활한 장치를 심어 둔다. 사람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것도, 실은 성향이나 성품이 아니라 인기에 중독된 사람들의 특성이다. 이들은 심지어 트렌드도 잘 읽어낸다. 인터넷에 검색이 잘 될 키워드를 찾아내 자기를 돋보이려 한다. 이 은밀한 추구가 숨겨질 줄 아는 그 대목에서, 그 사람의 영적인 안일과 탐욕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인격의 완성체 아니 선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인간들이 듣기 싫어하는 책망을 무섭게 내뱉으셨는데, 어느 성인군자길래 인간들이 듣기 좋아할 소리들만 찾아다니는가. 짖지 못하는 개라는 표현이 있다, 영적인 위험 앞에서 그건 죄라고 책망해야 하는데, 안일한 엘리가 자녀에게 하듯 얼르고 달래기만 하는 것이다.


혈족에게도 구원과 진정한 영적인 복을 위해서 육적인 후패, 망함을 구할 정도이니, 나 자신의 탐욕과 교만이 스물스물 올라오려 할 때는 어떻겠는가?


주님 다시 만날 그날까지, 내가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고 좋아하는 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보다 더 몰입하는 일이 생긴다면, 하나님께서 나라도 제동을 걸어주시고 막아주실 것을 간구한다.


것이 복이고 진정한 영적 로또이기 때문이다.









수호천사가 하는 일은 육신적인 만사형통이 아니다. 혹여 육적인 축복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기여하라고 잠시 맡기신 재료에 불과하다. 죽으면 가져갈 것 하나 없는 이 땅에서, 부에 처하든 빈에 처하든 자족할 수 있는 '참믿음'이 진정한 축복이고 수호천사가 지켜주는 놀라운 재산이다. 아래는 큐티를 그 내용을 담고 있다.



[생생큐티] 2025년 10월 8일(수) 기록된 모든 자의 구원(다니엘 12장)

1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다니엘 12:1-4)

다니엘은 생애 마디마디 쉬운 시절이 없었습니다. 한창 꿈을 펼쳐야 할 청년시기에 조국 남유다는 거대제국 바벨로의 침공을 받아 황폐화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다니엘도 그 당시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예루살렘은 도시 전체가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나중에 바벨론의 국세에 기울어져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번엔 더 강력한 바사 곧 페르시아 제국이 바벨론을 정복하였고 다니엘의 포로생활은 여전했습니다.


다니엘의 사자굴 사건은 바로 이 바사제국 다리오왕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시대는 세상만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게 아니라 인간성마저 자기 한 몸 살고자 타인을 찍어 누르고 빼앗는 시대였기에 더 두렵고 서럽게 애잔했을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성경에선 몇 문장으로 표현하니 간결하지, 실상을 들여다보면 서럽고 두렵고 답답한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으로 일제 45년을 지냈던 때를 떠올려 보건대, 참 암울했지만 우리 민족은 대부분 자기 고향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라도 빼앗기고 가족과 친구, 친지들은 뿔뿔이 흩어져 문화도 다른 타지에서 홀대 받으며 살아야 했던 유능한 청년 다니엘, 그 고통과 암울함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국운이 쇠한 시대,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듯한 세상을 살았기에, 다니엘서를 마무리하는 12장의 첫 문장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1절 a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


미가엘은 하나님의 천사장으로서 큰 군주로도 불립니다. 참고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는 하늘나라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합니다. 미가엘이라는 이름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신앙고백을 담은 이름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명색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이 속절없이 모든 것을 빼앗겨 알거지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흡사 남의 집에 식모살이처럼 갖은 수치와 서러움을 겪고 있는데, 그때에도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호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적 위기로 곤두박질중인데, 큰 군주인 천사장 미가엘이 그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날 것이란 말은 허무맹랑해 보입니다.



이 말은 현재도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전쟁을 치러내며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돌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보호’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 특히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일까요? 인간들은 이에 대해서 사고, 질병, 범죄, 세속화 등 여러 가지를 들것이며 그 반대는 삼박자 축복으로 일컬어지는 재물, 건강, 인간관계의 복 등을 이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삼박자 축복이 하나님의 보호의 표징일까요?


이건 단지 우리 인간의 기호를 반영한 니즈입니다. 하나님편에선 인간들이 이 땅에서 자존심 세우고 덩덩거리고 사는 것은 우선순위기 아닙니다. 다니엘이 포로청년이면서 타국에서도 그 탁월함으로 인정받고 높임 받은 것에만 인간들은 의미를 과대하게 포장하여 극상하거나 때론 폄하합니다.


그런 인간들의 니즈와 별개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섭리와 주권에 따라 누군가를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고 번영을 주기도 하고 감옥에 던져 넣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다만 인간이 약하고 악하여, 풍요 속에서 교만하여 자긍하고 방종하고 타락하는 것이 문제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비뚤어지고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민족 곧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면, 그것은 죄와 사망권세로부터이며 사단과 그 사단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인간, 문화, 세속의 다양한 매체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죄에 인이 박혀 툭하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하던 이스라엘이 매를 맞아서라도 정신이 아니 영이 회복되는 이 일련의 과정은 하나님의 호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1절 하반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을 대구로 받아 쇄기를 박아 줍니다.


1절 c "그때에 네 백성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



인간은 교활하고 야비하며 이중잣대에 능숙한 존재들입니다. 기복신앙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인간적인 복을 강렬하게 추구합니다. 그들은 타인 특히 자신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는 형제, 자매가 인간적인 복을 자꾸 받는 걸 보면 그것을 우선 폄하하고 봅니다. 속내는 하나님께 서운한 것입니다. 그는 삼박자 축복에 맹렬한 갈증을 은밀히 숨겨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복신앙을 어려서부터 냉소적이고 회의적으로 봤던 사람이었던지라, 누가 인간적으로 잘 된다고 그것을 부러워할 순 있지만 비꼬아 보진 않습니다. 반대로 누가 너무 안 됐다고 그것을 호도해서 해석하지도 않습니다.


부귀영화, 흥망성쇠는 인간의 니즈에 따라 호불호가 있을 따름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그 한 사람, 가족, 공동체, 국가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도구로 변모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10년도 더 전에 형부가 반사기로 우리에게 사준 집까지 날려 월세로 나앉았을 때, 세상 쿨하게 옳소이다 그 고난의 때를 감내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담담했습니다. 그것은 최근 직장일이 잭팟을 터트려 1.3억의 성과급을 한 번에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너무 좋아하거나 자긍하기보단 그저 담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들보다 내게 더 많이 무엇인가를 주었다면 ‘나눠 쓰라’는 의미라고 받고 그에 맞게 그 돈들을 다 나눠드리고 도와드리는데, 썼습니다. 그중 일부는 짝꿍이 조카 때문에 쓴 돈을 갚는데 썼고 직장 동료들에게도 한턱을 쏘았습니다.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 우리는 나만의 수호천사를 붙여주시는 하나님을 상상하며 많은 기대를 합니다. 모두에게 내리는 눈, 비의 고난이 나만은 피해 가길 바랍니다. 세상적인 만사형통처럼 손대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리길 기대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자동문 형통을 은밀히 바라는 이들일수록 오히려 그 삶에 태클이 많고 고초가 많아진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택하신 백성이라면 말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며 적극적으로 고난과 수고를 감내하려 할수록 희한하게 자기 고난과 수고는 현격히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위는 우리를 죄와 사망권세에서 건져 구원하며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 정체성을 갖고 사명자로 살도록 성화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누구보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사명을 받고 일생을 살아낸 다니엘을 호위하고 그 민족 이스라엘이 멸망 중에도 실은 그 자체가 호위였음을 생각하며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동시에 나 역시 하나님의 호위를 얼마나 자기 편의적으로 편취하고 싶어 하는가, 편안과 안일, 안주에 기울기 쉬운가 생각합니다.


2절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거이며”


하나님의 호위를 온전히 누리는 승리하는 성도의 표징은, 이 땅에서의 직위나 재물, 형편이 어떠함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이 육체의 종말이 있고 나아가 세상 끝날 심판과 구원이 있음을 늘 각성하고 있는 데 있습니다.


제가 발을 땅에 딛고 매일 바쁜 일상을 살고 있지만 늘 다시 오실 주님을 갈망하며 죄와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세상 가운데서 깨어있으며, 세상을 깨우며 사람을 옳은 대로 이끄는 자, 구원하는데 쓰임 받는 궁극적 소명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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