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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멍에

우린, 삶의 재료를 빚어가는 장인들

by 청년 클레어

남보다 못 한 가족.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다소 야속한 현실에 대한 비약과 단절된 기약의 파편들.


집을 6-7채를 갭투자하다 날려버린 셋째 언니. 결혼 후 내내 도도한 전업주부로 살다가 10년전부터 자영업을 시작했다. 식당 하다가 말아드리시고 프랜차이즈 천연 전자담배 가게를 운영했다. 기독교를 핍박하던 언니의 행색은 처참하게 무너져 벼랑 끝 자존심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 셋째 언니가 올 여름 또 일을 냈다. 10년 가까이 자영업을 하기도 했고 내가 업종을 변경해야 한다, 건강에 안 좋다 하여 몇 년 전부터 가게를 접을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요즘 같은 불경기에 올해까지도 순이익 400만 원 이상을 챙겼으니 마이너스는 아니라는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니는 올해초 가게를 마음 먹고 접고 권리금과 보증금을 손에 들었다. 어머니 간병하면서 소소하게 잡음을 일으켰던 큰언니 대신 셋째 언니가 늦봄부터 4일 간병하며 220만 원을, 넷째 언니가 3일 간병하며 150만 원을 남매들이 주고 있다.


간병비도 오빠와 둘째 언니가 50만 원씩 보태주는 것 외엔 오롯이 내 몫이다. 370만 원 중 270만 원의 간병비와 생활비, 공과금,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매달 175만 원, 병원비까지 매달 500만 원 넘게 들어간다.


연봉이 오를수록 따라 오르는 4대 보험 등을 합치면 700만 원 가까이 들어간다. 허리 경증 장애로 입원중인 넷째언니와 조카 자동차 캐피탈 빚 등 270만원 및 나의 생활비 등 합치면 1400~1600만원이 매달 지출된다.



셋째 언니는 인생내내 호시탐탐 한방을 기대하며 살았다. 그럼에도 최근 10년은 성실하게 자영업을 했던 터였는데, 가게 정리하고 목돈이 들어오니 주식을 취미처럼 하다가는 코인투자도 유행 따라 짬짬이 했었나 보다. 올초엔 그렇게 1500만 원을 벌기도 했다 한다.


그러다 여름엔가 형편 어려운 조카 진국이(포레스트 운남의 잭팟(0) 이모, 죽고 싶어요)와 셋째 언니가 호기를 잡은 듯 5000만 원을 코인에 투자했다. 셋째언니 돈이였고 다른 가족들 몰래 말이다. 그리고 다 날렸다.


셋째 언니는 조카가 감언이설로 투자를 충동해서 그랬다는 뉘앙스를 전했고 이로 인하여 안 그래도 집안에서 미운털이 박힌 조카 진국이는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그 코인투자도 800만 원은 친구에게, 200만 원은 대학원서 석사하며 아르바이트로 돈 모은 딸에게 빌렸단다. 현금서비스 몇백까지 끌어서 그렇게 5000만 원을 탕진한 것이다.


셋째 언니는 종종 넷째 언니를 쥐 잡듯 잡았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언니가 한창 돈이 많을 때, 싱글맘이었던 넷째 언니에게 돈으로, 기회로 도움을 많이 주었던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카가 어려울 때, 사업자금으로 1000만 원도 대주기도 했다. 이번에도 조카가 여자 친구-사업 망해 파혼했던 여자 친구와 다시 잘 만나고 있다. 장로님 딸로 오빠는 서울대 경영학과 나와 올해 빅 5 회계법인에 입사했다-가 결혼을 조르는데, 결혼자금이 없다며, 셋째 언니랑 코인투자해서 돈이 들어오면 일부를 나눠 갖는 방식으로 제안했던 모양이다.


셋째 언니는 가게 정리하고 남은 현금자산을 올인한 셈이다. 과천에 몇 천만 원짜리 (땅의) 지상권과 스몰 모듈주택, 인덕원역 근방에 오피스텔 조그마한 사놓은 것 외엔 재산이 없다.


남자처럼 호방한 셋째 언니가, 자신이 선택한 실책임에도 조카에게 책임을 돌리며 그의 엄마인 넷째 언니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어느 날밤 넷째 언니와 통화하다가는, "내가 죽으면 다 너 때문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새벽 1시에 잠수를 탔다.


강인해 보이는 사람이 술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걱정이 엄습했다. 내 전화는 받는데, 그 새벽 내 전화도 안 받았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112에 신고해서 언니의 위치 파악을 하는데, 경찰은 우선은 직계 가족의 통화가 확보돼야 한다 했다.



언니가 애지중지 아끼는 2명에 딸들의 전화는 받겠지 하며, 그 새벽에 대학 근처에 자취하는 큰 딸에게 전화를 했다. 여자 조카에게 전화해서, 왜 112에 이 새벽에 신고했는지, 곧 경찰에서 전화가 갈 건데, 네가 보호자이고 이러저러하게 응대하라고 팁을 주었다.


형부가 반사기로 개인회생을 하는 과정에서 언니랑은 경제적 분리가 필요해 서류상으론 이혼이나, 중요한 문제는 함께 의논하고 돕는 부부이였다. 언니가 이 문제까지 형부에겐 알리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딸에게만 말했다. 그때까지는, 딸들도 몰랐을 코인투자 사건은 그렇게 전말이 밝혀지고 말았다. 또 넷째 언니의 아들인 진국이 조카가 이 일에도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이에 큰 딸이 언니에게 전화하자 과천 스몰 모듈주택에서 잠 자던 언니는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경찰도 언니를 찾아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그렇게, 그 새벽 라이언 엄마 구하기는 잘 마무리 되었다.


수중에 현금이 없고 도리어 빚이 남은 셋째 언니는, 그 후엔 십수 년 전 큰언니에게 못 받은 돈 500만 원이 떠올랐던지, 큰언니에게 전화해 다짜고짜 (이제라도) 돈을 갚으라며 얼음장을 놓았다 한다.




내 어렸을 때, 강렬한 소망은 "문제 없는 세상에서 조용히 혼자 사는 것"었다. 허나, 아버지의 알코올중독과 폭력이 일시에 잠재워진 그 봄 후에도, 알콜 중독 가정폭력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들 특유의 트라우마는 인생 곳곳에서 드러나곤 했다. 모두는 아니지만, 크고 작은 분노를 억누르며 시한폭탄처럼 갖고 살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끝 간 데 없이 폭발하는 일이 돌출된 돌처럼 뾰족이 일어서곤 했다.


그래, 돈 없이 태어난 달동네 7남매 중 일부는 스펙도, 백도 없는 인생에서 벗어나 갱신하려다, 이내 고위험 고수익 투자에 현혹되곤 했다.





물론 이렇게 가족 안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큰언니, 셋째 언니, 넷째 언니가 95% 이상이었다. 아니 이 언니들이 대부분 문제였다. 3명이 함께 자영업 동업도 했다, 아파트 투자도 같이 했다, 함께 말아 드신 이 3명의 딸들은 참 조용한 날이 없었다. 오빠나 둘째 언니, 남동생, 나는 무던하게 사건 거이 일으키지 않고 우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것에 대변되곤 했다.


싱글맘인 넷째 언니, 이혼한 큰 언니, 집 말아 드신 셋째 언니.


"창피하다..."


어렸을 때, 가족들에게 들키기 싫었던 감정 중 하나는, 바로 내 가족들이 참 창피하고 낯 부끄럽다 여겨졌던 지점이다. 내가 가족들 중 일부를 창피해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까 미안하고 한편으로 억울했다. 그들과 가족으로 매여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풍겨내는 똥물이 내 삶에 튀겨도 오롯이 감내야 한다는 것, 내가 아무리 언니들과 다른 고상한 트랙으로 인생을 살아내도, 내 인생에 똥냄새는 흐릿하게나마 날 것이란 생각에 사춘기때는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었다.


우아한 가족. 어쩜 나에게 있어 로망은 '우아'였던 것 같다. 집에서 도란도란 가정예배 드리며,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지성적인 대화를 나누며. 쌍스러운 단어는 전혀 없는 고아하고 절제된 언어의 소통 속에 호호하하 싱그러운 향기의 저녁을 마무리하는 상큼 장면이, 왜 내겐 주어지지 않았을까. 특히 초등학교 때는 이 생각들이 나의 감정선들을 사정없이 때려 갈기곤 했다. 아팠고 서려웠다, 그 시절 누구도 모를 나의 곪고 눌린 감정은 호흡 끊기기 직전의 옅은 숨으로만 겨우 연명할 따름이었다.


물론 3명의 언니들이 1년 365일 늘 우악스러운 장면만 연출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언니들은 그보다 더 많은 비중으로 동생들을 위해 없는 형편에도 용돈을 짜내, 주말마다 김치부침, 핫도그, 도넛을 만들어 주던 자상한 면이 더 많았다. 매주 토요일이나 주일 새벽 5시면 엄마 대신 동생들을 공중목욕탕에 데려가 떼를 밀어주고 가끔은 우유도 사줬다.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5))


그럼에도, 가족에 대한 기억은 그런 스위트한 순간보단 굵직하게 긁어대어 상처를 짓무르게 파헤쳐 버린, 그 묘지속의 검은 피 같은, 그 고통 낭자한 순간으로만 더 각인되곤 하는 법이다.


어쩜, 남보다 못 한 가족, 이란 서사는 내가 고통받았고 마음 아팠고 속이 뭉개지고 답답했던 시절, 그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속으로만 게워내어야 했던, 그 속절없는 시절에 대한 뒤 늦은 항변이요, 혼자만 주장하는 셀프 손해배상 청구가 아닐까.


'내가 이토록 상처 받고 힘들었는데, 아무도 모른다... '


가족이란 멍에. 어렸을 땐 속이 터질 듯이 답답하고 창피하고 서글펐다. 내겐 왜 우아한 언니들이 없는가. 돈 없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는데, 틈만 나면 돈문제로 삼파전을 벌이는 이 세 언니들을 보면 가족의 연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우리 집만 그러랴 싶었다. 어느 집안에나,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남 부끄러운 일, 가슴 아픈 서사, 언어화 하기조차 끔찍하고 창피한 순간들,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지 않는가.




이번 코인 투자 사건 앞에서도, 난 마치 장녀처럼 담담했고 되도록 감정을 담지 않고 모두가 평화로울 방법을 고뇌했다.


빚만 남은 듯한 셋째 언니가, 큰언니에게 500만 원을 갚으라고 인사불성이 된 상황을 생각하며, 누군가의 억지스러운 인격을 논하기 전에, 벼랑 끝에 선 자의 처절함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리고 셋째 언니에게 엄마 간병 10년을 한다는 전제하에, 현재의 간병비 외에 현재 엄마집의 지분 20%를 주겠다고 선언 곧 약속했다. 현재 시세로만 얼추 1억이 넘을 것이었다.


언니가 코인으로 날린 돈은 수익 1500만 원 감안 3500만 원이니 3배짜리 배상인 것이다. 조건은 또 있었다. 큰언니에게 예전 빚 500만 원 갚으라는 말을 이젠 다시 하지 않는다는 조건도 들었다. 큰언니도 이 일을 맞닥뜨려 내게 하소연을 했던 터였다. 동시에 조카 진국이게도 3500만원 물어내라 채근하지 말라고 했다.


큰 언니는, 엄마 간병도 그만두고 몇 개월 전부터는 병원에서 물리치료 받느라, 새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에, 언니에게 조카일로 급전 1200만 원을 빌리며 그 명분으로 월 100만 원씩 이자(배당금)를 주고 있다. 사채 이자보다 높은, 그저 언니가 부끄럽지 않게 퇴직연금조로 이직동안 생계에 도움이 되도록 한 처리였다. 사람들이 인사불성이 되는 지점에는 여지없이 돈문제가 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조치들이었다.





어제 주일 가족들이 많이 모인 점심때, 오후 풍경은 따스했다. 현장예배를 드릴 수 없는 엄마와 간병인 셋째 언니, 놀러 온 큰언니와 그녀의 딸, 호주에게 13년 만에 돌아온 남동생이 있었다. 나는 교회에서 대예배와 주일학교 예배를 다 드리고 택시 타고 집에 가곤 한다. 동네 맛집 빵집에서 빵을 잔뜩 사서 집에 갔다. 라이브로 시작되는 4부 영상예배를 거실 대형 TV로 틀어놓고 나눴다. 기독교를 핍박했던 셋째 언니가 예전에는 기독교의 '기'자도 말 못 하게 했는데, 요즘은 엄마와 함께 집에서 영상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다.


둘째 언니와 넷째 언니 아니 가족 모두가 실은 나를 걱정한다. 심지어 둘째 언니는 내가 이렇게 시집갈 나이에도 가정의 대소사에 내 물질을 탕진하는 모습에, 내 것 좀 챙기라 한다. 남동생도 최근에 나눠주지 말고 나 쓰라며 돈을 대주기도 했다.


어제, 늦은 오후 짝꿍네 일이 있어 전철 타고 가는데, 문득 하나님께 그런 질문을 드렸다.


'하나님, 저 가끔은 정말 창피하고 속상해요.. 왜 이 세 언니들은 주기적으로 이럴까요..'


그때 하나님께서 그 모두가 바로 "구원의 재료"라는 마음을 주셨다. 인간적으로는 돈을 탕진하는 일이지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이 상황이 또 재정이 쓰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 들린 광인을 만나셨다. 귀신 들린 이 사람은 얼마나 미쳤던지 무덤을 주거지로 살아가며 밤낮 없이 소리 소리를 질렀고 자해하고 자학했다. 고아한 예수님 입장에선, 사역의 하이라이트 시즌에, 인간적으로 폐기처분 수순만 기다리는 광인은 꽤 껄끄러운 존재였을 것 같다. 차라리 그 시간에, 로마왕궁의 황제를 알현해서 고상한 대화를 나누며 구원의 기회를 마련해 주면, 오늘날로 치며 국영방송, BBC 같은 글로벌 방송의 뉴스로 대서특필이 되어, 한방에 메시야로서 자신을 어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거라사 광인을 주목하셨고, 이 사람을 돕는 일에 한참의 시간을 쓰셨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인으로부터 귀신을 내쫓으신 대가는 어마어마 했다. 귀신들이 나온 뒤 갈 곳을 찾다 그 근방에 있던 돼지떼들에게 들어가 2000마리 가까운 돼지들이 난동을 부리듯 절벽으로 들이닥쳐 몰사했다. 돼지 주인들은 예수님께 항의했을 텐데 영적인 일이라 손해배상을 대놓고 청구할 수도 없었던지, 지역 목축업자들과 합세해서인지, 빨리 그 지역에서 떠나기를 강권해 예수님은 내쫓기듯 그 지역을 떠나야 했습니다.


비. 효. 율. 그리고 삼류로 전락한듯한 예수님의 사역 아우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천지에 얼마든지 우아한 언어로, 품위 있게 접견 받을 곳도 천지셨건만, 도리어 더 많은 경우 처참할 정도로 초라하고 비참하고 구질구질한 인생들만 일부러 골라서 더 만나셨던 것이다.





나란 사람은, 직장에 가면 우아를 머금은 능력 있는 커리우먼, 인정과 존중,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다. 대표이사님 옆에 내 개인 사무실이 있기도 하다. 나란 존재는 그렇게 뽀송뽀송한 솜털 속에서 내 삶이 우아하게 지어져 가기를 바랄 때가 많았다. 대기업 인사과 담당자가 내 문자를 씹은 일로 내게 사과를 하고 헐레벌떡 의뢰건을 간청하고, 또 대기업 미국 법인 인사 팀장도 굼뜨게 일하다간, 내 단호한 메일에 빨리 회신할 수밖에 없는 이슈를 손에 쥐고 있는 작은 권력의 맛.


전철이 한강 다리를 건널 때, 그 풍경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내게, 초등학교 때도, 20대 때도 그리고 지금도 변하지 않은 이 공기는 억울하고 서러운 무게가 아니라, 한 영혼의 인생 짐을 함께 나눠지며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필요한 엄중하고 소중한 무게라고 말이다.


둘째 언니가 적당히 형제들 도와주라 할 때면, 내 연봉이 높아 괜찮다고 걱정 말라 얘기하곤 했다. 허나, 그보단 거라사 광인을 위해서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돼지떼 2000마리는 곧 5억~10억이 넘게 손해를 감수하시고 게다가 예수님의 체면이 구겨지듯 메시아가 일개 인간들에 내쫓김을 당하는 수모를 감수한, 그 대가지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을 잊지 않도록 되뇐다.




직장에선, 간혹 동료들이 내가 부잣집 딸인 줄 알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젠 중년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해맑고 1년 내내 쾌활하고 인상을 쓰는 걸 본 적이 없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회사 성과도 좋고 남자 친구는 의사에, 동안에, 성격도 좋아 친구들도 많은 나는 어쩜 직장인판 엄친딸로 보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집에선 가족이란 서사에 눌러 전혀 다른 고뇌에 매몰되곤 하는 나다. 근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런 나를 가엽게 보고 서러워 하던 깊은 속마음에 스스로 훈장을 새겨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한 자들이 받는 훈장이다. 멀리 아프리카 사람들 선교하듯, 내 가까이 가족에게도 그 고난의 절대치는 마땅히 소진되어야 한다.


삶의 희열은 어쩜 문제 없는 우아함이 아니라 삶의 고통에 무너져 거라사 광인처럼 미친 듯 부르짖는 그 울음에 다가가데 있지 아닐까. 그들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며, 타자들의 문제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한 사람을 찢어내는 그 울부짖음에서 건져내는데 일이 아닐까.


가정폭력 자녀들이 겪는 감정의 불완전성에서 아직 치유가 덜 된 3명의 언니들, 그들의 현재진행 중인 삶의 고단함, 남루함, 비참한 현실은 고가의 보석처럼 구원의 재료로 쓰일 것이다.


먼 훗날 천국에서 이 땅의 날들을 복기할 때, 이 일들이 하늘에서는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소중한 씬(장면, Scene)이 될까?


대학생선교단체에서 내가 배운 소중한 대목이 이 지점이다. 이것을 "영적인 가치관, 기독교 가치관"이라고도 말한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세상을 보고 판단하느냐는 문제 말이다.


주변에 아니 교회 안에서도, 가족들의 크고 작은 서사들에 마음 아파하고 부끄러워 초라함에 무너져도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겉으로는 고상한 모습으로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우아하게 찬양하며 예배드리는 아우라지만, 그들의 6일 삶의 현장은 피범벅이랄만큼 처절한 전투의 현장일 때가 많다.


'남보다 못 한 가족'이란 말은, 어쩜 내가 감내해야 하는 아픔, 손해, 고통에 대한 보상심리가 만들어낸 선택적인 기억 수집이 아닐까? 가족이 어찌 남들보다 나에게 못 하겠는가. 어느 지점에서 받은 상처가 가족이기에 더 크게 다가와 그 이전에 주었던 따뜻하고 고마웠던 장면을 왜곡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아주 가끔 남보다 못 한 사람이 있긴 할 것이지만 말이다.


내 3명의 언니들도 돌이켜 보건대, 내가 어렸을 때 얼마나 나를 챙겨주고 용돈 주고 맛난 간식을 수제로 만들어 주었던 이들인가, 의도적으로 추억하곤 한다.


자기 인생의 짐에 눌러 신음하느라 또 감정이 증폭되어 광인이 된 몇몇 장면만으로, 이 소중한 가족을 더 이상 폄하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나 자신을 채근하며 단도리한다.













*사진, 그림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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