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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추 Mar 10. 2021

가을 같은 사람


출근하던 어느 날 내가 6년을 다녔던 초등학교 담벼락 위로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단풍나무를 보았다.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찬란하던지 단풍나무가 사방에 빛을 뿜어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가 시작이었다. 산성동 곳곳을 그리고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모습을 처음 보고는 한동안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너무 아름다웠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고 신비로웠다. 이 나무를 바라봤던 장소, 해의 위치, 단풍잎이 물드는 정도 이 삼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졌던 날이었다. 단풍나무 위쪽으로 소나무의 뾰족한 잎들이 눈에 함께 들어오는 것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던 날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장면은 내 인생 최고의 장면들 중 하나로 박제되어 가슴속에 프레임으로 고정되었다. 이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 앞에서 바로 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이미지가 그려진다. 늘 그 자리를 지키던 나무인데 왜 지금에서야 내 눈에 들어온 것일까? 출근길에 뒤를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보지 못했을 장면이었다. 운명이었을까?


하루하루 나에게 닥친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다 보면 어딘가 작은 구멍이 나서 천천히 바람이 빠지고 있는 풍선 안에 갇혀 나도 함께 쪼그라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늘 하던 생각만 하고, 그 좁은 사고방식 안에서만 판단하고 바라본다. 그런 편협한 생각이 들킬까 봐 나는 또 한없이 날카로워지고, 점점 더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이 단풍나무가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친 것 같다. 조금씩 바람이 빠지며 나를 옥죄던 풍선을 아예 터트려 주웠다. 좁은 곳에 갇혀 있지 말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라고. 더 넓게 바라보고, 네가 진짜 원하는 꿈을 꾸며 살아가라고.


가을은 참 멋진 계절이다. 오로지 자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색을 세 계절을 버텨내고 비로소 가을에 돼서야 짧지만 강렬하게 폭발시킨다. 가을의 그런 열정 넘치는 에너지가 좋다. 그 폭발적인 에너지가 나에게도 스며드는 느낌이 든다. 이 단풍나무를 보고 그런 강렬한 에너지를 받았던 것 같다. 내 안에 숨어있던 열정과 용기가 마구 샘솟았다. 잊고 살았던 꿈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내 시간을 내 의지로 사용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한 생명체의 삶을 책임지겠다며 대려 온 나의 반려견 룽지에게 좀 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퇴근 후 어두워진 공원에서의 짧은 산책이 아닌 늘 함께하며 따듯한 햇볕을 맘껏 쬐게 해주고 싶었다. 남들이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인 양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결혼-출산-육아의 길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그 길 안에 나를 들이밀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의 주인을 오롯이 나로 만들고 싶었다.


많은 생각을 하고, 굳은 다짐을 하며 용기를 냈다. 그렇다고 무작정 회사를 그만둘 순 없었다. 준비가 필요했고, 그 준비를 위해 스스로 1년이라는 데드라인을 정했다. 1년이라는 유예기간이 생기니 그 시간을 좀 더 촘촘하게 채워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 생각해오던 일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내가 평생을 살아온 동네를 기록하는 일. 이 일이 그 시작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하루하루 조금씩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렇게 1년이 넘게 쌓인 그림 몇 점이 결국 한 동화 삽화의 배경이 되었다. 누구를 위해서 그린 그림이 아닌 온전히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이 한 동화의 풍경이 되는 너무 감사한 경험을 했다. 추가로 전체 삽화를 작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얻었다. 이 동화는 2021년 4월 곧 출판을 앞두고 있다. 내 그림이 들어간 첫 책을 드디어 내 두 손에 받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찬란했던 단풍나무를 보면서 했던 수많은 생각들이 내가 계속 무언가 하게 만들었고, 그런 시간이 쌓여 생각에 머물러 있던 일들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학교 7년과 회사생활 5년, 총 12년을 공부했던 건축을 그만두고, 나는 지금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있다. 남들이 시키는,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 하는 것이 아닌 내가 정하고 계획한 일들을 하며 내 하루를 온전하게 진짜 내 시간으로 채워가고 있다. 언젠가는 내 그림과 글이 들어간 책을 꼭 내보겠다는 꿈을 위해 매일 글 쓰기를 연습 중이며, 그런 내 옆에는 룽지가 발라당 누워서 자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앞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 볼품없이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지만 걱정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그저 나의 시간을 묵묵히 채워가는 수밖에. 차곡차곡 성실하게 쌓아간 시간을 통해 언젠가 내가 봤던 가을 단풍처럼 나의 꿈들도 찬란하게 폭발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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