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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Nov 20. 2021

이 나이에 수능 문제 푸는 이유

아빠라서 그렇습니다.

 올해 수능 시험 총평을 보니 난이도가 만만치 않았나 보다. 오죽하면 BBC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시험'이라고 보도했을까! 수능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 조금 과장하면 전부, 이 되어야 하는 교육 제도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수없이 많은 밤을 잠 못 이루었을 수험생에게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어른들이 만든 험난한 세상에서 청춘들이 고생이 참 많다. 


 수능이 끝나고 각 영역별 문제가 인터넷에 공유되면 재빨리 입수해 수능 문제를 풀어 본다. 대학시절 역사를 전공했으니 한국사 문제를 가장 먼저 앞에 둔다.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종종 역사 관련 책도 읽고 글도 쓰니 자부심이 여전히 가슴 한 구석을 뜨겁게 했다. 평소 역사 실력으로 한국사를 몇 점이나 맞을지 궁금했다. 지난해까지 약 5년 치 수능 문제를 풀었는데 만점은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가장 적게 틀렸을 때가 한 개, 보통 서너 개 틀리기 일쑤였다. 은근히 만점을 기대했는데 어림도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 때에도 배운 적 없는 문제가 종종 출제되었다. 교과서가 개정되어서 그런가? (맞습니다, 변명입니다.) 그래도 틀린 문제는 책이나 인터넷에서 찾아 반드시 확인했다. 오답 노트로 정리할까 했지만 그건 참았다. 지금까지 5년 정도 풀었더니 한국사 문제가 대략 어떤 유형으로 나오는지 감이 왔다. (유형이지 문제가 아님) 수능 한국사 출제 유형을 정리해 첫째 아이에게 깜짝 선물로 줄까 했는데 생각을 좀 바꿨다. <아빠가 들려주는 수능 한국사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브런치에 글을 써 볼까 고민 중이다. 학생들이 글 한 편씩 읽으면서 한국사 감(感)을 잡는 수준에서 말이다. 올해 한국사 시험은 첫째 아이와 함께 풀어보려고 한다. "기본 소양을 평가하는 핵심 문항 중심으로 평이하게 출제했다."라는 수능 출제위원장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과연 몇 점이나 받을지 궁금하다. 


 한국사 다음으로는 국어 영역이다. 평소 아이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책 읽기를 통해 쌓은 문해력은 국어뿐만 아니라 전 과목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에서도 꼭 필요한 능력이라 믿었다. 비단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갈 때도 꼭 필요했다. 수능 국어 문제 풀기는 독서와 문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이에게 몸소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책 읽기 좋아하는 아빠는 수능 공부 따로 안 해도 국어 영역은 잘 풀 자신 있다!" 뭐 이런 마음이었다.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어 영역은 정말 어렵다. 문제도 쉽지 않지만 지문이 정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길었다. 시간 배분을 잘못하면 마지막 장에 있는 지문은 읽지도 못했다. 그렇게 긴 지문에 문제는 서너 개뿐이고, 때로는 문제에도 긴 지문이 있었다. 국어 영역은 3년 치 문제를 풀었는데 가장 좋은 점수가 88점이고 나머지는 82점과 78점을 받았다. 이제는 기억마저 까마득한 문법과 고전 문제는 맞히기 어려웠다. 문학과 비문학은 거의 틀리지 않았으니 겨우 아이 앞에서 얼굴을 들었다. 이 한 마디 하려고…. "알겠지? 평소에 책을 가까이해야 이유!" 지난해 '수능 매운맛'을 경험하는 차원에서 아이에게 국어 문제를 풀게 했는데 중학생 치고는 제법 많이 맞아 좀 놀랐다. 그동안 수 천권 그림책을 읽어 준 아내의 노력 덕분이었다. 틈틈이 중학생 필독 도서나 단편 소설, 수필을 챙겨 준 아빠의 노력도 한몫했으리라. 올해 수능은 처음으로 문·이과 통합형으로 시행되고 국어 영역도 선택과목이 있어 아이와 함께 풀기는 포기했다. 대신 혼자 조용히 풀어 볼까 한다. 


 영어 영역은 웬일로 아이가 먼저 도전장을 내밀었다. 홀수형 듣기 평가를 함께 풀고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를 하자고 했다. 영어 문제는 지난해 수능보다 어렵고, 까다로웠다는 9월 모의고사보다 쉽게 나왔다고 했다. 아이는 과목 중에 수학과 영어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과목이니 가장 자신 있어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수능 영어는 함께 푼 적이 없었는데 얼마나 자신 있으면 도전했을까 싶었다. 기꺼이 응전하기로 했다. 듣기 평가 음원을 구하고 문제지를 출력했다. 실제 시험과 똑같이 보았다. 직장 영어, 서바이벌 잉글리시로 20년을 버틴 나였다. 평소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듣기 평가는 웬만큼 자신 있었다. 한 문제 한 문제 풀어나가는데 의외로 대화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아이도 표정에도 여유가 있었다. 한두 번은 문제를 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문제는 없었다. 잘 듣기만 하면 정답을 찾아내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평가가 끝나고 바로 채점했다. 아빠는 17개 문제 중 17개, 아이는 15개를 맞혔다. 내가 승리했다.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으니 거침없이 소원을 말했다. "자만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라!" 일본 만화의 전설 <드래곤볼>에서 천하무도대회에 출전한 제자 손오공과 크리링이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스승인 무천도사도 변장해 대회에 출전한다. 강해진 제자들에게 힘겹게 승리한 무천도사는 손오공에게 한 마디 한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아라." 내가 꼭 무천도사가 된 기분이었다. 


 학창 시절 수학과는 담을 쌓았기에 수학 영역은 감히 풀어보자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 아빠와 다르게 아이는 수학을 가장 좋아한다. 어떻게 수학이라는 과목을 좋아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건 닮지 않아서 다행이지 싶었다. 수학은 함께 풀지 못해도 한국사나 영어를 함께 풀어보는 것만으로도 아직은 아이에게 해 줄 말이 있으니 다행이다. 무엇보다 즐겁게 응하는 아이가 대견했다. 아이와 똑같은 시험 문제를 풀고 친구처럼 머리를 맞대고 앉아 몇 번 정답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어떤 문제가 쉬웠고 어떤 문제는 어려웠는지 함께 수다 떠니 즐거웠다. 아마 수능 기출문제지를 사다 주고 혼자 풀어보라고 했으면 이런 재미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이 나이에 수능 문제를 수험생처럼 열심히 풀어야 했지만, 그 고단함이 조금도 고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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