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능력과 공정에 관하여
오늘 상위권을 달렸던 기사 중 하나.
톰브라운. 미국의 패션디자이너이자 명품브랜드.
노파심에 말하자면 명품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건 아니다. 명품의 사전적 정의를 들여다봐도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며, 상품적 가치와 브랜드 밸류를 인정받은 고급품'을 말하는데 기업의 전략과 맞물려 높은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뿐이지 명품에 대한 이미지는 장인이 만든 고급감과 사용자들이 만들어낸 문화에 있다고 본다. 이런 명품에 대한 경험은 자신의 취향을 반영하는 하나의 창구가 되어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 명품 브랜드의 아동복 시장이 커지면서 지난해부터 주요 백화점을 중심으로 키즈 팝업 매장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단다. '내 자녀는 달라야'라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라고 하는데. 부모뿐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들까지 나선단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저출산국가로 등극하면서 "하나만 낳아 잘 길러보자"는 생각이 기저에 깔렸을 수 있다. 자연스레 오늘자 조선일보에 실려있는 양육비 기사에 시선이 간다.
양육비 세계 1위. 1인당 GDP의 7.8배.
한국에서 자녀를 만 18세까지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이 1인당 3억 6500만 원가량이란다. 출산율이 10년째 OECD 38국 중 꼴찌인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물가는 고공행진에다가 청년들은 집이 없어 결혼까지 마다한다는데 '톰브라운'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서 흘러나오는 걸까?
며칠 전 요즘 세대의 '허영심'에 관한 글을 썼는데 한참 뛰노는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한벌에 100만 원이 넘는 옷을 입히는 것이야 지불할 능력이 된다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걸 먹이고 입히고 싶다. 즉 그런 능력을 가지고 싶다.
능력주의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정치철학이다. 가장 많이 통용되는 능력주의의 예는 시험을 통한 개인능력 평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수능이 가장 쉬운 사례가 될 테다. 교육의 '공정' 이야기는 이미 화두가 되어있다.
나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생각한다. 2020년에 발간됐으니 벌써 2년이 넘었다. 한 때 정치권에서 '능력주의'를 치열하게 토론한 이유이기도 했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를 전제정치로 부르며, 아메리칸드림으로 인해 사회적 계층 이동이 불가능해졌으며 불평등이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전히 이 물음은 유효하다.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정말 당신의 능력 때문인가"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나는 공정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고 주변엔 고만고만한 친구들이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하고 있었던 터라, 체제에 대한 의심은 추호도 없었다.
혹여라도 가끔씩 공정하지 못한 상황이나 현실을 마주하게 됐을 때는 그것을 외면하기에 바빴다.
영희는 만원 버스에 겨우 올라타서 숨쉬기도 힘든 등굣길을, 반면 철수는 편안한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최신 입시정보와 인터넷강의를 들으며 같은 시간을 보내도 우리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한 때 광화문과 서초동을 두 동강 낸 '조국 사태'라는 단어가 위키 백과에 오른 것도 '공정'이라는 단어가 도화선이 됐지만 별 수없다. 사람들은 제각기 출발선부터 다른 '공정'에 익숙해서 자진해서 순응하거나 그게 아니면 '남 탓'처럼 쉬운 도구를 사용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공정은 그렇게 조금씩 무언갈 향해 나아가려는 앞길에도 돌아본 뒷길에도 조금씩 치었다. 각각의 개인적인 삶으로 시선을 옮겨 타인과 나를 결정짓는 높은 벽이 되어서야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 뿐이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악화시키는 논리로 가능하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톰브라운을 입히는 부모들과 출산율 꼴찌가 동시에 뉴스가 되는 세상.
어쩌면 '공정'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