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 물욕이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나를 잘 모르고 있었나 보다.
여기저기 긁혀도 상관없는 막 들고 다니는 가방이나 디자인이 심플하고 활동하기 편한 옷에 더 손이 가다보니 소재와 디자인, 가격이 마음에 들면 홈쇼핑, 이커머스의 핫딜 등 구입처나 브랜드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하는 편이며-얼마 전 타임세일&핫딜로 브랜드 원피스를 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득템해서 대만족했다-집에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받을 수 있는 행사 사은품도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 평소 물욕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듯 싶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몰랐던 나의 물욕을 깨닫고 있다. 그것도 매년 전년의 물욕을 넘어서는 기록을 경신하면서.
아니, 년 단위가 아니라 분기별로 기록을 깨면서.
도대체 왜 이 세상에는 마시고 싶고 마시면 맛있고 마시면 마실수록 또 마시고 싶은 와인이 많은걸까.
같은 품종도 지역과 와이너리, 심지어 같은 와이너리에서 만든 것도 만드는 방식에 따라 다른 맛을 나다 보니 와인에 있어서만큼은 호기심 천국인지라 '이제 당분간 자제해야지.'라고 결심한 것이 무색하게 평소 눈여겨 본 와인이 세일 품목에 들어가면 어느새 발길은 와인샵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집 와인 냉장고는 물론이고 과일과 음료수, 디저트만 넣는 냉장고도 주객이 전도된지 오래이다. 집에 공간만 있으면 마음 같아서는 큰 와인 냉장고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이사를 가거나 아이가 성인이 되어 독립하지 않는 한 힘든 상황이다보니 과일 냉장고에 과일 대신 와인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그 실상을 고백하면,
냉장실 상단의 유리 선반 두 개와 하단에 있는 두 개의 서랍칸 모두 와인이 자리잡아 과일들은 서로운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와인을 소진하는 속도가 들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들인 만큼 비운다.' 참 심플한 수납정리의 기본 원칙이건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이러다가 상단 선반 무너지는 것 아니야?'
몇 주 전 평소 마셔보고 싶었던 화이트 와인을 산 날, 슬쩍 불안한 마음이 들기에 새로 들고 온 와인을 신중하게 다른 와인 위에 누여놓으며 결심했다.
'진짜 가을 와인 장터까지는 한 병도 안 산다!'
나름 굳은 의지를 불태우며 한 결심이었다. 그리고 지켰다. 얼마 전까지는. 정확하게는 그날 오전에 단골 와인바틀삽샵에서 유혹의 문자가 오기 전 까지는.
'추석 맞이 신퀀타 꼴레지오네 블랙 특가 세일!'
꼴레지오네 블랙?수령 50년 이상 된 프리미티보와 네그리아마로를 분리 숙성한 후 50대 50대으로 블렌딩하여 복합적인 향과 풍미를 보이는 그 와인을? 아니지, 사면 안 되지. 지갑과 냉장고 사정을 고려해야지. 그런데 진짜 안 살거야? 숙성미 넘치는 와인만이 전해주는 부드러운 텍스처와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그 꼴레지오네 블랙인데?
구경도 안 하려고?
만약, 정말 만에 하나 구경을 간다면 그것은 결코 구경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자명한 일이다. 견물생심이라고 와인을 대면하기도 전인 비대면 상태에서도 이미 물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수많은 와인병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며 '나 마시고 싶지?' 라고 말을 거는 듯한 바틀샵의 넘치는 와인력을 내가 어찌 이겨낼 수 있겠는가.
그래, 구경은 무슨. 가 봤자 750ml 와인병이지.
과감히 핸드폰을 덮었다. '탁' 소리와 함께 내 마음의 구매욕도 닫히기를 바라며.
그때 내 핸드폰은 닫혔지만 대신 지갑이 열렸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그 와인은 내 앞에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다.
제일 좋아하는 와인은 B.D.M 이지만 이 아이 같이 묵직한 친구도 참 좋아한다. 단순하지 않게 무거운. 듬직한 복합미를 갖춘 친구.
벗을 들인 덕분에 통장이 텅장이 되어가지만 이 친구가 보여줄 퍼포먼스와 그 시간을 채우는 다정한 이들의 눈빛과 웃음소리, 부담없는 대화가 벌써 기대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와인을 사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