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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Jun 24. 2020

순대 할머니와 은 할머니

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아침 9시가 되면 은행 문을 연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매일 문을 열고 닫는 일을 해왔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많으면 200명에서 적으면 100명의 손님들을 만난다. 그보다 더 되기도 하고 그 보다 덜 되기도 하지만 어림잡아 그렇다. 내가 일하는 곳은 오래된 전통시장 뒷골목에 위치해 있다. 이 동네는 이미 재계발 지역구로 선정된 곳이기 때문에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골목만 빠져나가면 완전 다른 세상이다. 골목 속 세상과 그 밖의 세상은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골목 밖은 높은 빌딩들이 솟아 있고 드넓은 공원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하지만 골목 안으로 들어오면 아직 이곳은 1980년대를 살고 있는 느낌이다. 그만큼 오래된 곳이다. 동네가 오래된 만큼 은행도 그렇다. 은행 자체만 해도 이미 50년이 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내방하는 손님들도 오래된 분이 많다. 2년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자주 오시는 손님들과도 안면이 쌓였다. 특히 작은 것부터 도움이 필요하신 어르신들과 많이 친해졌다. 특히 두 분의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 분은 일명 순대 할머니라고 불리는 할머니다. 내가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창구 직원 중에 유독 그 할머니와 친한 남자 직원이 있었다. 그 분과 친분이 있어서 인지 하루는 순대를 한가득 사 들고 오셨다. 그래서 그 남자 직원이 그 뒤로 순대 할머니라고 불렀다. 남자 직원은 1년 뒤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나 이제 할머니의 대화 상대는 그 남자 직원에서 나로 바뀌었다.


은행이 있는 시장 골목이다. 건물들은 낮고 오래된 것들 뿐이다.


순대 할머니는 올해로 80을 넘기셔서 거동도 불편하시고 몸을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에 온 힘을 다 해야 했다. 그럼에도 은행은 곧잘 오셨다. 항상 오시면 내 자리 옆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쏟아 내신다. 할머니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오지랖을 부린다. 저 아줌마는 이러쿵저러쿵 저 할아버지 손자가 뭐 어디 대학을 나왔는데 혹은 저 할머니가 가진 건물이 이 동네에 몇 채나 된다는 둥 이런저런 동네 사람들 이야기들을 모르는 게 없는 한 마디로 토박이시다.  


순대 할머니는 나에게도 그 오지랖을 부리신다. 다리도 아프신데 꼭 은행을 오셔서는 나에게 이런저런 간섭을 하신다. 엄마가 옆에 없으니 이젠 동네 할머니가 잔소리를 한다. 할머니는 늘 나에게 장가가라고 하신다. 하루는 내 나이를 묻더니


“총각 뭐해 얼른 장가 안 가고 부모 속 그만 썩이고 빨리 가 돈 벌어서 뭐할 거야.”

“할머니 장가는 혼자 가요? 짝이 있어야 가죠”

“아니 얼른 아가씨 하나 잡고 빨리 가  그게 부모한테 효도하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진짜 매번 올 때마다 하신다. 그래서 물었다. 할머니는 시집을 언제 갔냐고 하니 그 시대 사람 답지 않게 서른이 넘어서 시집을 갔다고 하셨다. 요즘이야 그렇다고 쳐도 할머니 젊었을 땐 적어도 1950-60년대였을 건데 그때로 치면 엄청 늦게 간 거였다. 우리 엄마만 해도 스물넷에 결혼을 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할머니는 본인이 늦게 한 걸 후회하시나 보다. 그러니 나 더러 빨리 가라고 하는 게 아닐까.

이게 자꾸 듣다 보면 슬슬 짜증이 난다. 그럴 때면 할머니를 피할 때도 있었다.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막상 안 오면 왜 안 오지? 어디 편찮으신가? 하고 걱정이 된다. 작년 여름 4-5개월 동안 할머니를 보지 못했다. 한 동안 오시지 않아 팀장님께 여쭤보니 할머니 다리를 수술하셔서 지금 요양원에 계신다고 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몸이 편찮으셨던 것이다. 몇 개월 후 다시 할머니를 봤을 땐 그 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어르신들에게 1년이란 시간은 우리들의 1년과는 많이 다른 듯했다. 그래도 다시 쾌차하셔서 힘들지만 거동도 하시니 다행이었다. 몸이 편찮으신 와중에도 내 장가 여부는 늘 체크하신다. 입은 아직 살아있는 거 같다. 그래서 가끔 그런다.


"난 할머니가 없으니까 나 장가갈 때 할머니가 오세요!"

“그래 갈게!”


라고 짧게 답하신다. 얼른 장가를 가야 하는 걸까?



또 다른 한 분은 은 할머니다. 은 할머니는 성이 은 씨라 내가 그렇게 부른다. 은행 바로 뒷문 근처에 혼자 살고 계신다. 은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으신다. 그래서 소통을 하려면 목소리를 힘껏 내야지 들리는 둥 마는 둥 한다. 글로 써보기도 했지만 이번엔 눈이 잘 보이지 않으신다고 했다. 그래서 소통을 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은 할머니는 나에게 가끔 핸드폰 문자를 대신 입력해 달라고 부탁하신다. 요즘은 보기 힘든 2G 폴더 폰을 나에게 내밀며 손자에게 문자 좀 넣어 달라고 말씀하신다. 할머니는 젊어서 아들 하나를 뒀다. 하지만 아들은 IMF 때 회사가 부도나서 힘들어하다 결국 교통사고로 할머니보다 먼저 생을 등지셨다고 했다. 그 후 며느리는 도망가 버리고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키우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 손자 손녀는 할머니와 연락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거 같았다. 늘 손자에게 연락 좀 하라고 문자를 보내는 것을 나에게 부탁하신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나 더러 손자 같다고 하시며 잠실에 10억짜리 아파트가 있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는 뭐 때문에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했다.) 나보고 손자 같다고 하셨으면서 꼭 통장 비밀번호를 누르라고 하면 나 더러 저 멀리 가 있어 라고 했다. 이게 너무 웃겼다.


은 할머니도 자주 오셨다. 그런데 한 동안 보이지 않으셨다. 그래서 또 팀장님께 물으니 은 할머니도 순대 할머니처럼 몸이 편찮으시다 했다. 허리를 수술받으셔서 병원에 입원하고 계신다고 했다. 그런데 순대 할머니보다 심각했나 보다. 하루는 은 할머니가 응급차를 타고 오셨다. 이유는 할머니 통장이 비밀통장이라고 자신만 열어 볼 수 있는 통장이 있는데 혹시나 갑자기 돌아가시면 이 통장을 열기가 아주 힘들어진다. 그래서 손녀가 그 통장을 일반 입출금 통장으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거동이 힘든 할머니는 응급차를 타고 은행 문 앞에 까지 와서 도장만 찍고 바로 다시 가셨다. 그 손녀라는 사람은 아마도 할머니의 건강보다 할머니의 ‘돈‘에 더 관심이 있나 보다. 손녀라 해도 나이가 40대 후반이었다.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고 다 성숙해지는 건 아닌 거 같다. 가족사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는 모르나 내가 본 그 사람은 그렇게 좋은 사람 같진 않아 보였다.


은 할머니도 몇 달 후 퇴원하셔 은행을 오셨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고 말씀드리니 여전히 들리지 않으신가 보다. 그래서 그냥 악수를 청했다. 그러니 웃으시면서 그동안 얼마나 아팠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구절절 말씀하셨다. 오랜만에 할머니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긴 했지만 객장이 너무 시끄러워져서 조금 눈치가 보였다.

두 할머니 말고도 다른 많은 분들이 있지만 나에게 두 분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분들이다. 할머니들이 부디 끝까지 건강하시고 삶의 끝자락에 나라는 사람이 한편에 기억되길 바란다. 그렇게 늘 최대한 도움이 될 수 있게 그들의 손과 발 그리고 눈과 귀가 되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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