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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Jul 15. 2020

은행에서 일하지만 명함은 없어요

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로맨스는 별책부록 이란 드라마에서 주인공 강단이는 늦은 나이에 출판사에 입사하게 된다. 학력도 명문 대졸이고 경력도 화려한 편이지만 경력이 단절된 지 10년이 넘은 나이 많은 경력직 신입을 어느 회사에서도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스펙을 지우고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입사하는 것이다. 그녀에겐 유학 중인 딸을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다. 남편은 사업을 부도내고 바람을 피워 1년 전에 이혼한 상태였다.


이 드라마의 이야기를 꺼낸 건 사실 별 다른 의미가 없다. 강단이는 비정규직으로 입사했지만 정규직들과 똑같이 ‘명함’을 받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명함’이 없어서 그동안 곤란했던 장면들이 같이 따라 나왔다.


난 지금까지 명함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내 이름 세 자가 적혀있고, 무슨 일을 하며,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밝혀 주는 명함, 나를 대신해서 나를 간략하게 소개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 명함‘은 우리 사회에서 아주 효율적인 도구이다. 비즈니스적으로나 일반적으로나 누군가를 만나면 명함을 먼저 꺼내는 게 아주 자연스럽다. 그럴 때마다 난 ’ 명함이 다 떨어졌네요. 혹은 '명함을 가지고 오지 않았네요.’ 같은 말로 빠져나갈 구실을 찾는다.


사실 명함이 가진 역할은 한 가지다. 나의 정보를 교환하는 것.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 정도? 하지만 명함이 가진 또 다른 의미는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밝혀 주는 것이기도 하고, 사회적 위치를 알려주기도 한다. 어떤 곳에 소속되어 있고,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알려주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한다.




지금까지 우린 항상 어딘가에 속해 왔다. 학생이란 신분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오다 보니 나를 소개할 때 항상 붙던 말이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 누구누구입니다. 를 어릴 때부터 배워왔다. 그렇게 약 15년이 넘게 학생으로 살아오다 더 이상 학생이 아닌 신분이 되었을 때 나는 나를 소개하는 법을 잃었다. 직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나를 소개하는 대 부담을 느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때는 내 이름 석 자 말고 나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마치 나체가 된 기분,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사실 나를 설명하는 대 내 이름 석 자만큼 확실한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게 단지 이름 석 자로는 충분히 설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고 어디에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된다. 그럼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각자의 이미지대로 생각할 것이다. 사실은 그게 다가 아닌데도 말이다.


아직도 명함이 없다. 은행원들은 명함이 자리에 쌓여 있지만 나에겐 업체에서 명함을 따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딱히 명함을 쓸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그것을 만드는 것도 쓰일 용도가 있어야 만들고 그것도 돈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것 까지 일개 비정규직 직원에게 신경 쓸 생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뭐 이젠 상관없다. 살다 보니 명함이라는 게 그다지 사용할 일이 별로 없기도 하고, 나라는 사람을 명함 한 장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명함 대신 글을 선택했다. 나의 글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된다면 작은 명함 한 장보다 더 나를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고, 나의 책은 아무에게나 남발하는 명함보다는 정말 나를 알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닿을 것이다.


그래서 난 아직 명함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어도 상관없다. 나는 명함 한 장으로 나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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