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다녔던 대학은 한 학기만 마치고 그만뒀다. 애초에 가고 싶던 곳도 아니었을뿐더러 그것엔 더 자세하고 긴 이야기가 있지만 오늘은 그냥 그만뒀다까지로만 설명하겠다. 재수하고 새로운 대학에 입학했다. 수능은 오히려 더 망쳤으나 지방거점국립대의 모 과에 입학을 했다. 전과를 할 생각이라 과에 대해서는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도 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파워 E성향을 내보였다. 사실 E라지만 E와 I 사이의 간극이 크지 않은 편이다. 그래도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는 때에는 더 외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아무 말 없이 어색하게 앉아있는 게 싫기도 하고 말은 하면 할수록 더 편해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나를 또 까내리기 시작했다.
새내기 배움터, 줄여서 새터 때 있었던 일이다. 새터가 뭔지 간단히 설명해 보자면 학교에 대해 설명하고 같은 대학 (자연과학대학 등)내에서 과끼리 게임도 하고 마지막은 술파티가 되는 1박 2일의 일정이다. 사실상 학과 내의 선배들까지 만나는 첫자리라고 볼 수 있다.
지난 화에서 내가 배운 바가 있지 않은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대하자. 그런 고로 나는 리액션도 열심히 하고 말도 열심히 했다. 무대에 설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을 땐 빼지 않았고 망가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피곤해하는 동기들도 챙겼고 대신 선배들과 열심히 놀기도 했다. 그러자 학생회 내의 여자 선배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왜지?
처음에 나는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괜히 더 그 선배들에게 말을 걸곤 했다. 쓸데없는 스몰 토크를 거는 와중에도 그 선배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렇게 새터가 찝찝하게 끝났다.
새터가 끝난 뒤 기숙사로 돌아갔다. 당시 다녔던 기숙사는 2인실로 같은 과 동기가 룸메로 배정되었다. 그 친구는 첫인상부터 겪어본 바론 조금 소심한 타입이었다. 조용하고 할 말 못 하고 대화 자체를 어려워하는 그런 타입. 아래로는 A라고 일컫겠다.
새터에서 꽤 인상을 남겼는지 당시의 나는 많은 선배들과 밥약속 술약속 등이 잡혀있던 상태였다. 선배들은 항상 동기 누군가와 같이 오라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에 나는 룸메이기도 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A와 함께 가곤 했다. 물론 의사를 물어봤고 좋다고 하길래 같이 갔으나 가서 대화에도 잘 못 낀 채 밥만 먹고 돌아오는 모양새였기에 꽤 불편했나 보다. 나중에는 별로 가기 싫다 해서 다른 동기와 계속 갔었다. 이 다른 동기를 B라고 하겠다. B와 나는 꽤 친한 사이가 됐고 기숙사에는 거의 잠만 자러 들어오거나 B의 자취방에서 자느라 들어오지도 않는 날이 잦아졌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났을까? 첫 번째 소문이 들려왔다. 학생회를 하는 한 선배와 같이 밥을 먹고 있는 도중 선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학생회 여자들이 내 욕을 그렇게 하고 다닌다고.남자한테 눈웃음치고 꼬리 친다나. 첫 대학에서 뒷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당황해서 내 잘못을 찾았다. 그리고 그걸 고쳤다. 하지만 이번엔 어이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 여자 선배들한테도 똑같이 눈웃음을 쳤기 때문이다. 사실 누구를 특정 지어 그런 행동을 한다면 논란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특정 성별에게만 그런다 해도 똑같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두에게 친절하게 했고 그 여자 선배들에게 더 노력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내 욕을 한다고?
같이 밥을 먹고 있던 B가 어이없어하며 열변을 토했다. 언니는 (재수했기 때문에 내가 B보다 당연 연상이었다) 새터에서든 지금이든 항상 누구에게나 그랬다고. 남자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고. 나도 열받아 실소를 흘리는 와중 맞은편에 앉은 선배도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나도 걔네한테 네가 그런 애가 아니라고 말하긴 했어. 하지만 나와 약속 잡았던 모든 선배들이 남자인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지금 말을 전해주는 선배 역시 남자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걔들은 아무리 이 사람들이 아니라고 해도 여우한테 홀린 남자들로 볼 게 뻔하구나. 그게 뭐든 내가 미웠던 점 하나에 나를 가두고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소문이 들려왔다. 이는 B가 내게 말해준 내용이다. A가 내 욕을 하고 다닌다고. 과 특성상 여자가 적었고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여자애들끼리 나름 잘 지내는 와중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B 외의 다른 동기들이 거리를 두는 건가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도 매번 다른 사람들을 만나느라 바쁜 와중이었고 내가 맞지 않아 떠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가 A 때문이었다. A왈, 그 언니는 매번 다른 선배들이랑 약속 나간다고 자기를 혼자 두며, 저번에는 다른 과 남자애 집에서 잔다고 본인이 말한 뒤 들어오지 않았고, 기숙사에서 자는 날보다 자지 않는 날이 더 많은데 매번 다른 남자 집에서 잔단다. 한마디로 줄여보면 BITCH였다.
이번엔 더 어이가 없었다. 그래 학생회 여자 선배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A는 내 앞에선 항상 웃고 있었다. 왜 기숙사 안 오냐고 외롭다며 카톡을 남기던 애였고 자신이 내 엄마를 자처하겠다고 다른 동기들 앞에서 집에 들어와야지! 하고 잔소리를 하던 애였다. 그러던 애가 내 뒤에서 하고 다닌 말은 저거였다니. A는 동기들에게 자기가 좀 들어오라고 하지만 매번 언니는 다른 남자랑 논다고 너무 힘들다는 식으로 말을 했단다. 그리고 B는 동기 여자애들에게 이 말을 들으며 그 언니 질 나쁘니까 멀리하라는 말까지 덧붙여 듣게 된다. B는 역시 이 말에 화를 내며 내 변호를 해줬더랬다.
자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자. 선배들과 약속이 있어서 나가는 건 처음엔 A와 함께 했지만 싫다고 해서 B와 가게 됐다. 다른 과 남자애 집에서 잔다는 부분은 다른 과 남자애 자취방인 건 맞지만 B와 그쪽 과 애들과 같이 밤샘 과제를 했다. B 역시 이 소문을 들을 때 나도 같이 갔다고 화냈던 부분이다. 매번 다른 남자 집에서 잔다는 건 이미 뇌피셜이지만 그것도 말을 얹자면 술집에서 밤새거나 B집에서 자거나 다른 누군가의 집에서 보냈더라도 항상 B와 함께였다. 그리고 만약 그 소문 자체가 사실이라 쳐도 본인들에게 문제가 될게 뭐가 있을까? 그냥 재밌어서 말하고 싶을 뿐 아냐?
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동시에 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냥 내가 질투가 나서 나한테 저런 말을 하는 A까지도 그렇다고 쳐보자. 그럼 다른 동기 여자애들은 뭘까? 그동안 날 겪어왔으면서 저런 말 하나에 휘둘려 나를 멀리하는 건 대체 뭘까? 그 무수한 술자리 중에 동기들 역시 많은 경우 껴있었다. 과팅 등도 나 혼자 한 게 아니라 함께 한 일이었다. 정말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게 입학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 논란과 소문의 중심에 서있던 몇 주의 뒷얘기를 남겨보자면, 동기 여자애들 사이에서 A에게 불만을 가진 친구들이 늘어났고 결국 A와 B, 나를 포함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만들어졌었다. B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나를 못 믿던 동기들은 이 자리에서 A의 이상함을 알아채고 이야기를 끝으로 내게 사과까지 건네는 친구도 몇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도 그들에게 마음이 떠난 지 오래였지만 그들도 내 욕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나 보다. 무수한 뒷말에 지쳐 과생활을 아예 놓고 B와도 멀어진 지 2년쯤 지났을 때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B였다. 오랜만의 전화에 무슨 일인지 받아봤더니 한다는 소리가
지금 과학생회 인원을 생각하려고 모인 자리인데 언니에 관한 더러운 소문을 들었어. 이게 사실이면 나 정말 화날 것 같은데.
완벽히 모든 정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진실이 무엇인가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재밌으니까. 그뿐이었다. 언제는 싸가지 없다더니 이제는 천하의 BITCH가 되는 게 그저 우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