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내 잘못인 것 같아
다시는 스타벅스 파트너로 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겨운 알바들과 여러 갑질들, 줄어가는 생활비에 결국 다시 스타벅스로 향하게 됐다. 전편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스타벅스 매장의 모든 파트너가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어느 회사나 어느 사회나 그렇듯 이상한 사람도 괜찮은 사람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운이 나빴나 보다. 재입사를 결정하고 새로 출근하게 된 매장은 괜찮을 줄 알았다.
면접에서 만난 점장님은 아주 밝고 유쾌하신 분이었다. 면접은 면접이라고 말하기도 우스울 정도로 거진 잡담만 나누다가 끝났다. 얘기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몰라 점장님 퇴근 시간이 이미 10분 지났다고 하는데 너무 재밌어서 가지 마세요, 더 얘기해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도 면접에서 할만한 발언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로 잡담과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면접 같던 부분을 꼽아보자면, 왜 퇴사했냐고 질문하는 때였다. 학업 때문에 퇴사했다는 말을 이미 준비해 왔지만 너무 좋았던 면접 분위기에 눈이 흐려져 '학업 때문도 맞지만 친했던 파트너들이 뒤에서 욕을 하더라'는 말까지 해버렸다. 나쁜 패를 굳이 까서 보여준 모양새다. 점장님은 안타까워하며 그러면 안 될 일이지만 혹시 또 같은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셨다. 나는 이제 훨씬 멘탈이 세졌다고 나를 욕하는 그 사람들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되어서 이겨낼 거라고 말했다. 점장님은 대단하다며 웃어 보이셨다.
그렇게 출근. 수퍼바이저 직급 이상의 파트너들은 대부분 굉장히 일을 잘했고 조금 까칠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잘 대해준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교육받아야 할 내용을 교육받는데도 트집 잡고, 알려주지 않은 내용을 왜 모르냐고 타박하고, 온갖 비아냥과 시시덕거림을 겪으면서도, 내가 잘 못하기 때문에 잘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버텨가던 와중 다른 매장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다 우리 매장에 신입 수퍼바이저로 발령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 파트너는 어렸다. 고작 21살,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파트너는 왜인지 나를 싫어했다. 이유를 찾으라면 찾아야 했을까? 어쨌든 그는 나를 싫어했고 그렇잖아도 내게 긍정적이지 않았던 다른 파트너들을 본인 편으로 만들었다. 바로 옆에 같이 서있는데도 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파트너들에게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걸 보는 기분이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친한 친구를 입사시켜 함께 일하기도 했다. 그 둘과 같이 마감하는 날에는 2인분 이상을 혼자서 해내야 했다. 그들은 그저 서서 놀기 때문에 집에 가고 싶은 내가 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내 역량이 올라가는 걸 고마워했어야 할까?
그럼에도 나는 굳건하려 했다. 그 파트너가 싫은 소리 해도 웃으며 맞받아쳤고, 그 파트너가 일을 제대로 못할 때엔 이미 나를 싫어하니 더 싫어하든 말든 틀렸다고 매뉴얼을 말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친구에게 절교를 당하게 됐다. 여기엔 긴 내용이 있지만 몇 화 뒤에 말해보려 한다. 어쨌든 근근이 버텨가던 상황에서 친구와의 관계까지 깨져버려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그냥 다 제가 잘못한 것 같아요.
제가 일을 좀 더 잘했으면 그 파트너들도 제게 그러지 않았을 거고, 제가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냥 참았으면 계속 사이도 좋았을 거고, 무슨 말을 하든 웃으며 상냥했다면 이런 상황이 오진 않았을 거고, 내가 너무 힘들다고 친구한테 배설하듯 말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멀어지진 않았을 거예요. 결국 다 내 잘못 같아요.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 중 내 잘못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쏟아내던 기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했다. 그 생각이 합리적이냐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을 것 같냐고, 그 사람 자체가 나쁜 사람인데 대체 왜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냐고 했다. 그는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데. 나는 지나치게 착한 사람이 되려 한다고 말했다.
성인이 되고 모난 돌로 시작한 내가 떼굴떼굴 구르기를 5년째, 나는 내 모난 부분을 찾아 갉아내기를 반복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이 모두에게 다르다는 걸, 누군가에게 은인이 누군가에게 미친년일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굴렀더니 나는 나라는 사람을 잃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이해하려 했다. 내 잘못을 고치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나를 돌아봐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돌아보길 바라는 것조차 이상한 생각이다. 그 사람들이 나를 가둔 이유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그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만큼의 행동까지는 고쳐야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그냥 미친개라면 내가 그 개에게 딱 알맞은 무언가가 돼줄 필요까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던 시기에 깨달은 건 그 사람들을 이해하기보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완벽하고 영원한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무엇보다 내가 중요함을 그제야 알게 되었기에 [나를 만든 사람들]의 내용은 인간관계에 관한 여러 깨달음을 말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장 전달되었으면 하는 부분은 무엇보다도 당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모난 부분을 어느 정도는 깎아야 한대도 자신의 전부를 버릴 필요는 없다. 그 중간의 줄다리기가 가장 아슬아슬한 법이지만 언제나 스스로를 최우선으로 살피고 힘들다면 그 관계를 끊어내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가 그러지 못한 시간만큼을 당신은 벌었길 바라며 이번 화를 마무리하겠다.
사진: Unsplash의Jon Ty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