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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Feb 24. 2020

남편에게 생일 선물로 편지를 받았다.

<밀리의 서재> 구독권은 덤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어?


나에겐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가지고 싶은 게 잘 없다.  재작년 생일 때는 읽고 싶던 책을 사달라고 했다. <미 비포 유>와 <애프터 유>를 받고 정말 행복했다. 작년 생일에는 임부복을 받았다. 그런데 올해는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책꽂이에 자리가 부족해 쓸만한 책들을 중고로 정리한 지 얼마 안 됐고, 제 임신 중인 것도 아니라서 임부복도 필요 없다. 아주 고민 끝에 진짜로 고 싶은 게 생각났다.


"편지 써줘. 아주 길게. 진심을 담아서. 아주 길게 써야 하니까 손편지는 아니어도 괜찮아. 타자로 쳐서 A4에 출력해줘."

배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들을 했다. 남편은 예상치 못한 요구에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알게 뭐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한 뒤 어려운 숙제를 끝낸 것처럼 후련했다.


생일 전날, 감기 기운이 있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남편에게 약을 좀 건네 달라고 했다. 남편이 건네 준 약봉투 안에는 편지가 담겨있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약을 먹는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입에서 물도 새어 나올 뻔했다. 편지를 빨리 읽고 싶었지만 남편 앞에서 읽으면 좀 어색할 것 같아서 편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A4 2장짜리 편지였는데 글씨가 예상보다 컸다. 편지의 처음과 끝의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은 더 컸다. 2장을 채우느라 얼마나 머리를 쥐어짰는지 알 수 있어 귀여웠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은 귀엽지 않았다. 요즘에 책 읽기와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면서 내가 성격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뭐 이 좌식아? 그럼 원래 내 성격이 어땠는데?'

다시 성격이 안 좋아지려고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더 어마어마한 말이 써 있었다. 비만은 만병의 근원이니까 살을 좀 빼잔다. (아직 비만까지는 아니다. 진짜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큰소리로 웃어버렸다. 아내에게 보내는 생일 축하 편지에 살 좀 빼자고 쓰는 남편이라니. 너무 내 남편다웠다.


편지를 받고 싶다고 해놓고 내심 불안했었다. 오글거리고 느끼한 멘트로 가득한 러브레터를 받을까 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나는 도무지 그런 것들은 감당이 안 되는 성격이다. 다행히 남편은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은 담백한 편지를 써줬다. 생각보다 더 냉철한 편지를 받아 들고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남편은 다른 선물도 준비했다. 전자책을 볼 수 있는 <밀리의 서재> 1년  구독권을 결제해준 것이다.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떠올려보고 알아보고 준비해 준 선물이라 너무 소중했다. 같이 산 지 5년, 이렇게 또 서로를 알아가고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다.


아, 편지에는 이런 말도 써 있었다. 남편 생일에도 꼭 편지를 받고 싶단다. 편지를 쓰는 게 어지간히 힘들었나 보다. 복수심에 불타오른걸 보니. 웃기시네. 나는 현금으로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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