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이상한 규칙들, 조직문화에 대한 질문
회사가 맡은 브랜드가 많아지며 새로 입사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경력보다 신입이 더 많았다. 아무래도 경력직은 단가가 더 높을 테니 회사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눈치 보며 때론 해맑게 업무를 했다. 다른 팀과 친하게 지내는 내 모습이 J 대리에게는 여전히 눈엣가시였다.
처음과 달리 점심시간도 조금 편해졌다. 밥을 먹고 오면 로비에 앉아 같은 시기에 비슷하게 들어온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신입사원은 따로 명칭이 없어 땡땡‘님’이라는 존칭을 썼다. 편해지면 윗사람들은 가끔 ‘야’ ‘너’라고 하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팀 단체 대화방에 ‘계엄령’이 떨어졌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듯 회사 전사에게 적용되면 해야겠지만 우리 팀만? 그것도 사원들에게 적용되는 규칙이란다. 십 년이 지난 지금 그 항목이 하나하나 기억은 안 나지만 내용은 이랬다.
사원들은 8시 50분 까지는 자리에 착석할 것, 부서끼리 마주치면 꼭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것, 매주 1회는 업무에 대한 과제를 내주고 선배들이 피드백하는 자리를 가지게 됨.
이 밖에도 사원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야 되는 몇 가지 규칙들을 문서 형태로 만들었다. 너무 일방적이었다.
내게는 또 다른 과제가 있었다 300페이지가 넘는 웹기획 관련 책을 피피티로 정리해 매번 검사받고 사인까지 받으란다. 이유는 웹기획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공부를 하란다. 요즘 MZ 세대가 이런 문서를 받으면 바로 인스타에 올라가겠지? 신입사원 규율에 대한 문서는 이름만 가르침이지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었다. 더군다나 사원들의 업무량도 다 달랐다. 나인 투 식스로 정시까지 끝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객사’ 자체가 매우 바빠 9시 10시에 퇴근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른 팀에게도 우리 부서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사원들 입에서는 지금 업무도 빠듯한데 과제와 규칙들이 매우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당시 친했던 사원 한 명은 이상한 규칙들로 인해 ‘퇴사’까지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짠내 나는 회사생활을 이어갔다. 한 번은 회의실에서 기획도서를 읽고 정리해서 리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당시 내 회사 생활의 모토는 즐겁게였다. 딱딱한 분위기가 싫어 유쾌하게, 중간중간 재밌게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풀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J 대리가 질문을 했다. 질문은 내가 아닌 다른 사원의 이름을 부르면서 콕 집어 말했다.
“A 씨는 지금 이담 씨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어요? 나는 하나도 몰라서.”
나도 당황해 표정이 가라앉았다. J 대리에게 혼나기는 했어도 사원, 대리, 과장이 있는 공개적인 곳에서 내 발표물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네 저는 알 거 같아요”
A는 3초 만에 바로 대답했다. 내가 이야기한 내용을 짧게 요약해 J 대리에게 말했다.
대답을 하니 사수는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깨듯 회의실 문이 열렸다. 회의를 끝낸 최종 보스 부장님이 들어오셨다. 부장님은 잘들하고 있나 살피듯 우리를 바라봤다. 부장님은 나이스 한 분이셔서 어려운 일도 명쾌하게 ‘이렇게 하면 되지’라고 말해주는 스타일이다. 까다롭고 예민한 고객사도 컨트롤하며 오래 프로젝트를 하신 분.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부장님께 배울 게 많을 것 같아 버티고 참으며 다닌 것도 있었다.
공개 망신을 당한 후 자존감이 많이 내려갔다. 그동안은 실수하고 배우면서도 ‘이것도 또 하나의 과정이니까’라고 긍정 회로를 돌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J 대리와 주변 사람들의 친한 무리를 만들며 나를 배제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신입사원 규칙 문서도 그녀가 개입돼 있었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을 넣어 규칙을 정해 넣은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 일만 하느라 인사를 안 하고 데면데면하는 직원이 있었는데. 인사 좀 잘하라는 취지로 ‘눈 마주치면 인사하기’라는 내용을 넣은 것이다. 사수 J에게 공개적인 까임을 당한 후 사원들을 나를 더 측은하게 봤다. 나보다 훨씬 오래 다녔던 나와 친했던 E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사원 중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불만을 갖고 직접 면담을 하며 말하자 규칙들은 흐지부지됐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내가 하는 일들, 인간관계, 태도 모든 게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밝고 유쾌하게 다녔던 회사가 즐겁지 않았다.
신입사원이 자리를 10분 먼저 지킨다 해서, 매일 같은 분량의 책을 읽고 요약해 확인받는 다해서 조직이 더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진짜 힘은 군기가 아니라 존중에서 시작된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연차가 쌓이고 선배가 되면 불필요한 규칙을 강요하는 대신 그 사람의 자리를 지켜주는 동료가 되고 싶다고. 내가 겪은 이상한 규칙들이 남긴, 가장 소중한 배움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