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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 빠지기 회식 생존법

회식의 처음과 끝은 술 (기승전'술')

by 서이담

첫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입사원을 환영하는 회식이 열렸다. 날씨가 쌀쌀해질 10월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첫 회식 메뉴는 ‘회’와 ‘대하’ 같은 해산물 가게였다. 나보다 연차가 높은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술자리가 시작됐다. 사는 곳, 전공, 이 전에는 뭘 했는지 새로 들어온 사원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술을 한 모금 마시니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딱딱한 분위기가 말랑하게 풀렸다. 대학교 엠티나 대외활동에서 간단하게나 먹어봤지 술자리에서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전혀 몰랐다.

예를 들면 술잔은 두 손으로 꼭 받아야 되고(받기 전에 기울이면 좋고) 상대의 술잔이 비면 따라주고 하는 것들이다. 술잔을 들고 벌컥 마시면 안 되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마셔야 한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술에 ‘술’자도 몰랐던 나는 그냥 되는 데로 마셨다.


내가 속해있던 기획 2팀의 부장님은 ‘나이스’한 분이셨다. 인상이 웃상이신 데다가 일적으로 심각하게 고민을 할 때면 정말 단순하게 해답을 주셨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고객사와의 계약이 오래 유지될 수 있게 했던 장본인이기도 했으니까.


말도 많고 흥도 많으신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부장님은 당연히 술 마시는 걸 좋아했다. 고깃집에서 일 차를 하면 이 차로 선술집이나 안주가 나오는 노래방을 찾았다. 흥이 많으신 분이라 노래방을 좋아했는데 나도 사실 흥이 많은 타입이었다.


문제는 그 흥이 직원들의 새벽까지 이어졌다는 것.


한마디로 말해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부장님의 스타일. 우리 팀은 그 흐름에 맞춰야 했다.

집에 가기 위해선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잘 재야 했다. 그러니까 일차가 마무리되는 시점 인사를 하고 가지 않으면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나는 사실 술을 잘 못했다. 알코올이 한 잔만 들어가도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술이 몸에 안 받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으니 흥을 돋운다는 이유로 홀짝홀짝 받아마셨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시절, 거절하는 걸 잘못해 한 잔 두 잔에서 여러 잔이 됐고 취기가 온몸으로 올라왔다. 결국 화장실에 달려가 토하는 일이 반복됐다. 한번 토를 하고 오면 얼굴색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술을 잘 마시는 사람으로 보였다. 마셔도 또 마시고 토하고 다시 돌아와 웃고 있으니 ‘주량 센 사람’으로 오해를 사곤 했다. 사실은 버티기 위한 몸부림이었는데 말이다.




회식 자리는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보이지 않는 규칙이 숨어있었다. 중간중간 일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 회사 굴러가는 이야기, 회사에 도는 가십거리들 말이다. 일차가 끝나고 단체로 자리를 빠지려고 할라치면 부장님과 그 아래 분들이 잡기도 했다. ‘벌써 가?’ 내지는 ‘더 놀자 가자’ 등으로 회유하면서 말이다.


거절을 못 한 나와 몇 명의 직원들은 남기도 했는데 마이크 잡는 걸 좋아하는 나는 정말 신명 나게 놀았다. 이왕 하는 회식 남을 거면 즐겨라는 느낌으로. 무아지경으로 노니 삼 차는 정말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가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술에 취한 부장님은 이미 걸음부터가 휘청였다. 어두컴컴 한 새벽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남는 건 숙취와 쉰 목, 허무함이었으니.

몇 번의 회식을 겪으며 부장님이 왜 술을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도 프로젝트나 일을 하며 짜증이 나거나 스트레스받으면 술이 당겼다. 당시 과장님 말에 따르면 우리 직무가 술이 당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을 하며 친해진 사람들과 가끔 우리들끼리 작은 회식을 열었다. 메뉴는 그날그날 달랐는데 회사 이야기를 하면 계속 들어가는 술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때가 있었다.


부장님은 흥을 즐기는 분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의무처럼 받아들였고 그게 바로 회식 문화의 민낯이었다. 술잔 너머로 보인 건 웃음 뒤 감춰진 피곤함, 위계와 눈치 침묵이었다.


지금은 회식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술 없이 건전하게 점심 회식을 한다든지 시간과 메뉴를 정해두고 일찍이 고지한다. 술 대신 커피나 밥으로 모이기도 하고, 회식이 ‘강제’가 아닌 ‘선택’이 되었다. 술잔을 끝까지 비우던 시절이 지나고 대화 한 모금이 더 소중한 회식 자리를 가져다주고 있다. 정말 막연히 그게 맞는 줄 알고 따라야 했던 10년 전과 비교해 강산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버티는 사람이 ‘인싸’였지만 이제는 먼저 집에 가는 사람이 ‘쿨’하다. 결국 변한 건 술이 아니라 회식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억지웃음 대신, 진짜 편안한 웃음이 허락되는 자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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