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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계절, 문장 하나를 품고

신춘문예를 보낸 뒤 조금 설레기로 했다

by 서이담

찬 바람이 다가오는 계절,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생각나는 연례행사 같은 날들이 있다. 바로 신춘문예다. 신문사 별로 상이하지만 보통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마감이니까. 정말 우연하게 공모요강을 보고 내는 사람도 있을 테고, 몇 년 동안 꾸준히 투고하는 문청들도 많을 테지. 그동안은 신춘문예시즌이라는 말만 들어봤지 도저히 쓸 엄두가 나지 않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래도 내 생에 치열했던 순간은 있었다. 퇴사 후 한동안 뭘 할지 생각하다 유튜브로 동화 쓰기 강의를 들었고, 도서관을 다니며 작법서를 읽었다. 아동문학을 읽고 공부하며 '나도 써보면 즐거울 것 같다' 아니 '잘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썼었다. 하루에 계획한 양만큼 매일 썼고, 동화 부문으로 열심히 응모했다.


신춘문예 시즌에는 지방지 신인상 원고도 받는데 당시에는 질보다 양을 추구했다. 쓰는 족족 냈기 때문에 잘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낸 것 같다. 그중 지방지 신인상 한 곳에서 연락이 왔고 나는 정식 등단은 아니지만 어쨌든 동화부문에서 수상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2025년 그냥 두기 아까운 원고 한편을 다시 열어서 천천히 읽었다. 누군가가 말하길 초고는 쓰레기라는데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내가 이런 작품을 썼다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6년 전에는 나름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내용도 엉성하고 툭툭 끊기듯 읽혔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한데 알맹이가 없었다. 내 나름대로 글을 쓰다 보면 사람들을 건드리는 참신한 문장 하나정돈 있다고 자부했는데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고'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어제 쓴 글을 오늘 다시 읽으면 다르듯. 육 년 만에 내 문서 안에 잠들고 있던 글…….


요즘 동화 말고 시에도 다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한번 써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다 그냥 부딪혀 보기로 결심했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생각만 하면 평생 못할 것 같았으니까. 적어도 6년 전보다는 간절하게 써보자고.




오래된 작가들은 신작을 쓰면서 이번 원고가 잘 될지 안 될지 판단이 된다고 한다. 독자들의 반응이 별로일 거라고 생각해도 결국 밀고 나간다고. 도중에 업을 수도 있지만 때론 운명을 알고도 쓰는 걸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일단은 뭐든 써보기로 했다.


나는 문학특기자로 대학을 갔고,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많은 대외활동과 공모전을 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당시에는 방송 쪽으로 나가고 싶어서 글쓰기는 부수적인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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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환기하는 글들을 썼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처음으로 돌아가 쓰는 글 말이다. 예전에는 사족이 많았다. 이렇게도 보이고 싶고 저렇게도 보이고 싶어 살을 붙였다. 문장은 예쁜데 영혼은 없고, 모스부호처럼 일일이 보며 나 혼자 해석하는 글. 나는 예술가가 되기에 글을 못 쓴다고 여겼다. 그래서 더 매달리고 써보기로 했다. 계획 없이 하는 사람이지만 글 쓸 때만큼은 조금 진지하게 달려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는 미리 하루에 내가 쓸 수 있을 만큼의 분량을 정해두고 글을 썼다. 소재도 주제도 뭐로 할지 모르는 데다 비축분도 없기에 더 열심히 써야만 했다. 하다 보면 나를 알아주는 곳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기대를 품으며 말이다. 열심히 써봤자 안 되는 거 아냐? 실망감이 더 크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나를 가로막기도 했었다. 이주 동안 새로운 글들도 썼고 이전에 썼던 글의 살을 발라내고 덧입혔다. 창작보다 퇴고하는 게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것 같다. 내게 글 쓰는 일은 흩어져 있는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과정이다.


마지막 퇴고를 끝낸 밤, 문장 사이에 남아 있던 숨결 하나하나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걸 차분히 인정하게 됐다.


신춘문예 당선 여부는 이제 내 손을 떠났다. 그러니 12월은 조금 설레기로 했다. 그냥 지나가는 글일지라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 문장을 처음 읽는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잠깐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올해의 마지막이 조금 따뜻해진다. 기다림이란 원래 간절함을 닮아 있지만 마음을 너무 조여 쥐지 않기로 한다. 쓰는 동안 충분히 뜨거웠고, 그 열이 아직 식지 않은 채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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