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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Feb 19. 2020

우리엄마는 원더우먼

고기를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가족소리들의 대화 소리가 귓가를 울려 퍼졌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쯤 보이는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경찰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엄마한테 말한다. 가족끼리의 외식에 돌연 엄마가 버럭 화를 내더니 그럴 형편도 안될 뿐 더러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보내주냐며 날 선 말을 주고받는다. 옆에 있던 아버지와 동생은 묵묵 부답을 한 채 갈비를 먹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나는 고개와 시선을 정방향으로 보면서도 그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갔다.

  어릴적 나도 그랬다. 하고 싶은게 많고 배우고 싶은게 많은 아이……. 조금이라도 신기한게 있으면 끝까지 보고 하고싶다고 의사표현을 했던 아이 그게 나다. 엄마는 내가 배우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학원을 알아봐줬고, 어떤 선생님과 어떻게 수업을 하는지 직접 알아봐줬으며 학원 시간까지 상세히 물어봐 내게 말해줬다. 피아노, 바이올린, 속독, 발레, 웅변학원부터 해서 내가 다니는 학원들은 모두 내가 오롯이 하고 싶었던 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엄마는 네 의견을 존중하고 믿는다고 말해줬다. 나를 믿기에 학원을 보낸다는 말. 그 따뜻한 말 때문일까. 나를 믿어줬던 엄마 때문이라도 스무살이 넘은 내 모습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멋있는 타이틀을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꿈에서 멀어질수록 불안했고 현실과 타협하려고 맞지 않는 직장에 들어가 몇 년 있기도 했다. 사실 다시 펜을 잡으며 꿈을 쫓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는 임신했을때 왕복 세 네시간거리를 나를 품고 출퇴근했다. 어릴때는 학원하나 가는게 쉬운건줄 알았는데 요즘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원 하나 보내는게 녹록치 않은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빠듯한 형편이었지만 내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맛있는 것, 우리때 유행하던 장난감을 사주는 것, 내가 다니고 싶은 학원을 보내줬던 것이다. 지금도 엄마는 여전히 직장을 다닌다. 일한 햇수만 30년은 넘는다. 그런데도 집에오면 집안일을 하고 지금은 노쇠하신 할머니의 하루를 묻거나 본인이 직접 밥을 챙겨 드린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가끔 서른이 넘은 딸에게 우리집한 평생 일만하다가 가는 거 아니냐는 농담을 툭툭 던지곤 한다.

  학원 선결제일이 되면 바쁘다. 엑셀 파일에 회수당 적어놓은 숫자들이 주욱 나열돼 있고, 현금인지 현금영수증은 하는지 등등 다양한 결제 방식이 쓰여 있다. 삼개월을 한번에 납부하는 학부모들도 있고 한 달씩 다녀보고 보내는 학부모님들도 있다. 학부모요청사항이 많은 만큼 학원에서 기록하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 직접 사회에 나가 일을 해 보니 남의 돈 벌기가 쉽지 않는다 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학원에서 서류정리, 전화업무, 아이들관리, 원비 결제 등 다양한 업무를 해야 나오는 몇 십만원을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턱턱 내줄 수 있었을까. 그 어린시절 엄마의 믿어준다, 내게는 믿고 있다 는 말 한마디가 성인이 돼 훌쩍 자란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돼 줬다.




  믿을 수 없다는 말대신 한번 해봐 믿는다 라는 말. 그 말 한마디로 엄마는 내게 위대한 사람이었다. 누가 그랬다. 어린시절 엄마의 모습은 그 시절 누구보다 전지전능한 존재의 모습이라고. 지금도 엄마와 어렸을 적 얘기를 할때면 엄마는 말한다. 그 시절 학원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다고, 하고 싶은건 해야지. 엄마 때는 할 수 없었던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사실 지금 내 모습은 엄마가 어릴적 내게 투자했던 배움과 가르침들의 결과물들, 소위말해 나는 직업적으로 성공하지 않았다. 아직도 뭘 해야 되나 어떤 모습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중이고 탐구 중이다. 그래도 엄마는 믿는단다. 내가 잘 해내기를. 잘된다 하는 과한 욕심보다 하루하루 무사히 건강히 보낸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고 말이다. 엄마 또한 남들이 하는 것 만큼과 비슷하게 혹은 그 이상은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남들이 세운 기준을 바라보지 않은 순간 내가 세운 기준안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지내보려고 한다. 엄마처럼, 내가 또 다른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배우자가 되고 친구가 힘든 사람들의 멘토가 되었을 때 손을 꼭 잡고 믿어주려고 한다. 머릿속으로 어릴적 뭐든 내가 우러러 봤던 엄마의 모습이 설핏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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