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하던 어느 평일 밤이었다. 둘째 아이가 실내 체육관에서 하는 과외활동에 참여하고 있던 중 전화 하나가 걸려왔다. 아내의 목소리는 이내 다급히 변하였고 아이를 빨리 데리러 가자 하였다. 둘째가 체육관 바닥에 떨어진 손 세정제를 밟고 미끄러져 공중으로 날아 머리로 '착지'했던 것. 그 심각한 와중에 톰과 제리 애니메이션은 왜 또 그리 웃픈지. 얼굴을 보니 다행히 생각보다 멀쩡하긴 했으나 몇 번의 인터넷 검색과 발동동 끝에 결국 응급실에 데리고 가기로 결정하였다. 가는 중에 아이는 우리에게 딱 세가지를 질문했다. "여기 어디야?" "지금 몇 시야?" "형은 뭐해?" 뭔가 쎄한 느낌이었지만 우리는 안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열심히 설명을 하였다. "응 병원 가는 중이야" "9시 반정도 됐네" "집에 있어. 아까 봤쟎아" 가슴 철렁했던 건 15분 뒤에 했던 다음 질문이었다. "여기 어디야?" "지금 몇 시야?" "형은 뭐해?" 이는 응급실에 도착해서 귀가할 때까지 3-4시간 동안 지속해서 반복되었다.
내가 다니는 스타벅스에 나보다 단골인 여성이 하나 있는데 항상 음식을 시켜놓고 큰 책상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 (지금도 있다). 젊은 나이에 화장기 없는 추리닝 차림은 첫 인상부터가 범상치 않다. 딱히 주변에 피해를 주는 건 아니면서도 불편함을 주는 한 가지 행동이 있다면, 핸드폰을 보다가 입구 방향을, 마치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듯이 계속해서 두리번 거리는 것이다.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은 무언가 낌새를 느낀 후 확실히 이상하다는 판단이 서면 슬그머니 홍해 갈라지듯 사라진다. 빈 자리가 생겼다고 냉큼 앉으려다가 이 분이 주변에 있는 것을 보고 흠칫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주말마다 보다 보니 가끔씩 행동이 과격해지는 것도 관찰하게 되는데 핸드폰을 갑자기 커다란 볼륨으로 노래를 틀고서 몰입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큰 민폐는 아닌 것은 주로 스토어에 사람들로 가득 차 주변이 시끄러워졌을 때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두 장면의 공통점이라면 역시 뇌에 문제가 생긴 문제라는 것이다. 뇌와 관련하여 우리의 신체는 머리통 안에 있는 무언가가 생존에 무척 중요하다고 가르쳐 준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껍질 안에 축축하다 못해 둥둥 떠 있는 쭈끌한 회백질의 덩어리는 외부 공격에 대한 최후의 본진이다. 그럼에도 둘째가 공중에서 날아 착지한 순간 마치 한 대 맞은 가전제품처럼 그 내부 작동에 문제가 생겼다. 일견 소통과 인지는 멀쩡했으나, 메세지를 기억의 영역으로 보내는 부분이 고장난 것이 확실했다. 이에 무의식은 의식으로 질문을 다시 밀어 올렸는데, 경악할 것은 녹화된 음성마냥 토씨하나 다르지 않았다. 마치 영화 matrix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보았던 matrix의 글리치를 암시하는 데자뷰를 기억하는지. 와중에 긴급 패치는 엄청난 속도로 일어나서 결국 둘째는 다음 날 반장선거를 위한 연설문을 작성하고, 외우고, 끝내 당선까지 되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스타벅스의 묘령의 여인 또한 반복된 행동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레벨은 훨씬 상위에서 일어나 마치 주어진 각본을 현실 속에서 연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반복을 제외하면 전혀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는데 스타벅스의 그 복잡한 음료 구매 과정과 뒷처리를 아주 완벽하게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을 기다리는 행동에서 피드백을 기록하는 부분의 패치가 일어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름 방학의 대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David Eagleman이라는 뇌과학자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는 뇌과학자들만이 아는 지식들을 마치 문학작품과 같은 유려함으로 전달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학부는 문학사를 전공했다 (이런 게 더 좌절스럽다). 번역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서 그 팩트 자체만으로 우리의 뇌가 얼마나 기괴한지에 마음을 순식간에 빼앗겨 버린다.
그의 저서 중 하나는 뇌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1].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너의 의식은 오감이 전달하는 메세지들을 선택적으로 수신하는 컨트롤타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우리 몸에 벌어지고 있으며 매우 소수의 케이스에서만, 마치 처음 자기가 발견한 듯 착각하는 의식이 개입한다. 그러니까, 의식은 무의식이라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은 단지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보의 양이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다. 클라크 맥스웰은 임종 직전 맥스웰 방정식은 내가 아니라 '내 안의 어떤 것'이 발견한 것이고, 괴테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의식은 1도 기여한 바가 없으며, 칼 융도, 핑크 플로이드도 내 안에 내가 아닌 것이 산다고 하였다 (묘하게 위안이 된다). 실제 사례로, 주변이 시끄럽게 웅성대는 속에서 나의 이름을 누군가가 언급하면 갑자기 이를 인지하게 된다. 당신의 의식이 주변 볼륨을 열심히 줄여놓을 때 무의식은 당신을 위해 볼륨을 켜 놓은 덕분이다. 운전 중에 아이가 골목에서 튀어나올 때, 브레이크를 누르는 속도는 인지의 판단을 거쳐 오는 속도보다 빠르다고 한다. 심지어 오감 간의 전달 속도조차 달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도 매우 정교하게 짜집기된, 게다가 실시간이라고 착각하는 편집본에 불과하단다. 막혀 있던 작업이 꿈 속에서 해결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는데, 최근 대학원생 중 하나는 간절히 바라던 멋진 결과가 나오기 전 하얗고 탐스러운 밥그릇이 꿈에 보였다고 했다. 무척 좋은 꿈이라는데, 모르긴 몰라도 소위 돼지꿈이란 무의식이 축하의 잔치를 벌이는 게 아닌가 싶다 차라리 로또를 사보지. 인지기반 디자인에서 유명한 사례 하나는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보이는게 다르다는 것이다. 필자는 코스트코에서 유통기한을 찾을 때마다 무의식이 세팅되는 그 정교하고 오묘한 과정에 놀라곤 한다. 우리 주변시는 좁은 범위의 눈동자가 열심히 움직여서 전체를 보듯 착각하게 만드는데, 나의 의도에 따라 그 움직임의 방향이 어떻게 왜 바뀌는지 알 길이 요원하다.
아직 놀라기를 멈추지 마시라. 또 다른 저서는 뇌의 적응력, 전문 용어로 plasticity에 관한 것이다 [2]. 우리가 수천 년 전에 태어났다면, 그래서 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 벽돌을 옮기고 있다면, 과연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자아를 만드는 건 뇌의 사전 프로그래밍 외에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매우 크다는 말이다. 인간은 특히 후천적으로 학습하는 것의 비중이 압도적이라 태어나자마자 걷는 여타 가축들과 달리 그 양육 기간이 엄청나게 길다. 가장 경악할 만한 사례 하나는 뇌가 감각을 위한 영역을 할당하는 것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이다. 시각장애자 피부에 카메라에 보이는 이미지를 촉각으로 전달했다는데 어느 정도의 훈련이 지난 후 참여자들은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도대체 본다는 게 뭔지를 다시 생각해보다 금방 포기하는데 결국 시각도 깜깜한 블랙박스 안의 뇌에 들어온 전기신호일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준다. 특히나 카메라를 쥐어주어 손의 움직임에 따라 이미지 변화를 느꼈을 때 극적으로 더 발전되었다고 하니,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은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생각해 볼 기막힌 연구주제이다. 여기서 강화학습에서 튀어나오는 보상이니 기대니 하는 개념들이 하릴없이 떠오른다. 다음은 대부 리처드 서튼의 홈페이지에서 읽은 글이다.
"I start with the interaction between the intelligent agent and its environment. Goals, choices, and sources of information are all defined in terms of this interaction. In some sense it is the only thing that is real, and from it all our sense of the world is created." [3]
여기서 목표, 선택, 정보 소스라는 것들은 모두 다 뇌과학과의 접점이 존재한다. 우리가 포도당에 느끼는 달콤함은 에너지를 얻기 위함이고 분뇨 냄새에 역함을 느끼는 건 박테리아를 피하라는 진화의 지혜이다. 즉 목표가 행동과 감각을 결정한다. 뜬금없이 테슬라의 센서가 생각나는데, 카메라면 충분하다는 머스크의 판단은 인간의 운전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시각은 카메라가 커버하고, 뇌의 뉴런은 프로세서만 따라잡는다면 된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테슬라를 거울로 속여먹었던 재밌는 실험은 우리가 그대로 더 크게 당할 일이 머지 않았다 [4].
마지막으로 생물학적 지능의 최후의 보루 창의성이다 [5].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왜 그렇게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가? Eagleman의 설명에 따르면 두 가지 서로 상충하는 힘 사이의 긴장이 뇌에 존재한다. 하나는 새로운 정보를 당연하다고 축소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전자는 사실 관찰하기도 쉽고 이유도 나름 간단하다. 바로 우리가 한정된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보를 볼 때마다 놀라면 큰일나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전자의 힘이 지배적이면 모든 것에 심드렁해지는 상태에 도달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를 피하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쳇바퀴 돌듯 내 영역 내에서 루틴을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더 커다란 변화에 의해 삼켜지고 만다. 문제는 이러한 텐션이 정도는 다를지라도 다람쥐나 호랑이나 매 한가지일진데 유독 인간만 연구를 하고 기록을 하고 도시를 만드는 별난 짓을 하냔 것이다. 일단 저자들을 뉴런의 갯수차가 압도적이라고 알려주는데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생물지능의 경쟁은 노드의 갯수와 유연성, 연결성 등에 달려있을게다. 아 암울하다
이렇게 이유가 있는 불완전함 속에서, 치열하게 그 균형을 이루고 있는 뇌를 위한 디자인은 어떻게 다를까? 근래 보았던 멋진 사례 하나가 있다 [6]. 뇌의 중요성은, 그 뇌가 작동에 이상이 생겼을 때에 더 크게 나타난다. 필자의 학과는 아동가족학과와 함께 BK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이 곳의 교수님들은 인간의 발달과 가족의 영향에 관련한 정말 흥미로운 연구들을 수행한다. 발달 장애를 위한 앱 디자인으로 이들은 보통 일반인을 위한 앱과 어떻게 달라야할까? 커다란 볼륨, 큰 글자, 더 자세한 안내면 충분한건가?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먼저 소리와 시각 등으로 멀티모달 형식으로 정보를 전달하였을 때 오히려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컬러가 너무 자극적이라 모두 흑백으로 바꾸어 달라는 요구도 있었으며 작업 기억의 문제가 있었는지 장기간 작업한 문제에서 다른 문제로 전환할 경우 여지껏 배웠던 부분을 다 잊어버리기도 했다. 화살표라는 기호를 인식 못해 손가락을 디자인하였으며 드래그 드랍을 위해 시범 애니메이션이 필요했다. 그날 그날 컨디션에 따라 학습 가능한 시간이 달랐으며 스크린 터치에 대한 조절이 어려워 답답함에 기계를 과도하게 누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다 조절 가능해야 하는, 일반적인 디자인 가이드에 익숙했던 나에겐 거의 완전히 새로운 종을 위한 디자인 문제였다.
발표를 듣고 Q&A 시간에 손을 번쩍 들었다. "과연 AI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발표자는 이들에게 학습을 도와주는 보호자의 존재는 절대적이라고 말했다. 문제를 다시 읽어주고 시범을 보여주는 일, 학습을 성공적으로 했을 때 "우리 XX 잘했다" 라고 안아주는 행동, "까투리가 뭘까? 우리 예전에 봤었던 까치 기억나지?" 라면서 학습자와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주는 일들 등을 예로 들었다. 이는 현재 지배적인 사용자 중심 디자인을 넘어 가족 중심 디자인의 패러다임의 필요성으로 이어졌다. 우리의 다양한 뇌, 집단을 위한 디자인이라. 어쩌면 정상이라고 하는 우리들도 우리의 생각보다 더 훨씬 다양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Simon에 따르면 디자인이란 학문은 science of the artificial이다. 고맙게도 generative하다는 측면은 인간의 매우 고유한 근본적인 특성이다. 이전 글 '디자인의 과학'에서 밝힌 공학자들이 생각한 디자인의 정의가 기억나는가? 바로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뇌는 그 별난 창조적 특성 때문에 자연을 벗어나 자신만의 네버랜드를 건설했고, 그리고 그것에 놀라기에는 감당이 안 되어 끊임없이 당연시하고, 그것들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또다시 갈아엎는 짓을 반복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감각은 우리의 의식을 멍청할 정도로 속이고 있어서 가히 주변의 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물고기에 비견할만 하다. 이제 나는 길거리를 걸으며 말도 안되는 인공물들과 그들을 천연덕스럽게 쳐다보는 나의 뇌를 경악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과거 디자인 학술대회에서 보았던 keynote가 문득 떠오른다. "가전은 가구가 되고 싶어하고, 가구는 건축이 되고 싶어하며, 건축은 신이 만든 자연이 되고 싶어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신이며, 인간은 자신을 닮은 인공지능을 갈망한다." 정말 그랬다. 건축에게 자연은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자 궁극의 목표였으니까. 이 대통합의 순환만큼 자연과 인간과 인공물 간의 강렬한 통찰이 있을까. 우리의 뇌는 결국 첫 복제품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그 끝에 다다랐을 때 어떤 느낌일까. '보고 심히 좋아할'까, '다 이루었다'고 할까, 혹은 끊임없는 배신에 가슴 아파할까. 그 불완전함은 극단적인 적응력과 학습력을 위한 필연일까, 혹은 종의 운명을 건 투쟁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까.
[1] Incognito. David Eagleman. RHK
[2] Livewired. David Eagleman. RHK
[3] http://incompleteideas.net/
[4] https://www.youtube.com/watch?v=IQJL3htsDyQ
[5] 창조하는 뇌, David Eagleman & Anthony Brandt 쌤엔파커스
[6] https://dl.acm.org/doi/10.1145/3706598.3713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