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때부터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던 딸아이는 늘 머리가 땀으로 흥건했다. 봄, 가을은 물론 여름이면 두피에서 시작한 땀이 이마로 등으로 퍼져 울긋불긋 땀띠로 애를 먹곤 했다. 올해 중학생이 되었는데도 엉덩이가 가벼운 건 여전하다. 6월부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첫마디가 “덥다 더워” 소리고, 아직도 큰방 내 침대에 빌붙어 자면서 주인행세를 하며 더워 못 자겠다 툴툴거린다. 밤마다 엄마가 에어컨을 틀어주기를 은근히, 아니 대놓고 바란다.
최근 SNS에 돌아다니는 짤 하나를 발견하고 웃음이 터졌다. 제목은 ‘에어컨 안 트는 집의 특징’. 근데 거기 나오는 말들이 하나같이 에어컨 틀어달라는 딸에게 내가 하는 말과 판박이였다. 이를테면, 씻으면 시원해진다, 에어컨 오래 쐬면 감기 걸린다, 전기세 많이 나온다, 네가 전기세 내면 틀어줄게, 등등. 내 머릿속에 어릴 때부터 각인되었을 어떤 습성 또는 생활양식이 자연스레 배어 있는 말들을, 막상 문자의 형태로 확인하니 웃음이 나면서도 살짝 민망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 역시 어릴 때 어른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다. 특히 할머니는 덥다는 손주 투정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만있으면 하나도 안 덥다. 좀 참아 봐라.” 나도 어릴 적엔 꽤 설치고 다닌 모양이다. 물론 당시에는 세상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속는 셈 치고 잠시 가만있어 보기도 했지만, 어느새 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무엇보다 가만히 있는 행위 자체가 괴롭기 짝이 없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가만있기가 쉬워지는 걸까. 꼭 더위 이야기가 아니라도 말이다. 본능적인 감정 앞에 단순하고 곧이곧대로 반응했던 어린 시절과 다르게, 어른이 되고 보니 온갖 생각들이 우리의 즉각적인 반응을 가로막는다. ‘이제 6월인데 벌써 에어컨을 튼다고? 그 전기세는 어떻게 감당해? 요즘 목이 아픈 독감이 유행이라던데 이른 에어컨 바람에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씻으면 시원하겠구만, 편하게 에어컨 바람부터 쐬려 하고 저렇게 커서 뭐가 되려나.’ 찰나의 순간에 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에게 가만있으라고, 그럼 덜 덥다고 말하게 한다. 어느덧 나도 가만있으면 안 더운 나이가 되었나 보다. 힘들거나 괴로운 일도 좀 참고 견딜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어디서나 무슨 일에든, 가만있는 사람이 되어버릴까 두렵기도 하다.
클래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주인공 빌 펄롱이 사는 1985년의 아일랜드는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큰 기업들이 차례로 문을 닫고 직원들을 해고하는 등 경기가 꽁꽁 얼어붙은 혹독한 시절이다. 12월에 가까울수록 해를 보기도 힘든 우중충한 날씨는 더욱 한기를 띠고 사람들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한다. 삶이 참 팍팍하다. 펄롱은 이 시기를 조용히 엎드린 채 잘 버텨서 별 탈 없이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펄롱은 아내와 다섯 딸로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운이 좋은 사람이라 여긴다. 그런데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이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모른 척하거나 지나치지 못한다. 장대비가 내리는데 땔감을 주우러 나온 한 아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차를 태워주고 잔돈도 건넨다. 같은 상황 앞에 펄롱의 아내 아이린은 그건 다 술에 빠져 자식들을 내팽개쳐둔 부모 탓이라 말하지만, 펄롱은 그게 애 잘못은 아니지 않냐고 대꾸한다. 남의 아이 일이니 내 아이만 잘 건사하면 된다는 아이린을 보며, 펄롱의 마음에 공감하면서 결국 아이린처럼 행동할 나를 떠올린다. 나도 아이린처럼 평범한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대부분은 평범한 마음이 이긴다. ‘아, 귀찮아질 거 같아. 남의 일이잖아. 괜히 긁어 부스럼 될 거야.’라고. 더구나 나와 가족에게 불이익이 생길지 모를 일이라면 아마 못 본 척 넘길 가능성이 더 크다.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만 그뿐,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안타까움과 행동 사이의 아주 짧은 순간에 끼어드는 하고많은 상념이 결국에는 나를 행동하게 하는 대신 가만있게 만든다.
펄롱도 끊임없이 평범한 마음과 싸운다. 펄롱의 딸들을 볼모로 한 수녀원장의 은근한 협박을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펄롱은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가 갔을지도 모를, 그래서 자신의 생사가 불투명해졌을 수도 있는 수녀원에서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소녀 ‘세라’를 구한다. 펄롱과 어머니는 수녀원 대신 미시즈 윌슨이 만들어준 지붕 아래에서 보호받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미시즈 윌슨은 펄롱에게 친절을 베풀고 글자를 가르쳐주고 격려해 주었다. 또 미시즈 윌슨 댁의 농장 일꾼이자 펄롱의 아버지일지도 모를 네드는, 그가 선물한 보온 물주머니처럼 오랫동안 펄롱이 따스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로 인해 현재의 행복이 한순간에 사라질까 자주 불안에 떨곤 하지만, 그래도 펄롱의 어린 시절에는 자부심과 따스함을 알려준 어른이 있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한데 모여 이루어진 삶의 힘으로 펄롱은 평범한 마음을 넘어선다. 그 너머에서 그의 몸은 아주 가볍고도 당당하다.
유튜브 영상을 클릭한다. 언제나처럼 광고가 뜬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엄마를 잃은 8살 소녀가 부모님을 잃고 자신보다 더 어린 두 동생을 돌봐야 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돌을 주워 팔아야 끼니라도 때우는데, 다른 어른들에 밀려 오늘도 돌을 팔지 못했다. 독초인지도 모를 풀로 허기를 채우며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는 깡마른 여자아이를 마주하고 차마 ‘광고 건너뛰기’를 누르지 못하고 있다. ‘후원하기’ 버튼을 누르면 나타나는 화면 앞에서 나의 평범한 마음과 싸운다. ‘후원단체를 믿을 수 있나. 저 아이는 이제 광고에 나오니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내가 내는 후원금이 저 아이에게 온전히 전달될까. 매달 내기에 후원금이 좀 비싼데.’ 조금 전까지 뭉글뭉글 피어올랐던 아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하다. 평범을 넘어서지 못한 나의 마음이 ‘가만있으면 어때서’라고 속삭인다.
소설의 막바지에 펄롱은 세라를 데리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121쪽) 나는 나의 평범한 마음 너머에 당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