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의 장소들
하숙집 주인할머니는 천엽을 참기름에 찍어 내 얼굴에 들이미셨다. 하숙생으로 보이는 형은 반대편에 앉아 새 소주잔을 꺼내 소주를 따르고 있었다. 소주잔은 동아리 뒤풀이 때 보던 것보다 배는 커 보였다.
주인할머니는 소주는 가득 채워서 마셔야 맛이라며 소주를 반만 따르는 하숙생 형을 타박했다. 형은 이미 취해서 빨개진 얼굴로 웃으며 소주를 마저 따랐다. 나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척 소주잔을 받아 들어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만족스러워하는 주인할머니와 하숙생 형을 보며 천엽도 한 입 했다. 인생 첫 천엽이었다.
하숙집을 구하던 중이었다. '하숙방 있음' 명패를 보고 들어가 월세가 얼마냐고 물어보던 차였다. 하숙집 주인할머니는 대답도 하지 않고 술부터 들이미셨던 것이다. 하숙생을 꼬시는 할머니의 오래된 영업 노하우였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나 보았던 하숙집 술판에 신기한 감정부터 들었다. 그렇게 초면인 주인할머니와 하숙생 형과 큰 잔으로 소주를 연거푸 마쉰 뒤 다음 주에 입주하기로 결정했다. 월세는 30만 원이었다.
입주하기로 한 방은 베란다 방이었다. 방 이름이 베란다 방인 게 아니라 정말로 베란다를 개조한 방이었다. 1월이라 밖은 추웠다. 방에는 어찌어찌 바닥 난방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베란다였다. 추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깥 온도를 알 수 있었다. 서울 지역 월세는 보통 저렴해도 40만 원부터 시작이었다. 베란다 방의 월세가 30만 원인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가 소주부터 들이민 이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할머니의 음식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당신 말씀으로 근처 분식집을 오랜 세월 운영했다 하셨다. 장사가 꽤 잘되었다고 자랑하셨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녁마다 맨손으로 구워주시는 삼겹살부터 닭갈비, 떡볶이까지 너무 맛있었다.
대학 동기들은 우리 하숙집을 '할매네'라고 부르며 저녁마다 놀러 와 밥을 얻어먹고 갔다. 할머니는 하숙집에 친구들 부르지 말라며 한 마디씩 하셨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내 동기들까지 챙겨주셨다. 할매네를 부러워하던 동기는 할매네 옆 건물 하숙집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방 안 까지 들어와 깨워주셨다. 아침 공강이라고 매번 말씀드렸지만, 아침마다 깨우시고는 밥 먹으라 하셨다. 저녁에는 하숙집 정중앙에 위치한 부엌에 하숙생들을 불러 큰 잔에 소주를 따라주셨다. 많은 날에 나는 도망치듯 하숙집을 나와 대학 동기들과 어울렸다.
이듬해엔 입대를 했다. 2년이 지난 뒤 전역 후 다시 할매네 하숙집을 찾았다. 주인할머니는 이미 집을 팔고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했다. 근방에서 더 이상 할매네와 같은 30만 원짜리 하숙집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같은 값에 갈 수 있는 곳은 고시원 밖에 남지 않았다.
햄버거 가게 2층에 위치한 고시원의 월세는 40만 원이었다. 방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는 듯했지만, 그래도 고르고 고른 방이었다. 고시원의 주인아저씨는 나를 아저씨라 불렀다. 20대 초반이었던 내게 아저씨라는 호칭이 유쾌하진 않았다.
고시원에는 복도 끝에 식사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밥은 2-3일에 한 번씩 밥솥에 제공되었다. 반찬은 제공되지 않았다. 고시원 사람들은 식사공간에서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리를 피해 잽싸게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시원의 좁은 복도를 지나다 보면 가끔 열린 문틈 사이로 꿉꿉한 생활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중엔 아버지와 어린 딸이 함께 사는 방도 있었다. 방은 3평이었다. 그 아버지가 이른 아침 작업복을 입고 나서는 모습을 마주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인천의 한 작은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다. 복도가 길게 늘어선 90년대식 아파트였다. 복도중앙에서 위층 형 아래층 동생과 함께 뛰어놀았다. 자전거를 처음 배운 것도 아파트 복도에서였다. 복도에서 놀다 지루해질 때쯤이면 위층 형네 놀러 가 펌프게임을 했다. 저녁이면 아들을 찾는 엄마들의 목소리에 각자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곤 했다.
고시원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5개월을 채 살아내지 못하고 고시원을 나와 경기도 본가로 돌아갔다. 고시원에서는 중이염을 얻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