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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Nov 01. 2024

역제안 - 5





이지연 건 이후 영종은 발목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대표에게 내근을 요청했다. 영종은 일주일간 책상 앞에 앉아 회사의 내부 사정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새 또 다른 일을 맡아 센터를 들락날락하는 성 실장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일주일 후, 영종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조수석에 앉은 성 실장에게 커피를 건넨 영종이 차의 시동을 걸고 도로로 나섰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해 하늘이 붉게 물든 시간이었다. 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피부과에 도착할 즈음 영종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실장님은 보면 늘 일만 하시고. 취미 같은 건 없으세요?

 “취미? 쓸데없이 그런 걸 해.”

 “사람이 그렇게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실장님은 이지연처럼 뭐 몰래 하는 취미 생활 같은 거 없어요?”

 뼈 있는 그 말에 손에 든 커피를 마시려다 멈춘 성 실장이 고개를 돌려 영종을 빤히 보았다.

 “센터 사람들도 성 실장님이 이혼해서 혼자 사신다는 거 빼고는 다들 아는 게 없더라고요. 사람들이 참, 관심이 그렇게 없어.”

 “… 뭐?”

 “그래서 제가 좀 알아봤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성 실장님,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다 외국으로 보내시데?”

 “… 너 지금 뭐 하냐?”

 “아니, 무슨 돈을 다 이렇게 해외로 보낼까? 그래서 이것저것 또 봤더니, 외국에서 공부하는 자제분이 계시더라고요? 아드님 하고 따님 하고. 세인트 존스 하이스쿨? 아주 명문 고등학교 같던데. 그거 다 학비죠?”

 짙은 화장을 한 성 실장의 얼굴이 격하게 일그러졌다. 그새 목적지인 피부과 앞에 도착한 영종이 차의 기어를 바꾸고 시동을 껐다.

 “실장님이 어떻게 번 돈으로 자기들이 공부하는지? 자제분들은 아직 모르죠?”

 영종이 뒷좌석에 있는 태블릿을 집어 들어 성 실장에게 건넸다. 성 실장이 화면에 있던 동영상을 재생시키자 며칠 전 자신이 박경민이 있던 모텔 방에 들어가서 벌어졌던 상황이 재생됐다. 한동안 영상을 지켜보던 성 실장은 남자의 뺨을 때리고 협박하는 자신의 모습이 새삼 역겹게 느껴졌다.

 “실장님. 제가 제안 하나 할게요.”

 굳은 표정으로 태블릿을 보는 성 실장에게 영종이 말했다.

 “제가 지금 이지연한테 가서 돈 받아올게요. 받는 돈은 아시다시피 십억 그대론데, 우리 분배만 좀 다시 해요. 오 대 오. 실장님 오억, 나 오억.”

 영종의 제안에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던 성 실장이 지그시 경고했다.

 “…쫑. 내가 전에도 이야기했지. 너 그렇게 뭐든 거저먹으려고 들다간 언젠가 탈 난다고.”

 “뭐, 어렵게 먹을 거 있어요? 그리고 실장님. 모르시나 본데 저 오늘부로 센터 관뒀어요. 이제 직장 상사도 아닌데 말 좀 예쁘게 해 주세요. 이름도 제대로 좀 불러주시고. 쫑이 아니고 영종! 고영종!”

 씩 웃으며 차에서 내린 영종이 문을 쾅하고 닫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피부과 건물로 걸어갔다.

 차 안에 홀로 남겨진 성 실장은 분하다는 표정으로 영종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부터 꺼냈다. 며칠 전 영종이 보낸 링크를 아무 생각 없이 클릭한 게 화근이리라. 그때부터 놈이 모든 걸 봤겠지. 이체 내역, 문자 내용 등등.

 스마트폰에 설치된 스파이웨어를 찾아 삭제한 성 실장은 내친김에 사진첩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외국에서 학교생활을 하는 그녀의 아들과 딸의 사진이 수두룩하게 있었다. 전에 보지 못한 애틋한 표정으로 성 실장이 그 사진들을 넘겨 볼 때였다.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멈칫하고 그 낯선 번호를 한동안 바라보던 성 실장이 고개를 들어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안내하는 가드를 따라가며 영종은 머릿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그렸다. 내 이름을 거는 게 좋겠다. 흥신소나 심부름센터라는 이름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니까 민간 조사라는 이름을 쓰는 게 좋겠다. 고영종 민간 조사 사무소. 불륜 사건 의뢰는 일절 받지 않는다. 실종된 사람을 찾거나. 기업 스파이를 색출하거나. 미제로 남은 살인 사건을 재수사하거나. 오직 가슴 뛰는 일들만을 의뢰받아 처리한다.

 자신 앞에 펼쳐질 설레는 일들을 마음껏 상상하며 영종은 가드가 안내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지연이 세 남자와 세상 재미있게 놀던 바로 그 방이었다. 이미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이지연이 그 특유의 죽은 눈으로 들어오는 영종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녀 앞에 마주 앉은 영종이 얼굴에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사정이 생겨서 저 혼자 왔습니다. 돈은 저한테 주시면 돼요.”

 이지연이 잠자코 영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방 안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가 불편했던 영종은 아직 자신이 그녀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인시키고 싶었다.

 “실장님이 돈 조금 덜 받더라도 방송국에 팔고 확 터트릴까 하는 걸 제가 옆에서 극구 말렸습니다. 걱정 마세요. 지금 그 자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랑 성 실장밖에 없으니까. 아직은.”

 능청을 떨며 말하는 영종의 얼굴을 그저 뚫어지게 바라만 보던 이지연이 마침내 무거웠던 그 입을 뗐다.

 “영종 씨라고 했죠?”

 “네.”

 “제가 제안 하나 해도 될까요?”

 “…네?”

 “영종 씨. 여기서 일 해보는 건 어때요?”

 갑자기 받은 황당한 제안에 말문이 막힌 영종을 바라보며 이지연이 말을 이었다.

 “아, 다른 손님은 안 받아도 돼요. 영종 씨는 특별하게 내 개인 룸에서, 나랑만 놀면 되니까.”

 이어진 이지연의 말에 대번에 불쾌해진 영종이 한껏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내가 그런 일 할 놈처럼 보여?”

 “….”

 “씨발. 내가 개호구로 보이냐고!”

 큰 소리가 들리자 밖에 서 있던 가드들이 하나둘씩 방 안으로 들어와 영종의 몸을 붙들었다. 이어 이지연이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가드들이 영종의 두 팔을 묶었다. 거칠게 저항하던 영종이 이지연을 노려보며 을러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사라지면, 성 실장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이지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 성 실장이라는 분은 그런 분이에요? 같이 일하던 파트너가 사라지면 어떻게든 다시 찾아내려는 사람? 아니면.”

 한껏 긴장한 영종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직감했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고. 이지연이 그런 영종을 보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10억쯤 더 받으면 그대로 입 다물 사람?”

 같은 건물 5층의 피부과에 들어간 성 실장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작은 개인 관리실로 들어갔다. 무릎을 굽혀 침대 아래를 가린 하얀 커튼을 걷자 그 안엔 커다란 검은 가죽 가방이 하나 있었다.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오만 원권 지폐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침대에 자신의 노트북을 올리고 방 밖으로 나가려던 성 실장이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인 작은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곧 그 문을 외면한 성 실장이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양옆에서 가드의 부축을 받은 영종이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간 영종은 전에 발견했던 그 전기실이라고 쓰인 문 앞에 섰다. 그 거대한 자물쇠에 맞는 커다란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다소 믿기 힘든 광경이 영종의 눈앞에 펼쳐졌다.

 긴 복도의 양옆에 철창살로 구역이 나눠진 방들이 나란히 있었다. 창살 틈새로 색이 바랜 이불과 조악한 배게들이 보였다. 마치 시설이 극도로 열악한 감방 같았다.

 영종을 끌고 복도 끝에 도착한 가드가 커다란 철문을 열었다. 눈부신 조명이 켜진 그 방 안에는 이미 많은 남자가 있었다. 토끼 분장을 한 남자. 황금 가면을 쓴 남자, 발가벗고 얼굴과 온몸에 하얀 분칠을 한 남자….

 가드가 영종을 방 안으로 내팽개쳤다. 그대로 바닥에 나뒹군 영종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 자신의 바로 옆에 웅크리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몸에 빨간 망토를 두른 그 남자는 초점 없는 눈으로 영종을 바라보았다. 낯이 익은 얼굴이다. 어디서 봤더라…. 영종은 곧 며칠 전 보았던 전단을 떠올렸다. 아, 그 사라진 대학생!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영종의 머리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곧 고개가 뒤로 크게 젖혀진 영종의 목에 적갈색 개 목줄이 채워졌다. 쏟아지는 조명에 눈이 부신 영종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나비 모양 반가면을 쓴 이지연이 자신을 옭아맨 목줄을 잡고 서 있었다. 그녀의 죽은 눈깔에 생기가 돌았다. 곧 입꼬리를 한껏 올린 그녀가 크게 외쳤다.

 “가자! 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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