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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픽 오늘의 한 구절: 연착륙의 계절

by 문혜정 maya




카페에서 캐럴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장 언니는 약간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를 틀면서 나에게
11월 1일부터는 꼭 캐럴을 튼다고 말했다.
딱히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나 로망이 있어 보이지는 않아서
이유를 물으니
지금 뭘 해야 하는지
누가 명확하게 정해주는 것 같아서
좋다고 대답했다.

<타로카드 읽는 카페, 불운의 시간을 견디는 방법 중에서>




소설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소설 속 이야기에서 실제와 같은 현실감을 느끼면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거, 작가의 실제 이야기인가?'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이 있는 걸 보니 그런 경우가 그리 적은 것 같지는 않고요.

'타로카드 읽는 카페' 속 세련의 마음에 대한 묘사에서 종종 그런 현실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세련의 안쓰러운 이야기를 읽은 뒤 제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기도 하고, 저에게 외로웠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기도 하더라고요.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타로카드 읽는 카페'는 완전한 허구의 소설이며 저는 세련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일단 저는 동생이 없어요. 언니나 오빠도 없는 외동딸입니다. 아빠도 건강히 살아계시고, 알콜 중독인 세련의 엄마와는 다르게 저희 엄마는 술을 전혀 못하세요.



그러나 '타로카드 읽는 카페'가 온전히 상상으로만 이루어진 이야기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소설 속에서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 가장 많이 투영된 캐릭터는 주인공 세련이 아니라 카페의 사장언니입니다. 대부분의 주요인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음에도, 끝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그저 '사장언니'로만 불리는 그녀는 저와 많은 부분이 닮아있죠.

오랫동안 카페를 했던 것, 세련과 비슷하게 오래된 연인이 있었던 것, 그리고 매년 11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는 것.



학생 시절에는 누가 나에게 학생으로서 너는 지금 이것을 해야한다,고 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귀 밑 3cm 단발머리를 유지해야한다던가, 바지는 땅에 끌리지 않게 복숭아뼈 정도의 길이로만 입어야 한다던가, 흰 운동화만 신어야 한다던가, 명찰을 항상 달아야 한다던가, 19세 미만 관람 불가의 영화를 보면 안된다던가.

그때는 해야할일과 하지 말아야 할일 모두 다 아주 세세하게 정해져 있었어요.

뛰면 안돼, 손톱을 짧게 잘라야해, 책상위를 항상 깨끗하게 유지해야해, 급식을 남기거나 가려먹으면 안돼.

약간 숨막힌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아예 무시하거나 어길만큼 담이 큰 아이는 아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만들어 놓은 모든 룰들을 그대로 따르면서 생각했어요. 어른이 되면 다 내 마음대로 해야겠다.

머리를 엉덩이까지 기르고, 빨간 구두에 엉덩이만 겨우 가리는 미니 스커트를 입고, 손톱에 울긋불긋한 매니큐어를 칠하고, 밤을 꼴딱 새면서 심야영화를 보고, 내키지 않으면 마음대로 강의를 째고 벚꽃구경이나 가고.

지금 생각하면 그 마음대로 한다는 게, 결국 어른들이 하지말라고 했던 걸 죄 반대로 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내 개성을 억누르지 말라고 하면서 하는 짓들이라는 게 결국은 다 몰개성한 일들이었어요.



어른이 되자 정말 거짓말같이 모든 규제가 사르르 녹아 사라졌죠. 저만 그랬던 건 아닐거에요.

스무살, 스물한살......

못하게 했던 것들을 마음껏 누리면서 이게 바로 어른의 맛이라고 좋아했던 때도 있었죠.

그러나 스물 다섯, 서른, 서른 다섯, 마흔......

시간이 지나자 어린 시절 나를 답답하게 했던 수많은 것들이, 그것들이 주던 답답한 감정들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흐릿해져 갔습니다.

그까짓 머리 귀밑 3cm든 3m든, 내일 뭐 입을지 뭐 먹을지 고민하는 게 더 지겨우니 차라리 그때처럼 매일 입을 교복과 급식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죠?



그래서 11월 1일이 좋았던 것 같아요.

1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 올해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잘 모르겠고, 때문에 늘 불안하고 답답했다면 11월 1일부터는 명확하게 '아, 오늘 부터 연말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거죠.

올 한해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냈다고 안심할 수 있잖아요. 조금 이른 올해의 리뷰를 해보고, 또 조금 이른 내년의 계획도 세워보고요. 그러다 보면 남들보다 조금 더 여유있게 살아가고 있는 듯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팽팽히 당겨져 있던 시간을 혼자만 고무줄처럼 주욱 늘려 놓은 것처럼.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조금 늦은 것 같고, 끝내기엔 조금 이른 것 같은 애매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누구보다 빠르게 새해를 준비하는 걸로, 누구보다 여유롭게 올해를 마무리 하는 걸로.

일단 남은 올해의 두달을 따뜻하게 채워줄 캐롤 플레이리스트부터 만들고요. 무엇으로 채워야할지 모르겠다면 제가 몇개 정해 드릴게요. 아묻따 그냥 넣고, 그냥 틀고, 그냥 해보자고요.


첫번째 노래는 당연히, 머라이어 캐리!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두번째는 냇 킹 콜의 The Christmas song,

조금 신나고 싶다면 아리아나 그란데와 켈리 클락슨의 Santa can't hear me,

부드럽게 이어가고 싶다면 마이클 부블레의 It's beginning to look a lot like Christmas,

마지막으로 하나 꼭 더하고 싶은 건 Winter wonderland!

이 노래는 누가 부른 버전이든 다 좋은데 성시경씨의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제가 만든 올해의 트리 사진과 함께 타로카드 읽는 카페의 새로운 해외 출간 오퍼 소식을 또 전합니다.

이번에는 독일이에요.

벌써 유럽 5개국(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이라니 가끔 현실감이 없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매주 하나씩 새로운 나라에게 제안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매우 놀랍기도 하고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여유로운 연말의 시작이 되시길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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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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