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감정적으로 얽히지만 않으면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타입이다.
오히려 자신의 평판이나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괜한 예의를 차리거나
빙빙 둘러 얘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 반대의 사람에게는
불편하고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역시나 감정적으로 얽히지만 않는다면
꽤나 쿨하고 합리적인 관계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타로카드 읽는 카페, 불완전한 시작 중에서>
요즘 MBTI 얘기 많이 하시죠?
아이스 브레이킹 주제로 이만한 얘기가 없는 것 같아요. 서로 어떤 타입인지 따지고 파악할 필요도 없이 대충 저런 사람이겠군!이라고 짐작하기도 쉽고요.
저는 사실 첫만남에 MBTI보다는 혈액형을 묻는 것으로 성격을 파악했던 시기의 사람인데요, 그때도 그런 얘기가 많았죠. 사람의 성격을 어떻게 네가지로 나눌 수 있느냐,라고요. 그 이후로 수십년이 지나 이제 열여섯가지 정도로 유형이 늘어나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회의적이 사람들은 그렇게 묻죠. 인간 유형이 겨우 열여섯가지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이전에 쓴 글들을 보셨다면 제가 인간 카테고리설에 대해 이야기 했던 걸 기억하시겠죠?
저는 혈액형이나 MBTI의 과학적 신뢰도와는 별개로 인간의 유형의 무한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열여섯가지는 넘을 수 있지만 셀 수 있는 정도로 구분하여 덩어리를 만들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히 똑같은 사람은 없더라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덩어리는 있다고 믿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고 치료한다는 게 가능할 수가 없잖아요.
위의 구절을 쓸 때에는 감정형 인간(F)과 사고형 인간(T)을 생각하며 썼어요. 세련은 진주를 직선적이고 쿨하며 합리적인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죠. T형 인간이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특징으로 일하기는 좋지만, 인간적인 관계를 쌓기엔 좀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했고, 어차피 직업적으로 얽힌 관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관계로 발전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죠.
물론, 그런 생각까지 했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인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자신의 무의식을 반영한 것 아닐까 싶지만요.
사람들은 왜 MBTI에 열광할까요?
아니, 이제는 열광의 시기를 지나 자기 소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SNS프로필에 MBTI유형을 적어 놓는 경우를 심심찮게 봤거든요.
'내가 이런 사람이야'를 알파벳 네개로 소개하는 것. 너무 효율적이지 않나요?
어디서 주워듣기로는 외국에서는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한국에서는 자기의 MBTI를 아는 것이 거의 혈액형을 아는 것처럼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는데 말이죠.
제 생각에는 MBTI의 그 효율성이 한국사람들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효율성과 신속성, 가성비를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더불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고, 상처를 받고 싶지 않은 배려와 방어기제도 함께 하는 것 같고요. '내가 나쁜 의도가 있어서 너에게 상처를 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 그래'라던가, '나는 이런 것들에 쉽게 상처 받는 사람이야. 나에게 다가올 때는 그런 것들을 배려해줘'를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전에 미리 풀어 놓는 거죠.
우리는 왜 이렇게 타인으로부터 받는 상처에 예민할까?
MBTI의 유행에 대해 제가 두번째로 궁금했던 것입니다. 왜 서로를 진짜로 알기 전부터 그런 것들을 미리 걱정하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조심스러운 접근에 대해 회의적이기도 하더라고요. '진짜' 알기 전부터 누군가를 예단하고 그 사람에 대한 결론을 정해 놓는 것 만큼 바보 같은 것이 없다고요. 겨우 열여섯가지로 나눠놓은 성격유형이 진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실패를 두려워해서 시도도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죠. 지나친 조심이 오히려 기회를 박탈하는 건데, 진취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이건 어리석은 일이거든요. 그 말도 맞죠. 일어나지 않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미래를 결정하는 거니까.
하지만 이미 비슷한 상황에서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거에요.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도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일어날 것이 뻔한 실패에 굳이 좌절할 필요가 없잖아요. 바보도 아니고 말이에요. 실패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말하겠죠. 그래도 해봐. 그래도.
어떤 것이 옳다고 땅땅땅, 결정하고 싶지만 이건 누가 절대로 맞다고 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어떨 땐 맞고, 어떨 땐 틀린 얘기에요.
저는 어느 한쪽으로 정해놓지 않고 그냥 '너는 그런가 보지'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뒤에 붙을 말은 그때 그때 편의에 따라 고르고 있어요. '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까?'를 선택할 때도 있고, '근데 너 뭐 돼?'를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마흔이 넘고부터는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는 거 같아요. ㅎㅎㅎ
그리고 그렇게 어느 한쪽으로 내 방향을 결정하면 그냥 그대로 둬요. '다시 생각해 볼까? 아니야, 네가 뭔데. 아니야, 그래도 내가 틀릴지도 모르는데 다시 고민해? 아니야, 꺼져버리라 그래' 이러면서 오락가락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누군가 실제로 내게 상처를 입히는 것보다 혼자 그렇게 끙끙거리는 시간들이 나를 더 괴롭힌다는 걸 알거든요.
시간이 지나 내 생각이 진짜 틀렸다는 게 분명해지면, 그때 다시 바꾸면 되죠. 그 정도의 유연성은 남겨두는 게 좋습니다. 왕고집쟁이 벽창호인간으로 늙고싶진 않다면요.
내 생각을 바꿔야할 때는 괜히 틀린 걸 감추거나 숨기려 하지 말고 그냥 쿨하게 받아들이는 거에요. '어, 내가 잘못 생각했었나 보네'라고 가볍게요. 육체나 영혼이나 너무 무거우면 기동성이 떨어지는 법이니까요.
인생은 끝날 때까지 걷거나 달리거나, 돌아다녀야 하는 거잖아요. 어딘지 모를, 어딘가 있을 나만의 목표와 꿈을 향해 멈추지 않고. 그러니 그 정도 변덕쯤은 별 것 아닌 걸로 서로 받아들여 주면서 살자고요.
오늘의 문구가 실린 챕터의 카드는 바보(the Fool)카드 입니다.
실제로 멍청한 바보를 뜻한다기 보다 순수함과 열정을 뜻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앞뒤 재지 않는 순수와 열정은 우리를 나락으로 이끌기도 하죠.
원작에 있었던 올드잉글리쉬 타로도 똑같이 바보 카드였어요. 의미도 비슷합니다.
새로운 시작과 열정을 뜻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판단이 없는 행위는 해맑게 낭떨어지로 향하는 것과 같다고 보고 있어요.
타로카드에서 바보처럼 산다는 건 그런 거에요.
시작이 두렵지 않은 것. 누가 뭐라든 내 순수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 그때 그때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것.
딱히 나쁜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렇게만 산다면 그건 바보 같은 거란 거죠.
약간의 절제와 계획만 더하면 이상적인 삶이 되지 않을까요?
바보처럼 가볍게, 그러나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뚝심있게.
이렇게 보니까 그렇게 어렵진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