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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 Nov 23. 2023

주연에서 조연으로


아기와 하루종일 집에 있다가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는 힘듦이 찾아오는 그런 날이 있다.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고, 아기와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면 이사를 갈 예정이라 예전에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사 오려고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있는데

옆에 같은 직장동료로 보이는 세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자라섬 페스티벌에 간다는 얘기를 했다.

매년 10월이 되면 열리는 ‘가평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시간 되면 가려고 항상 기억했던 페스티벌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아기엄마가 되어 이전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흠뻑 느껴졌다.


23년 1월 말 출산을 했다.

예정일보다 3주 일찍 진통이 와서 긴급 제왕절개를 하게 되었고, 2.2kg의 작고 소중한 아기가 태어났다.

결혼하고 나서 1년 1개월 후 출산까지 하게 됐다.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했기에

내가 기혼자이고,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에

뽕에 취한 듯 홀려있었다.

아기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백일 되기도 전에 둘째를 낳을까라는 생각을 할 만큼.


뽕을 맞은 것 같은 행복감이 서서히 사그라지면서

왜들 육퇴 후 먹는 맥주의 황홀함을 얘기하는지 이해가 된다.

일주일에 하루 남편이 쉬는 날 외출을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운동하는 시간 외에는 아기와 함께 한다.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놀아주고, 먹을 걸 만들고, 설거지하는 일상의 반복.


아기가 밤에 분유를 먹다가 자는 날이면

손톱가위와 네일트리머를 대기해 놓고 아기 손톱을 자른다.

아기손톱이 길고, 날카로워져서 내 얼굴과 목에 상처가 나서

오늘은 꼭 손톱을 잘라야지 생각하던 날이었다.

마침 분유를 먹다 잠에 들어

내 무릎에 아기 머리를 두고서 손톱을 잘랐다.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거실에

먹다 남은 이유식으로 난장판이 된 식탁과

목욕하고 나서 빨아야 할 옷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에서

한껏 목과 등을 구부려 30분째 아기손톱을 자르고, 다듬는 내 모습이

육아하는 엄마인생의 축소판 같이 느껴졌다.


하루종일 아기의 귀여운 장면들을

쉴 새 없이 사진 찍어서 가족들이 볼 수 있도록 업로드하는데

아기 손톱을 자르는 내 뒷모습은 아무도 사진 찍는 사람이 없다.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 없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 나 잘났다고 나서지 않으면서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묵묵히 조연으로 사는 게 부모였다.


이제 10개월이 된 아가야

엄마가 되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조연의 역할을

알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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