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01
한동안 안 보던 타로 리딩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고작 카드 몇 장으로 내게 무슨 조언을 해줄 수 있겠냐 싶지만, ‘그래도…’하는 마음을 져버리기 쉽지 않다. 화면 아래에서 뻗어 나온 손이 카드 몇 장을 뒤집고, 그 위에 그려진 그림과 몇 개의 단어 속에서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져 올린다. 그것을 다시 내 멋대로 해석하며 위안을 얻고 불안을 덜어낸다. 아주 잠깐뿐이지만.
최근에 본 몇 개의 영상들이 내게 던져준 말은 이것이다.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최근에 좀 갑갑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았나요? 현실과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내려놓은 게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움직이세요.” 화면 너머의 목소리는 정말 기가 막히게도 내가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을 전한다. 이 집 용하네. 감탄과 함께 ‘좋아요’를 누르며, 여름의 시작과 함께 내 머릿속을 줄곧 맴돌던 단어 하나를 다시 되뇐다.
도망. 그래. 도망가자. 도망칠 수 있다. 도망치려면, 도망을 가야지.
2024년 하반기 나의 과제이자 키워드는 ‘도망’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안정을 추구하기로 하고 택했던 일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나는 이 트랙에서 오래 달릴 수 없다. 돌부리 없이 탄탄하게 다져진 안정적인 길. 심지어 곧게 뻗어있어 그대로 달리기만 하면 되는데, 달릴수록 발이 아프고 지친다. 바뀌는 풍경 하나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빈 경기장의 트랙을 몇 바퀴씩 돌고 있는 기분이다.
박수쳐 줄 사람은 없고, 호흡을 가다듬고 속도를 늦추지 말라며 호통치는 코치의 호루라기 소리만 귀에 울려 퍼진다. 이렇게만 달리면 42.195km를 순탄하게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완주할 자신이 없다. 더럽게 재미없고 보람도 없다고요. 앞으로 몇 바퀴를 더 뛰어야 저 무지막지한 숫자를 다 채울 수 있는 건지. 무거워진 다리를 어기적어기적 간신히 옮겨가며, 내게 다른 길은 없는지 주위를 둘러본다. 내 발과 눈과 허파와 심장은 어떤 길을 걷고 뛰어야 안정을 느낄지 나 또한 돌아본다.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중요한 건 기록이 아니라 완주 그 자체 아니겠느냐고. 나를 타일러가며.
잘 닦인 경기장 트랙보단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흙바닥이 좋다. 가끔 돌부리에 걸리고 좁아진 길에 뜀박질을 멈추고 느리게 걷게 되더라도. 몇 바퀴를 돌아도 같은 풍경을 보여주는 경기장보단 제멋대로 가지를 뻗어 올린 나무가 울창한 숲길이 좋다. 마침내 당도한 결승선 너머엔 거창한 시상대에 홀로 올라선 내가 아니라 볼품없는 오두막 안에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을 끌어모아 오순도순 구겨 앉아 있는 내가 있길 바란다. 돌고 돌아갈지라도.
내게 맞는 길은 알겠다. 숲길. 숲길을 걷고자 한다면 일단 경기장을 나서야 한다. 그러나 도통 출구가 보이질 않는다. 이제 완전히 내 의지에서 벗어나 기계처럼 움직이는 발을 차마 멈추진 못하고 여전히 트랙을 빙글빙글 돌며 조급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늘 보아왔던 같은 풍경 속에서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던 출구를 찾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잠시 멈춰 서면 보일지도 모르는데. 귓가에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겁을 먹는다. 지칠 대로 지쳐 저 멀리를 보아야 할 시선이 발아래로 곤두박질치는데도 여전히 발은 움직인다. 아주 느리고, 아주 무겁게.
그러나 도망치려면 도망을 가야지. 주저앉아 있으면 영영 경기장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어찌 됐든 나는 뛰어야 하고, 뛰지 못한다면 걸어야 한다. 비틀거리는 발로 금이라도 밟고 트랙 밖의 인공 잔디라도 밟아보면 숲길로 향하는 작은 문이 보일지도 몰라.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이것저것 해본다. 돌파구를 찾겠다는 몸부림. 그 길이 맞는지도 모른 채 코스를 벗어나 허우적대는 발걸음. 그 발걸음 끝에 도착하는 곳엔 무엇이 있을까. 벽일까. 출구일까. 아니면 또 다른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일까. 마침내 숲길에 닿아도 그 끝엔 정말로 오두막이 있긴 한 걸까.
타로가 말하길, 안 될 것 같다고 포기하지 말고, 처음부터 완벽한 결과를 낳겠다는 생각 말고 일단 나아가란다. 네가 가는 그 길이 아마 맞을 거라고. 굳이 내가 아닌 누구에게 하더라도 적당히 위안이 될 그 막연한 말을 지침 삼아 어쨌든 트랙에서 몸을 돌려 나아간다. 막연한 위로라도 지금 내게는 꼭 필요하다.
도망가는 경로를 기록해 보기로 했다. 어설픈 지도라도 그리면 설령 그 길이 아니었더라도 되짚어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록이 쌓이면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단 기대도 있다. 이야기의 결말은 어떨까. 결국 출구를 찾아 도망쳤을까? 아니면 벽에 막혀 또다시 주저앉았나. 아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