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학교 앞 관사에서 살 때는 아주 나태했다. 힘듦의 정도가 삶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1년, 거주지를 옮기고 얘기가 달라진다. 아이 유치원, 남편 직장까지 완벽히 옮겨갔지만 내가! 거주지 근처로 이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즉, 가까웠던 그 학교를 멀리 다니게 되었다는 말이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편도 300미터에서 93킬로미터로 늘어났다. 걸어서 십 분이던 학교를 차로 한 시간 반 운전했다. 그것도 매일 아침 안개가 잔뜩 끼는 고속도로를 100킬로를 밟아야 한시간 반. 집을 구하는 것도 고려해봤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출퇴근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휴일과 방학을 제외한 200여 일 동안 왕복 180킬로미터를 달린다. 주님과 함께.
매일 세 시간의 운전길은 어떠했나. 새벽6시 나를 따라 일어난 죄로 아빠가 일어날 때까지 한 시간은 혼자 티브이를 봐야 하는 딸 프란치스카. 출근하기 전에 아이와 주모경을 하고 출근했다. 운전석에 앉아 다시 기도하고 출발했다. 노래도 듣고 평화방송도 듣고 강의도 들었다. 데이터로 무제한으로 바꾸고 유튜브로 좋은 강의들을 찾아들었다. 고속도로에서 휴대폰을 조작하다간 빨리 주님 곁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유튜브 강의를 하나 틀면 그다음부터는 알고리즘에 맡겨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4월의 어느 날 최황진 라파엘 신부님 강론이 알고리즘에 걸려들었다. 쏙쏙 알아듣기 쉬운 성경이야기가 가득했다. 최 신부님 강론을 듣기 시작하자 다른 신부님의 강론 강의가 쏟아졌다. 그리고 강론에서 말씀하신 대로 듣는 마음, 겸손한 마음,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미사는 아직 가지 않았다. 그러나 강론을 들을수록 미사를 가야 될 것 같은 마음이 일렁였다.
9월이 되니 체력은 더 바닥나고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 몸을 이끌고 저녁 미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참 이상했다. 더 늘어지고 싶었지만 한번 저녁 미사를 따라갔던 딸아이가 나를 2021년 하반기 내내 미사 가자고 이끌었다. 허리도 아프고 장염도 걸리고 안 아픈 곳 없었던 한해였지만 미사는 갔다. 12월로 갈수록 학교일은 더욱 힘들었고 돌발상황이 커져갔지만 나는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신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말, 하느님께서 나를 거주지 인근 지역 직속기관 파견교사로 발령 내셨다. 가능성 없어 보이는 스펙을 면접으로 뒤집었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지금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늦게 퇴근한다. 토요일도 출근하고 갑작스러운 출장도 많고 조직문화도 학교와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때 하루하루 고속도로 위에서 살려만 주시면 최선을 다해 살겠다던 내 기도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일까?감사하게도 지금껏 만나보지 못했던 상사와 동료들과 매일 새롭게 배우며 함께 일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물론 몸이 몇 년간 서서히 망가진 탓에 조금만 일해도 금방 방전된다. 하지만 그 기도를 잊지 않는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 최선을 다할 만큼의 에너지를 매일 주심을 안다.
광야를 지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 속에서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 내려주셨던 것처럼, 아직 형편없는 체력으로도 대출도 갚고 아이와 공연도 보고 산책도 하며 하루를 살게 해주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최 신부님의 강론은 이제 업데이트되는 것 말고는 다 들어서 요즘은 이준 신부님과 성경을 읽고 있다. 레위기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걸 어떻게 읽나 싶었는데 듣는 도중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여러 가지 일을 해낸 것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도우셨다는 구절이 정말 많이 나온다. 격하게 공감했다. 하느님은 내가 최선을 다하도록 도우시는 분이맞으니까.
죽기 싫어서 기도했더니, 저의 뭔가 부족한 기도를 들으시고 저를 미사로 초대하시어 최선을 다하면서 살도록 도우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Fin.
해 질 무렵 잠옷 입고 엄마와 산책을 가장 좋아하는 프란치스카. 하루 종일 너와 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