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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 Sep 14. 2022

십오 년째, 미역국 끓이는 당신께

마누라가 드리는 공개편지


여보 안녕. 날세 마누라. 당신도 참 바쁜 하루를 보냈지? 나도 평소보다 일이 엄청나게 많은 날이었어. 하루에 하나만 있어도 꽤 커다란 행사가 네 개는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걸 마치고 진짜 정신없이 퇴근하는데 고속도로에서 접촉 사고가 났더라고? 타이어가 굴러다니고 유리파편도 있긴 한데 뭔지 잘 모르겠으니 접촉사고라고 할게.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늦었지.


집에 왔는데 소고기 푹 우려내 흐물거리게 끓인 미역국에 밥 한 술. 그리고 딸아이가 불러주는 생일 축하노래와 당신이 차려준 저녁밥(술)상에 우리는 각자의 일터와 아이의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적절히 쏟아내며 대화를 나누었어.


감사하더라. 십 년 넘게 변함없이 약속을 지켜주고 나를 무조건 사랑해주는 사람이 둘씩이나 있다는 것이. 아무튼 오늘은 내 생일이었고 당신은 십오 년째 미역국을 끓여주고 있다는 얘기야. 우리 집에 말하는 종달새가 태어난 이후 그 미역국은 '아빠의 특제 미역국'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갖게 됐지. 당신은 나와 다투었을 때에도 내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끓여주었지만 나는 한번 당신의 생일을 건너뛰었다는(심지어 그 추운날 밖에 나가라고 했었음). 그런 역사가 박제되어있지.

우리는 알아.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의 절반 이상이 우리가 창조한 흑역사라는 걸.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어. 그조차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정말 모든 걸 공유한 전우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걸. 그리고 우리의 말하는 종달새와 함께 진짜 가족이라는 걸 꾸려가는 중이라는 걸 말이야.


다른 사람들에겐 위태해 보였던 순간도 있었고 나조차도 이 터널이 언제 끝나려나 싶은 날들의 연속이었지. 당신은 오죽했을까. 하고 싶어도 안되고 넘어지고 억울해도 다시 일어나 한계까지 해보고 또 해봤던걸 옆에서 내가 다 봤어. 인생 마음대로 안 되는 걸 겨우 깨달은 지난 십오 년이었어. 그때 서로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 물론 지금도 쉽지 않은 순간을 지나고 있어. 기약도 없고 혼란함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온전히 화목하고 지금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로 거듭나리라 믿어. 진짜로!


아무것도 없던 우리가 세 식구가 되고 집을 갖고 직장도 잘 정비해서(?) 열심히 살고 있다. 그렇지. 매일매일 당신이나 나나 어쩌다 보니 이 업계(?)에서 일하게 되다 보니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매일 방전되고 자면서 충전하고 출근해서 에너지 바닥나고. 왜 모르겠어 다 알지. 우리 매일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 칭찬할 일이야.


겁 없던 20대에 음악 한 곡은 만들어보자고 안 좋은 장비로 밤새워 음원 만들며 장렬하게 20대에 감성밴드 여우비를 남기고 산화했던 우리. 이제는 조금씩 아이도 커가고 있고, 피아노도(드디어) 바꿨으니 산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잿더미 속에 숨어있는 우리의 에너지를 모아 또 음악 만들고 창작하면서 노후를 준비해보세.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부모고, 직장인이며, 겁 없는 창작자일 거야.


이 날 이때까지 내가 잊어도 당신은 잊지 않고 날 축하해줘서 고마워. 남자 친구 때보다 남편이 되니 더더욱 살아보길 잘했다 싶은. 굳이 아쉬운 점을 찾아보자면 극 내향인이라 사람 사귈 때 시간 오래 걸리고 집돌이라는 점. 하지만 당신의 성향을 나에게 강요한 적 없다는 게 참 고맙고 그래서 우리가 적절히 알아서 배려하고 절충하며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아. 그리고 나도 집이 좋더라고. ㅎㅎ


내일도 어깨 쫙 펴고 당당하게 출근해. 십오 년 동안 한 번도 내 생일 잊은 적 없는 나의 소중한 남편이고 우리 딸이 가장 사랑하는 아빠니까. 직장에서 못되게 구는 사람 있으면 가만 안둬!(데쓰노트 만들것임!!) 그리고 내일 저녁에도 웃으면서 만나자.


마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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