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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Sep 22. 2016

관계 맺기의 문화, 냉탕과 온탕 사이

이름이 뭐예요,직업이 뭐예요,묻지 말고 친해져요

이름, 나이, 고향, 출신 학교, 직업…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정보다. 친족 중심의 공동체 문화가 관계 맺기 방식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쳐온 한국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이러한 문화도 많이 바뀌어 지나친 신상 공개나 공개 요구는 초면에 실례가 되기도 한다. 개인의 삶을 안전하게, 간섭 없이 유지하면서 타인과 적절한 유대를 해치지 않는 ‘공개’의 적정 지대를 우리는 지금 조심스레 찾고 있다.





‘속속들이’ 탐색하는 한국식 관계 맺기 문화


“너거 아부지 뭐 하시노?” 영화 <친구>의 선생님이 묻는다. “이름이 뭐예요? 전화 번호 뭐예요?” 걸그룹 포미닛이 노래한다. 나이와 성별을 떠나, 우리 사회는 상대방의 신상 수집에 열심이다. 누군가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나이, 고향, 학벌, 아파트의 평수를 캐낸다. 그런데 요즘은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닉네임 외에는 서로에 대해 캐묻지 않는 동호회, 인터넷 공지로 만나 밥만 먹고 흩어지는 모임, 익명의 아이디로 몰래 하는 SNS… 가능하면 사적인 정보를 꽁꽁 숨기려고 한다. 신상의 극단적인 노출 또는 집요한 은폐,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냉탕과 온탕을 오가게 되었나?


개나 고양이는 낯선 상대를 만나면 열심히 서로의 냄새를 맡는다. 상대의 신상을 파악해야 적인지 친구인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도 수렵채집인 시절부터 이런 DNA가 이어져오고 있다. 서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공개하고 공통점과 연결고리를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 오픈할 것인가? 이 점에서는 문화권과 시대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신상 공개에 너그러운 편이다. 우리는 별로 넓지 않은 땅에 친족 중심의 공동체를 구성해서 살아왔다. 길에서 어른을 만나면 인사부터 꾸벅 했다. 십중팔구 사돈의 팔촌은 될 것이니까. 개똥이네 숟가락이 몇 벌인지, 막내아들 볼기짝에 종기가 언제 생겼는지도 잘 알았다. 현대에 들어 도시화가 본격화하면서 지역 공동체는 급속히 무너졌다. 그러나 지연이든 학연이든 어떤 끈을 찾으려는 시도는 여전했다. 권력자들부터 형 동생 하며 사우나를 들락거리는 문화를 주도해왔다. 한국 회사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은 가족의 사생활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문화에 놀라워한다.


1990년대 PC통신 시대가 열리고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하면서 이런 문화에 균열이 생겼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본명 대신 닉네임으로 불렀다. 서로 ‘님’을 붙이며 존칭하는 것도 한국적 서열 문화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익명 게시판이 인기를 모아, 자신을 숨긴 채 편하게 말을 내뱉는 자유를 즐기기도 했다. 이런 문화는 지금의 SNS나 동호회에도 이어져 많은 이들이 실명보다 닉네임을 선호한다. 그럼에도 오프라인에서 모이면 금세 학번과 군대 기수를 들추고 형 누나 하는 관계로 끈끈하게 연결되기도 한다.




신상 공개, 필요할 때도 있고 피로할 때도 많고


그런데 최근에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극단적으로 신상 공개를 꺼리는 모임들이 등장하고 있다. 매주 독서 토론 같은 걸 하면서도 서로 직업 같은 사적 정보를 물어보는 걸 금기시하는 동호회들도 있다. 혼밥족들이 주말에 함께 식사하는 모임을 가지면서도, 연락처의 공유 없이 딱 한 번의 만남으로 뒤끝을 만들지 않는다. 동네 주민 모임을 하는데, 행여 눈치 없이 사는 곳을 구체적으로 물었다가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분명 프라이버시를 중요시 여기는 서구 문화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상 공개에 ‘정색’하는 분위기엔 어떤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게 사실이다. 먼저 한국 사회의 서열 문화는 개인의 정보들을 순식간에 결혼 정보회사의 점수 체계 같은 것으로 둔갑시킨다. 지방 대학 출신, 반지하 거주자, 자동차 없는 뚜벅이 같은 것을 그 사람의 정체성이나 개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영화를 보고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취미나 취향의 영역에서도 자신을 포장하려는 경향이 적지 않다. 그러니 신상의 공개 하나 하나가 피로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최근에는 SNS를 통해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공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직장 상사, 시댁 식구에게 친구 신청이 들어온다면 어떨까? 이미 이런 상황의 당혹감을 경험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어떤 사회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한다 해도, 그 상황을 벗어나면 다른 식으로 행동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이다. 내가 주말에 누구와 만나 뭘 하고 노는지 직장 사람들이 알 필요가 없다. 내가 딴일로 투덜거렸는데, 그게 시댁에 대한 험담으로 들릴 거라는 불안에 떨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 촘촘한 네트워크는 점점 더 우리를 숨지 못하게 한다.


더 큰 공포는 신상 노출이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위험성이다. 최근 ○○패치, ××패치 식으로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이나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남성의 신상을 캐서 공개하는 리스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범죄의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의 신상까지 무차별적으로 폭로하는 양상도 보인다. 특히 여성이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경우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신상을 파헤칠 경우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너무 없다. “너의 집과 직장을 알고 있다.” 이 한마디가 커다란 공포가 된다. 최근 이화여대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이유도 이와 통한다. 얼굴을 드러내는 행위가 어떤 화근을 만들어낼지 모르는 것이다.




나를 얼마나 드러내며 관계 맺으면 좋을까


요즘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혼밥, 혼술 등 혼자만의 시간 보내기를 즐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도 항상 ‘혼자가 좋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스웨덴의 1인 가구는 47%에 이르지만, 이들 대부분은 활기차게 여러 모임을 즐기며 고립감에 빠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스스로를 적당히 내보이면서도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지 여부다. 냉탕과 온탕 사이에는 여러 온도가 있다. 각자 적절한 온도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당한 규모의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적정 온도는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그 온도를 맞추는 실험을 하고 있다. 만약 사적 영역에서 그 온도를 맞춰낸다면, 회사나 학교 같은 공적 영역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개인의 자유와 상호의 친교가 충돌하지 않는 적정의 지대를 찾아보자.




글 이명석

문화비평가 겸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행의 즐거움과 인문학적 호기심을 결합한 <여행자의 로망백서>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도시수집가> <모든 요일의 카페> 등의 저서가 있고, KBS 라디오 <신성원의 문화공감>,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에 고정 출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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