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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Jan 18. 2021

핸드폰에 몇 개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습니까?

 며칠 전 연배가 높은 지인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지나가던 길에 들렀다며 시간 되면 커피 한잔하자는 거였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십 년 이상 차이가 나는 연배에도 불구하고 살갑게 대해주셨던 분이었습니다. 이직을 하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까마득히 잊고 지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에 달려 나갔습니다.


 지인은 회사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아주는 대기업을 다녔고 임원까지 하셨습니다. 작년에 퇴직을 하였고 새로운 일을 알아보려던 차에 코로나 사태가 터져 1년 가까이 쉬고 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코로나 때문에 다들 힘들게 보내고 있는 지금, 퇴직한 나이 많은 노년이 일자리를 찾는 건 쉽지 않습니다.

 지인과 커피 한잔하면서 근황을 물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도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준 사실이 감사하다고 하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회사 다닐 때는 핸드폰을 손에서 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많게는 수백 통씩 통화하는 게 일상이었고요. 찾는 사람도 많고 아쉬운 소리를 하고 듣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거래처 담당자가 한두 명이 아니니 핸드폰이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요란하던 핸드폰은 퇴직 후 1-2주가 지나자 그렇게 잠잠할 수가 없습니다. 핸드폰이 고장 났는지, 진동 모드로 했는지 여러 번 확인도 해보고요. 그러다 핸드폰이 울려 반가운 마음으로 받으면 대출 알선, 여론 조사, 광고성 홍보였습니다.

 '인생을 잘못 살았나' 하는 고민, '대인관계가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실망도 하고요, 퇴직했으니 잠잠한 핸드폰이 이해는 됩니다만 급격하게 조용해진 이 상황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훑어봤습니다. 수백 개가 넘는 번호 중에서 자주 통화하고 이용하는 번호들은 극히 일부라서 놀랬습니다. 나머지 번호들도 누가 있는지 쭉 훑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 친한 친구, 친척, 회사 사람들 번호를 지나갑니다. 친구지만 한 번도 만나지 않는 친구, 몇십 년 전 동창회 이후 본 적 없는 동창, 거래할 때 잠시 만난 담당자, 아주 오래전에 저장한 번호,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까지 수많은 번호와 이름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있으나 마나 한 연락처입니다.


 저장된 번호들 중에서 몇 년 동안 연락을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번호를 무시하기엔 애매한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중에 몇몇은 엄청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번호를 주고받을 당시에는 친했는데 각자 삶을 충실히 사는 동안 자연스레 멀어지고 안부마저 모르고 지내는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부담은 되지만 부담 없이 한 번쯤은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혹시나 하며 연락을 했는데 반갑게 맞이하는 저를 보며 오히려 더 고마워하시니 송구스러웠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조만간 저녁을 꼭 대접하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습니다.




 저녁에 스마트폰을 보다가 지인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 핸드폰에는 전화번호가 얼마나 많이 저장되어 있는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어 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처음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연락처를 일일이 입력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저장된 번호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저장된 이름과 번호를 훑어봅니다. 누군지는 알겠는데 연락을 하지 않은 번호가 정말 대부분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만 해도 통화한 곳은 직장과 직장 관련된 사람, 가족, 어쩌다 친구. 그리고 광고나 홍보 전화가 전부였습니다. 번호를 보니 단짝처럼 친했던 친구도 있고요, 이사하기 전에 심심하면 연락을 주고받았던 이웃, 옛 직장에서 흉금 없이 지냈던 동료, 그리고 삶이 힘들 때 힘이 되어준 선배, 지금은 뭘 하시나 궁금한 지인들 연락처가 눈에 들어옵니다. 학교 졸업 후에 변변한 인사 한번 드리지 못했던 은사님도 계시고요.


 시도 때도 없이 찾는 직장 전화로 짜증이 날 때도 많았습니다. 심심하면 술 한잔하자며 연락하는 친구가 귀찮을 때도 있지만 이들이 현재 나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인간관계가 너무 협소한 것 아닌가 싶지만 한편으로 지금 나와 통화하고 있는 몇몇 안 되는 사람들이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는 사람은 많아도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관계는 많지 않은 게 요즘 현실이니까요.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쭉 보다가 반가운 이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찡해집니다.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합니다.

 서로 비밀 하나 없을 정도로 친했고, 허물없이 마음을 터놓았고,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살다 보니 자연스레 멀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가끔 떠오르고 보고 싶은 몇몇 분들이 있습니다. 이해관계보다 마음이 통하는 진짜 관계였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름만 봐도 예전 마음이 떠올라 울컥해집니다. 내가 먼저 안부라도 한번 전해봐야겠습니다.   




 핸드폰에 몇 개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습니까? 한때는 가까웠던 사이였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각자 삶으로 지금은 멀어져 안부조차 전하지 않지만 한 번씩 생각나고 궁금하고 그리운 사람, 생각나는 사람 있으세요? 안부라도 한번 전해 보심이 어떠실는지요.

 한때는 가까웠던 사이, 지금은 멀어진 사이지만 연락 한 번으로 관계가 잠시 멀어졌던 사이로 갱신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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