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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구 May 05. 2022

아시럽에서 발로 쓰는 평화이야기 116

“얼굴 마주 보고 한번 웃으면 모든 원한이 풀리는 사이”

   (“얼굴 마주 보고 한번 웃으면 모든 원한이 풀리는 사이”)     

 이제 압록강이 점점 가까워지자 매일 꿈속에 대동강에서 빨간 머플러를 휘날리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달리는 내 모습이 보인다. 애당초 내 머릿속에는 제2안은 없었다. 오로지 하나, 그것은 북을 통과해서 신의주에서 시작해서 평양을 거쳐 판문점을 통과하여 남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하여 이 고난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제 딱 1년이 되었다. 1년 동안 나는 1만 3천km를 달려서 이제 중국의 심장 베이징을 코앞에 두고 있다. 단지 남북의 막혀버린 체증을 뚫고자 하는 열망으로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고난도 두 눈 부릅뜨고 맞서서 이겨냈다. 그런 내게 처음부터 제2안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거침없는 발걸음은 이제 산시성의 마지막 도시 광린에 도착하였다. 산시성과 허베이성을 나누는 타이항산맥을 넘어 이제 내일이면 베이징을 품은 허베이성에 진입하게 된다. 이제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는 나의 마음은 지금 바람보다도 빨리 한반도의 평화의 봄을 향해 질주해간다.


 나의 뜀박질은 호기심을 채우는 두레박이다. 새로운 길을 찾아다니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채운다. 무엇보다 축복은 달리면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 안으로 달려가는 내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다.


 아시럽대륙을 달리면서도 내 모든 사고의 두레박은 내 안에 깊은 샘 속에 흐르는 그 신비한 생명수를 길어 올린다. 처음엔 건강을 위해서 달렸지만 이젠 삶에 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의 근육을 만들려고 달리고, 자신감을 더 얻고, 지혜를 얻으려고 달린다. 매일매일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것은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가겠다는 마음의 다짐이기도 하다.     

 아주 멀리 가고 싶은 욕망은 아마도 아주 어린 소년소녀시절부터의 모든 이의 막연한 꿈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멀리 가면 아직 만나지 못한 귀한 그리움을 만나리란 막연한 상상과, 아직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나리란 기대. 그래서 1만 3천km를 달리면서 더 깊은 호수의 전설과 더 오래된 숲속의 이야기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신비와 꿈 자락처럼 펼쳐진 드넓은 초원과 더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을 만나보았다.  

   

 그런들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내 아버지의 고향, 내 마음속의 고향 땅을 밟지 못한다면!    

 

 1년을 새벽 4시면 일어나 준비하고 6시부터 달리기 시작하여 하루 42km를 꾸준히 달려왔다. 지난 9월 1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출발하여 낙엽이 뒹구는 독일의 시골길을 달려왔고, 눈 내리는 불가리아의 소피아를 가까스로 피해왔지만, 터키와 그루지아의 코카서스 산악지역을 지날 때 손과 귀가 어는 듯한 추위도 이겨냈다. 투르크메니스탄과 중국의 신장위루르의 사막에 달릴 때 정수리에서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태양에 넌더리를 치며 헤쳐 나왔다.

 유능한 명의처럼 아시럽의 맥을 짚으며 달려왔다. 아시럽은 지금 경혈의 흐름이 약해 병들어있지만 처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흑해와 카스피 연안을 지나 사막과 사막으로 이어지는 중앙아시아를 다 지나 텐산 산맥을 넘어 신장위구르 지역의 중국 공안의 장벽도 넘어서 된장 냄새, 고추장 냄새 푹푹 풍기는 나의 땀방울들을 아시럽을 가로지르고 쏟아내며 체증처럼 막혀있는 남과 북의 길을 뚫어보려 달려왔다.     


 그러니 처음부터 나의 길은 압록강을 건너는 길 이외에 우회하는 길이란 없었다.   

   

 아버지는 평생 위장병을 달고 사셨다. 나도 위가 별로 안 좋은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달리면서 위장도 튼튼해지고 오장육부가 다 튼튼해졌다. 체했을 때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듣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어깨 쪽부터 손으로 쭉쭉 훑어서 마사지하며 손까지 피를 모은다. 그리고 실로 엄지손가락 피를 안 통하게 해준 다음 바늘을 촛불에 달구어 소독한 다음 아랫부분을 감아 엄지손톱 모서리 끝부분을 바늘로 콕 따주셨다. 그러면 검은 피 한 방울이 솟구쳐 오르고 막혔던 울혈이 풀려 체증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어깨 쪽부터 손으로 쭉쭉 훑어서 마사지하며 손까지 피를 모은들 무슨 소용 있으랴? 엄지손가락을 바늘로 따서 막혔던 울혈을 풀어주지 않으면. 아시럽 대륙을 힘들여 뛰어온들 무슨 소용 있으랴? 내가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 있으랴?


 피 한 방울 뽑아냄으로써 막혔던 체증을 풀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간단하고 편리한 민간요법인가. 내 아시럽 달리기가 한반도의 73년 묵은 체증을 뚫어내는 민간요법이 될 수 있다면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어떤 명의도 치유하지 못한 한반도의 체증을 치료하는 화타가 되는 일인데 여기에 멈출 수가 없는 이유이다.     

 화타는 주나라 때의 전설적인 의사 편작과 더불어 명의(名醫)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약물 처방뿐 아니라 외과 수술에도 정통했다. 그는 ‘최초의 외과 의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마비산이라는 마취제를 만들어 사용했다고도 전해진다. 화타는 약과 침, 뜸 등에 모두 정통했다. 침과 약만으로 치료할 수 없을 경우에는 환자를 마취시키고 환부를 절개했다. 창자에 질병이 있는 경우에도 창자를 잘라 씻어내고 봉합해 고약을 붙이면 4〜5일 만에 고통이 없어지고, 한 달이면 완쾌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반도를 73년 동안 시름시름 않게 한 병은 다른 병도 아니고 체증이다. 피가 돌지 못하고, 사람이 돌지 못하고, 언어가 돌지 못하고 생각이 돌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 체증이다. 돌팔이 축에도 못 끼는 나의 발걸음이 한반도의 끝부분에 피 한 방울 내고 울혈을 풀어줄 기회를 잡았는데 내가 그 정도 결기도 없이 이 험한 길을 나섰을 리가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좋아지면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강이 흐르고 남과 북이 만나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며 그리워하면 그 사이에 평화의 물길이 트인다. 그 물길을 따라 온갖 생명이 자라고 번성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기필코 압록강을 넘어 평양을 거쳐 광화문으로 들어가는 일은 나쁜 피 한 방울 뽑아 우리나라의 울혈을 풀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1979년 1월 1일은 중미 수교 발효 첫날이다. 이날 중국은 전인대 명의로 ‘타이완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한다.     

 “오늘, 1979년 새해를 맞이해 우리는 조국 대륙의 각 민족과 인민을 대표해 동포들에게 안부와 충심 어린 축하를 보낸다. 옛사람은 해마다 명절이 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친지들에 대한 그리움이 평소의 배가 된다고 노래했다. 새해의 즐거움을 누리다 보니 친 골육인 타이완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타이완 동포들의 심정도 같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을 더해질 것이다.

- 중략-

  우리는 이러한 울타리가 계속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편지를 주고받고, 항로를 개통해서 쌍방의 동포들이 직접 만나 소식을 주고받고, 친척과 친구들을 방문하고, 학술과 문화, 체육의 교류가 활발해지기를 희망한다.”     

 무력에 의한 타이완 해방을 포기하고 친척 방문과 관광, 경제교류를 환영한다는 이 편지가 발표되자 타이완 전체가 들썩거렸다. 오매불망 떠나온 고향을 그리며 바다만 바라보던 퇴역 군인들은 타이완에서 결혼한 부인과 자식들과 대륙에 두고 온 조강지처를 생각하면 복장이 터졌지만 죽기 전에 고향을 방문할 수 있다는 희망에 찼다.


 이에 앞서 1978년 실각한 덩샤오핑이 다시 집권하고 타이완에서는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총통에 올랐다. 덩과 장은 모스크바 유학 시절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다. 타이완은 당일 담화를 발표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산당과 담판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그 후 외빈 접견 기회를 적적히 이용하며 “만일 통일이 실현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타이완 정책은 타이완의 현실에 맞게 처리할 방침이다. 타이완의 모든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며 생활방식이 변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통일이다.”고 강조하며 장징궈에게 간접 메시지를 전달했다. 장진궈도 직접 나서지 않고 행정원장의 성명을 통해 답을 했다. 


 마침내 1981년 예젠잉은 다시 9개 항의 평화통일에 대한 방침을 천명한다. 이는 누가 봐도 타이완에 유리한 통일안이라고 호평한다. 7개월 후 장징궈는 장제스를 추모하는 글을 발표했다.


 “아버지는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 영혼이 고향에 있는 조상들과 함께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모든 이들의 효심이 민족의 정을 확산시키고, 민족을 경애하며, 국가에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장제스의 마음을 담았다. 장징궈의 화답이었다.

 다시 중국은 장징궈 총통의 어릴 적 2년 선배 랴오청즈의 인민일보 기고를 통해서 통일의 실현을 간곡히 호소했다. “통일은 빠를수록 좋다. 이 위업을 동생이 실현해야 한다. 아시아태평양지구와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길이다. 우리는 만나서 한번 웃으면 모든 원한이 풀리는 사이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자. 내 동생이 세인의 추앙을 받고, 이름이 청사에 빛나기를 나는 소망한다.”


 “총통은 신문에 실린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읽고 또 읽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그간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토해내는 것 같았다. 얼굴 마주하고 웃으면 모든 원한이 풀리는 사이라는 말에 심장이 뛰는 듯했으리라!” 장징궈의 측근이 남긴 기록이다.    

 

 이 무렵 갈라진 중국 대륙의 인민과 타이완 시민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었으니 그녀가 등려군(鄧麗君덩리쥔)이다. 중화권 음악계의 영원한 연인 등려군은 '첨밀밀(甛蜜蜜-티엔미미)'이라는 영화로도 이미 널리 알려진 모든 중화인들을 하나의 연결 고리로 엮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달콤하다'라는 뜻만큼 팬들의 기억 속에 언제나 '달콤한 옛사랑'처럼 다가오는 등려군(덩리쥔).


 인연은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하늘이 정해놓은 것일까. 유명한 영화 속 대사가 있다. “인연이 있다면 천 리를 떨어져 있어도 만나고, 인연이 없다면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만나지 못한다.” 두 사랑하는 연인 소군과 이요는 10년간 수도 없이 만나고 헤어진다. 그리고 홍콩을 떠나 지구의 반대편 뉴욕에서 다시 재회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연결선이 강하게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녀는 중국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서 신 중국 창건 이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문화계 인사 1위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밤과 낮'을 지배한 두 사람 등려군과 등소평 중국에선 한때 '낮은 등소평이 지배하고 밤은 등려군 세상'(白天聽鄧大人的, 晩上聽小鄧的)이란 말이 유행했었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물결을 타고 대만 가수 등려군(鄧麗君)의 음악이 대륙으로 흘러들면서 혁명가와 군가에 익숙해 온 대륙 사람들에게 사랑과 이별을 다룬 노래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은 단시간 내에 극단적인 인류적 실험을 치러낸 나라이다. 마오쩌둥은 평등사회구현을 위한 극단적인 실험을 해서 처절하게 실패를 보았고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의 개혁개방은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무분별한 차등 실험으로 중국의 역사를 치닫게 했다.

 4억 5천만의 인구가 한꺼번에 도시로 이동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심화되고 대도시 중심의 사회는 양극화의 극단적 양상을 만들어냈다. 이는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 에너지 낭비. 관료의 부패, 도덕적 문란 등 천민자본주의의 모든 부작용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말았다.


 이제 중국은 새로운 실험의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만약 세계 인구의 25%를 차지하는 중국이 미국과 같은 산업사회를 모델로 하여 자원을 낭비한다면 자원은 금방 고갈될 것이고 인류는 공멸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대부분의 미래학자는 중국이 머지않은 시점에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 같은 초강대국의 패권을 대신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된다. 그것은 인류에게 재앙과 같을 것이다. 서구가 구축한 산업제국주의적 모델이 아닌 아시아적인 정신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사람들은 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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