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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이 Aug 29. 2024

|아침이 오면

허밍

 어둑한 밤이면 당신의 노래가 떠오른다. 애교스러운 비음이 가득한 당신의 허밍.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오르는 소리에 갇혀 나는 여전히 그날 그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시간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고정되어 있겠다는 것은 흐름에 휩쓸려 잃어버릴 모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무언의 소멸에 대한 각오를 져야 했다. 그리고 그 흐름에 당신의 모습을 잃었다.


 당신의 이목구비는 어떻게 생겼는지. 사랑했던 눈빛은 어떤 감각을 띄고 있었는지. 추억에 서려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던 당신의 잔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내게 남은 건 당신의 목소리 하나. 그마저도 육성이 아닌 입을 다문 채로 불러댔던 콧노래뿐이다. 언젠가 다시 만날 당신을 기약하고 있지만, 그때가 되어서 당신을 떠올리지 못할까 겁이 난다. 당신을 보고도 지나쳐 버리면 지금까지의 일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덕분에 나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매일 밤이면 당신의 허밍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기억해야 하니까. 가볍지만 깊었고 차가운 듯 따스한, 밤의 어둠과 별의 반짝임 같던 당신의 소리를. 그 노래를.


 들리지 않는 노래에 빠져 나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다. 아침 새의 지저귐을 알람 삼아 잠에서 깬 나는 습관적으로 머리맡에 놓여있을 담배를 찾아 손을 허우적거렸다. 반쯤 감긴 눈으로 겨우 담배를 손에 들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켜지지 않은 티비 화면 속에 비추는 나의 모습을 주시했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피폐함의 결정체. 생기를 잃은 눈빛, 손가락 사이로 힘없이 쥐어든 담배와 영혼을 던져내듯 뿜어져 나오는 허연 연무. 정돈되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는 좀비 같은 외향의 클라이맥스였다. 내가 가장 혐오했던 인간상. 꿈은 있으나 노력하지 않으며 노력하지 않으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이들. 어느새 그건 나 자신을 뜻하는 말이 되어 있었다.


 집 안과 집 밖의 나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까지 집 안에서의 좀비 같은 외향일 수는 없었다. 남들의 범주에는 당신의 이름도 있었기에 결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조차도 당신을 만난다는 가정하에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한들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안 될 거라고 생각해도 어떤 미련이 자꾸만 나를 집 밖으로 나서게 만들고 만다. 반사적인 행동의 명분을 위해 나는 믿음이라는 페르소나가 되어야만 했다. 


 곧 밖으로 나갈 채비를 시작한다. 세면대 앞에 서서 얼굴에 찬물을 끼얹자 갑작스러운 냉기의 세례에 온몸이 화들짝 놀라며 몸에 깃든 잠을 내쫓는다. 하지만 그 냉기가 내면에 미치지는 않는다. 깨어있는 몸과 잠들어 있는 마음. 정신은 깨어나질 않고 몽유병 환자 같은 치레로 한숨을 내쉬며 온몸을 냉기로 뒤덮었다. 


 몸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내고 거실 구석에 놓여있는 드라이기를 집어 들어 젖은 머리를 말끔하게 정돈한다. 바닥에는 빠진 머리카락이, 탁자 위에는 담배꽁초가 꽂힌 초록의 술병이 가득하고 허공은 굳게 닫힌 창문 탓에 빠져나가지 못한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거울 앞의 말끔한 청년과 뒤편으로 보이는 집안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괴팍한 이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사는 건지 가슴속으로 탄식하지만 그뿐이다. 내게는 이 패턴을 바꿀 만한 동기가 없다.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 찰나에 눈에 들어오는 작은 약통. 약을 먹는 것을 자꾸 까먹었던 나도, 몇 년 째 먹다보니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도 않은 채 약을 삼켰겠지만 오늘은 왜인지 손이 가지 않는다. 괜스레 먹을까 말까 고민했다.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먹어야겠지.'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착각에 빠져 병을 더 키우기도 한다니까.' 잠시 동안의 일탈을 허락한 루틴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입 속에 약을 한 움큼 털어넣고 현관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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