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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Giving Lounge

친애하는 ㅇㅇ씨, 덕분에 기도합니다.

by 여름나무

"또 자판기가 고장 났어요?"


오늘, 오랜만에 공간에 방문한 그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리고 그는 인사를 하는 나를 향해 툭하고 한마디를 "뱉었다". "또 자판기가 고장 났어요?" 라며. '뱉는다'라는 동사를 이런 공개적인 공간에 사용하는 것이 과연 괜찮은 선택일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지만, 결국 이 표현이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단어이기에 지우지 않고 적기로 결심했다. 만약 저 말이 애순을 향한 관식의 애정이 담긴 말이었다면, 아니, 만약 저 말이 세호를 향한 재석의 말이었다면, 나는 감히 '뱉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의 안녕을 묻는 나를 그저 '자판기'로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에 내 마음이 팍 상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불쾌한 에피소드를 겪고 나면 나는 감정을 쉬이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가 내 안의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건드렸기에 이렇게까지 내 마음이 뒤집어진 것인지, 그 어떤 작은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 샅샅이 내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내가 완벽한 피해자라는 증거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애꿎은 이불만 차며 "아, 그때 이렇게 대답했어야 하는 건데!" 하며 찝찝한 가해자로 남는 결말에 다다르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르다. 작년 12월부터 지금의 5월에 이르기까지, 장장 5개월의 시간 동안 이 공간을 지켜오며 차곡차곡 쌓아온 나의 기억 속에 그는 이미 존중이 없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의미 없는 말 한마디에도 내 마음은 이미 상할 준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보시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기에 기여하는 시간과 정성을 비인격화하고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언행이 이렇게나 위험한 것입니다!


"말은 행복하게 하고 싶은 대상에게 해야 한다. '대화하시면 안 됩니다'가 아니라 '조용한 시간을 보장합니다'처럼." <어서 오세요, 책 읽는 가게입니다." 아쿠스 다카시, p173


나는 나의 공간을 찾는 자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 물론 아직도 그 행복의 정의를 내리는 과정 중에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존중', '다정함', 그리고 '감사'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가치라는 점은 분명하다.


당신의 시간을 존중해요.

당신이 쏟는 정성을 한 톨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과 제가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사랑하다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었음에 감사해요.


내가 있는 공간이 이런 메시지를 주는 공간이 되기를, 다음에 그를 만났을 때는 조금 더 넉넉한 품으로 다정하게 받아칠 수 있기를, 한 번 더 기도하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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